나는 너를 본다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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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습관의 동물이야. 당신도 다르지 않지.

당신은 매일 아침 같은 코트를 걸치고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선호하는 좌석이 있어. 어떤 에스컬레이터가 가장 빠른지, 어떤 개찰구로 통과해야 하는지, 어떤 매점 줄이 가장 짧은지 정확히 알지.

나도 당신의 그런 점들을 알고 있어.

...............반복되는 일상은 편할 거야. 친숙하고 안정적이겠지.

안심하게 만들겠지. 하지만 그런 일상이 당신을 해칠 수도 있어.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사무 업무를 보는 조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다가 광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지하고 편안한 만남을 원하는 기혼 여성이라는 모토로 간단한 숫자와 웹주소만 기재되어 있는 그 데이트 광고 속 여성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얼굴로 보였다. 걱정이 되어 집에 도착해 가족들에게 신문을 보여주지만,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거나, 그저 그녀와 닮은 누군가 일 거라고 치부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조 역시 자신일 리 없다고, 자신의 사진을 신문에 내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생각한다.

소매치기 전담팀에서 석 달 동안 근무한 순경 캐시는 다시 지구 치안팀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녀에게 소매치기 전담팀의 마지막 날 수사했던 피해자에 관한 제보가 들어온다. 피해자의 사진이 <런던 가제트>의 광고란에 실렸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열쇠를 잃어버리기 직전에.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 그녀는 자신의 사진도 같은 서비스 광고에 실렸다고 제보하고 캐시는 더 이상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지만 사건의 연관성을 깨닫고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열쇠를 잃어버린 캐시는 얼마 뒤 자신의 집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해 열쇠를 바꾸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조는 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다가 피해자가 바로 어제 광고에 실린 여성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하철에서, 집에서, 어디서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뒤쫓고 있다고 느끼면서 점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럼 이 남자들은 누굴까?

당신의 친구, 아버지, 형제, 친한 친구, 이웃, 상사들이지. 당신이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들이야. 직장과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당신은 충격 받을 거야. 그들을 더 잘 안다고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당신이 틀렸어.

'감시'라는 주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만으로 치부되지 않는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지 안전을 이유로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게다가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까지 더해져 더 이상 누군가의 사생활도 완벽하게 보장받을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란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매일매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위치와 시간, 점심 시간의 이동 경로, 퇴근길과 주말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행사나 일정이 있지 않는 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지만 편할 것이고, 그 낯설지 않음이 안정적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그런 당신의 일상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면 어떨까. 당신의 그 사소한 습관들을 매일같이 기록하고 감시해왔다면, 그러던 어느 날 늦게 퇴근해서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낯선 발소리가 가까워진다면 말이다. 주위엔 당신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 둘뿐이라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바로 내일 나한테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니 말이다. 일상의 친숙함이 공포로 바뀌는 그 순간,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다.

클레어 맥킨토시는 12년 동안 영국 경찰로 재직하며 범죄 수사과 형사와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총경을 지낸 이력을 가진 작가이다. 전작인 <너를 놓아줄게>가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들과 비극 이후 완전히 달라져버린 인물들의 풍경들이 지루할 틈 없이 끝까지 달려가는 이야기로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흥미로웠다. 21세기 감시 사회라는 누구라도 한번쯤 생각해봤을 만한 문제를 가지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더욱 오싹하기도 했고 말이다. 현대의 감시 사회라는 모티프는 다른 여타의 작품에서도 다뤄진 적이 많은 소재이지만, 클레어 맥킨토시가 전직 경찰이었던 작가이기에 좀더 탄탄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유독 민감한 요즘이라 더욱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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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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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타, 우리 다섯 사람의 나이를 다 합하면, 거의 5백 년이야, 알기나 해? 지금 이게 우리 나이에 할 짓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완전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매우 우아하고 섬세하기까지 한 노인 판 로빈 후드를 만나게 된다.

은행 강도 연습을 하는 것과 실제로 은행 강도를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절대로 우리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돼. 다시 말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을 국가가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개입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해! 이 점을 잊지 마."

갈퀴는 속으로 생각했다. '21세기의 로빈 후드가 되겠다는 거야? 하지만 셔우드 숲속의 영웅이 할망구와 비교되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겠군..............'

전작인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에서 이들 노인들은 다이아몬드 요양소의 운영방식에 반발해 강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강도 짓을 해서 현행범으로 잡히는 것이 목표이다. 피를 안 보고도 충분히 감옥에 갈 수 있는 금융 사건을 계획하는데, 세금도 안 내면서 돈만 모으는 부자 놈들의 돈은 훔쳐도 괜찮으니 그들의 것을 훔쳐보자는 것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매력 만점의 이 캐릭터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계획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로 모의하는데,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이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글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특히나 메르타, 천재, 갈퀴, 스티나, 안나그레타까지 다섯 명의 캐릭터들만의 색깔도 뚜렷해서 앞으로 이야기가 시리즈로 전개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왔다.

"내가 이렇게 범죄자가 될지는 나도 몰랐는데, 여하튼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국가가 먼저 나서서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일을 해주었다면 나 같은 힘없는 늙은이들이 이렇게 나서지는 않았을 거야....."

이번에는 스웨덴을 떠나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로 향해 대담하게도 카지노를 털기로 하는 노인 강도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국에서 이미 지명 수배를 받고 있기에 그 동안은 이곳에서 모두들 조심하며 몸을 사려 왔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지루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이들이 제대로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다. '부자들은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세상에서, 노인 강도단은 가장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으로 노인과 청소년 시설, 문화 시설 등에 익명으로 기부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돈이 중간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우연히 획득했던 다이아몬드 마저 세관원과 실랑이를 하다 실수로 잃어버리고 만다. 게다가 새로 구한 그들의 빌라 이웃에는 폭주족 클럽의 두목들이 살고 있었으니, 수상한 노인들과 더 수상한 폭력 조직원들이 엮여서 스토리를 점점 더 스케일이 커지고 꼬여 재미를 더 해준다. 훔친 돈을 다시 도둑맞고, 실수로 잃어 버리고, 그것들이 더 나쁜 놈들의 손에 들어가 다시 찾아와야 하는 일련의 상황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메세지들이 곳곳에 등장해 웃으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과 극중 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이지. 어떻게 해서든 우리 기금에 돈을 집어넣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소외되고 헐벗은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우리의 선행은 끝이야. 그런데 우린 단 하루도,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 노인들이 형편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가 없어. 노인들만이 아니잖아. 노숙자들도 있고 예산이 줄어들어서 쩔쩔매는 학교와 문화 시설들.... 무언가를 해야 돼, 우리가!"

"하지만, 메르타, 우리가 세상 사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잖아! 지구 전체를 구하겠다는 메르타의 갸륵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시작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그리고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까지 노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작품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아졌다. 백세의 알란, 쉰 아홉의 오베, 육십 대 초반의 폴리팩스 부인, 그리고 여든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메르타 할머니까지.. 이들은 그 나이라고는 절대 믿기지 않을 만큼의 압도적인 추진력을 자랑하는데, 덕분에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 팔지 않고 시원하게 달려나간다. 지루할 틈 없이 그야말로 유쾌하고 상큼 발랄하게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설정이 바로 다섯 명의 노인 강도단이 등장하는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가 아닐까 싶은데, 이상하게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들의 이야기에 설득 당하고 만다. 회 양극화와 노인 문제로 차별을 겪은 적이 있었다면,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분개한 적이 있다면, 그야말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만한 이야기인데다, '정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웃길까'를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전개가 이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어우러져 진심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이 일종의 범죄 소설 스토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쉽게만 진행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사실 그런 부분 쯤은 눈감아 주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는 점이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노인이 아니라,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당차고 유쾌한 노인들의 모습은 언젠가 내가 나이를 먹어서 되고 싶은 이상향에 가깝기도 하다.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는 멋지게 나이를 먹는 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리고 노인이야 말로 그가 보내온 세월의 두께만큼 현명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게다가 그 와중에 배꼽 빠지게 웃음 폭탄까지 선사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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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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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4(1519) 8. 자연 만물이 그렇듯 바다도 계절마다 제 얼굴색을 바꾼다. 8월의 바다는 진청색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시작된 은빛 물비늘이 파도에 끌려 육지로 가까워지면서 점점 자리를 넓힌다. 열네 살의 소녀 사임당은 짙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은빛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본다. 저 청연한 바다색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롯이 빛나는 자연 그대로의 색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연에서 채취된 색이지만 인간의 손이 닿는 순간 색은 자연 그대로의 빛깔을 잃어버린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대학교의 강사인 지윤, 그녀는 교수 임용을 앞두고 여러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미술사학계의 실세인 민정학 교수를 위해 그의 집안일이며 연구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오백 년 된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발견한 민교수가 그것이 진품임을 입증하는 논문 작업을 지윤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술작품을 대하는 안목만큼은 남달랐던 그녀였지만, 말로만 듣던 <금강산도>는 뭔가 이상하기만 했다. 그 의심은 학술회장에서 무심코 내뱉은 대답 때문에 일파만파 커지게 되고, 그 일로 민교수는 이탈리아 학회까지 데려가서 지윤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녀는 연구원 해직에 시간강사 자리까지 잃어 버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남편 민석을 찾는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난리가 난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우연히 이탈리아 고서점에서 발견한 사임당 신씨의 일기로 추정되는 고서인데, 그 속에 금강산도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진품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어쨌거나 삶은 지속되었고, 사는 동안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현재의 지윤이 그렇게 가정과 직장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야기는 훌쩍 과거로 간다. 때는 중종 14(1519), 열네 살 소녀 사임당이 색에 대한 관심으로 진사댁 자제로서 비단옷을 걸치고도 색을 구하려고 나무를 올라타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녀는 진보적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신명화 덕분에 여자인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간 헌원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빛의 낯선 도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겸이다. 그들은 그림을 좋아하는 공통점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 어린 예술가는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고 예술을 견인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시대는 두 연인을 갈라놓고 마는데, 기묘사화의 여파를 무심코 그림에 담았던 사임당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임당은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 사임당과 첫사랑 이겸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들 사이에 질투에 눈이 먼 휘음당과 권력의 화신 민치형이 끼어 들면서 과거사는 파도에 휘청거리며 급 물살을 타게 흘러간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유민들을 바라보던 사임당은 이내 생각에 잠긴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굴복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진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산에 굴러다니는 칡넝쿨이라도 캐서 허기를 달래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세상은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의 인생은 바꿀 수 있다.

현재의 지윤이 발견한 고서를 복원해서, 그 한자들을 해석하는 이야기가 과거 사임당의 일상을 담은 일기로 교차 진행되는 스토리는, 굳이 타임 슬립 소재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임팩트는 적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부분은 많다. 현재의 지윤은 여덟 살 아이를 둔 엄마이고,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남편이 가정을 어렵게 만들어 시부모와 가족들 모두의 생계를 그녀가 갑자기 떠안게 된 상태이다. 과거의 사임당은 네 명의 아이를 둔 엄마이고, 사랑 없이 결혼한 남편은 벌이가 수월치 않았고, 집까지 날려먹는 등 사고만 쳤고, 그녀의 힘으로 아이들과 함께 폐가에서 겨우 살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지윤은 사임당의 일기를 읽으며 과거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사라지고 나앉게 생긴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 같았고, 사임당의 셋째 아들 현룡은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자신의 아들 은수 같았으며, 일만 저질러놓고 사라진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지금 자신의 남편 민석과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사임당이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졌다. 현실이 너무도 참담했고,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놓은 문제는 해결해야 했으니 말이다.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이영애, 송승헌 주연의 드라마 사임당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만 읽어도 왜 사임당 역할에 이영애인지 알 것만 같았다. 사임당이 보여주고 있는 엄마로서의 모습, 예술인으로서의 모습, 아내로서, 여성으로서의 모습들 모두에서 단아하고, 기품 있는 그녀의 선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배우로서 오랜만의 복귀 작이라 엄청난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자체의 반응이 막 뜨겁지는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꼭 드라마가 아니어도 이 작품은 소설로서도 그 자체 매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것만 읽어도 누구나 그녀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어머니상으로서의 사임당뿐만 아니라 그녀의 예술혼까지 보여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라서 더욱 가치가 있을 테고 말이다. 단순히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임당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렇게 세련된 필치로 풀어내는 방식이라면, 위인들에게 관심 없는 청소년들에게 추천해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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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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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빈말들을 안 하게 만들고 싶어요. 성의없는 안부 인사, 관심없는 겉치레, 배려없는 이기심, 허세로 가득한 있는 척, 괜찮은 척 이런 것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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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 봄처럼 찾아온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
클레리 아비 지음, 이세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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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맨스 소설은 그다지 읽지 않는다. 유치하고, 비현실적이고, 어디선가 한번쯤 본듯한 상황 전개에, 반복되는 우연 남발까지.. 거의 만족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로맨스 소설에 대한 나의 기대치를 벗어나는 작품을 만난다. 봄바람처럼 내 심장을 설레 이게 만드는 이 작품처럼 말이다.

문득 동생과 이 여자의 처지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자는 달랑 자기 인생만 말아먹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다. 동생은 술을 그렇게 퍼 마시고도 운전대를 잡았다. 그랬기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열네 살 소녀 두 명이 죽었다. 그런 인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지, 왜 이 여자일까.

 

이 여자, 등반 중 눈사태로 인한 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진 지 20주째이다. 그리고 의식이 깨어난 지는 6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식이 깨어난 그녀에게 남은 감각이란 오로지 청각뿐이었고, 그녀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다.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가족들도 차츰 발길을 끊기 시작했고, 그녀는 오로지 수많은 것들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매일 밤 사고가 나던 순간에 대해 꿈을 꾸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오만 가지 이미지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 남자, 음주운전으로 어린 소녀들을 죽게 만든 동생이 보기 싫어 병원까지 와서도 동생의 병실에 가지 않겠다고 소리친다. 그러다 우연히 잘못 들어간 병실에서 재스민 향기를 풍기며 누워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사고로 혼수 상태라는 그녀의 병명을 확인하다 그 날이 하필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무심코 그녀의 볼에 생일 선물로 뽀뽀를 하고 만다.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도둑 뽀뽀였지만,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1년 만에 여자에게 한 뽀뽀였다. 그는 그녀와 동생의 입장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미워서 일수도 있고, 그녀가 좋은 사람 같아서 깨어났으면 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여자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뚜렷한 감각. 티보가 내 뺩에 뽀뽀를 한다. 입안에서 풍미가 폭발하는 것 같은 기분. 말을 듣지 않는 뇌를 이 느낌에 집중시킨다. 키스하고 싶은 그의 입술 모양, 입매의 곡선, 장밋빛 살의 주름 하나까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뜨고 싶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내가 그럴 수 있기도 전에 온기가 스러져간다.

 

스물 아홉의 엘자, 그녀는 누가 봐도 다시 깨어날 가망이 없는 환자이다. 혼수 상태인 몸 안에 갇혀 있는 그녀의 삶이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삶이기도 하고 말이다. 의사들은 그녀가 회복될 확률이 2퍼센트도 될까 말까 하다고, 만의 하나 깨어난다고 해도 심각한 외상 때문에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얼마나 돌아올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망이 없다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연명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선고하고, 가족들의 동의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결정한다. 그녀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서른 넷의 티보, 그는 음주운전으로 어린 소녀를 두 명이나 죽인 동생이 회복되지 않고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용서할 수가 없다. 1년전 자신을 배신한 여자 친구에게 받은 상처로 아무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생의 면회를 오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오면서도 한사코 동생을 보지 않으려고 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혼수 상태의 엘자에게 이상하게 자꾸 관심이 생긴다. 처음에는 그저 그곳이 시간이 멈춘 인큐베이터처럼 느껴졌기에,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도, 스트레스도, 고민도 다 잊어버리고 잠시라도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그녀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은 굉장히 이상한 로맨스 소설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라니,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말이다. 움직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도 없는 여자에게, 그것도 심지어 모르는 사이였던 환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다니. 그렇게 이 작품은 말도 안 된다 싶을 만큼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들어 준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게 되면 죽어버린 연애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무덤덤해진 내 심장도 쿵쿵 뛰게 만들었으니, 설레는 이 계절 싱숭생숭해지는 마음들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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