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시즌 모중석 스릴러 클럽 44
C. J. 박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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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누운 채로 몸을 뒤척였다. 생각을 딴 데로 돌려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메리베스가 범인 추적을 위해 중무장한 두 남자와 산으로 들어온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좋은 사람이 돼 나쁜 사람을 쫓고 싶다는 조의 어린 시절 꿈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흥분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왠지 메리베스는 이런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공들여 설명해도.

 

 

오픈 시즌이란 특정 동물에 한해 공식적으로 정부가 사냥을 허가하는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수렵감시관이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의 배경은 미국 중서부, 광활하고 적막한 와이오밍 주의 대자연이다. 멸종위기종 보호라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는 있으며, 자연을 주요 제제로 삼고 있다고 해서 '에코스릴러'라고 부른다. 게다가 조 피킷 시리즈는 전세계 27개국 출간, 미국 내에서만 1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오픈 시즌> 이래 십칠 년 동안 열일곱 권의 작품이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이다. 첫 작품인 <오픈 시즌> 2001년에 출간된 이래, 매년 꾸준히 시리즈가 한 편씩 출간되고 있으며, 최신작 <악순환>은 바로 올해 3월에 출간되었으니 여전히 진행 중인 작품이기도 하다. 리 차일드는 이 시리즈에 대해 장르소설과 서부극의 환상적인 조화라고 말했는데, 나로서는 에코스릴러라는 장르 자체도 낯선 데다 서부극이라고 하면 바로 연상되는 이미지 덕분에 도무지 스릴러라는 장르와의 조합이 연상되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왜 이 시리즈를 2000년대 가장 성공적인 스릴러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조 피킷만은 예외일 거야. 자넨 깨끗하고 순수하고 선하니까."

 

가장 흥미로운 건 바로 조 피킷이라는 캐릭터이다. 그는 거친 남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수렵감시관일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제 막 수렵 감시관이 된지 일주일 된 신참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벌써 유명인사였는데, 이유인 즉 허가 없이 낚시했다고 와이오밍 주지사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조는 일을 망칠 때면 아주 제대로, 공개적으로 망치곤 했는데, 오래도록 바랐던 꿈의 직장인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도 면접 날짜를 달력에 잘못 적어서 기회를 제대로 날릴 뻔 하기도 했다. 그와 아내인 메리베스는 아직도 그 일을 돌대가리 같은 짓이라 부른다. 지금은 아직 사슴 사냥 시즌이 시작되기 넉 달전이었고, 조는 한 주민의 밀렵 현장을 적발한다. 남자는 캠핑 장비점 주인인 오티 킬리였고, 그는 눈감고 넘어가주기를 바랬지만 조는 원칙대로 딱지를 끊고 범칙금을 부과한다. 하지만 오티는 조의 총을 빼앗아 그를 협박했고, 몇 개월 뒤 신참 수렵감시관이 지역 주민에게 무기를 빼앗겼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결국 그 사건 또한 조의 인사 기록에 영영 오점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조와 오티 사이에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조의 집 뒤뜰에서 오티가 시체로 발견된다.

 

 

"동물은 죽게 돼 있네, ." 번이 말했다. "모든 종은 결국 멸종할 운명이고. 물고기가 뭍으로 올라와 폐로 숨을 쉬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래왔잖나.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말이야.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죽일지, 우리가 어떻게 조정할 수 있겠나. 우리는 현실 세계와 자연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전능하지 않다네. 지구상에 있는 핵폭탄을 모두 합쳐도 파괴력은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의 만분의 일에도 못 미쳐. 인간은 그렇게 작고 연약한 존재야. 인간에게는 보호할 능력도 창조할 능력도 없네. 그저 그게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져 살 뿐이지. 멸종 위기에 처한 새를 보호하는 건 진화를 막는 거나 다름없네. 한낱 인간으로서 그런 짓을 하면 되겟나?" 번이 말했다. "그건 신의 영역 아닌가."

 

 

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두 가지 뿐이었다. 자기 가족과 직업. 그는 지금껏 둘을 분리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오티 킬리의 시체가 자신의 집에서 발견됨으로써 그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버리고 만다. 살인 사건은 두 아이와 아내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으로 남게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범인 추적을 위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좋은 사람이 되어 나쁜 사람을 쫓고 싶다는 그의 어린 시절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되지만, 분석실로 보낸 증거는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사건이 대충 수사되어 그냥 덮이고 말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는 살인 사건의 이면에 뭔가 있음을 직감하고 내막을 캐기 시작하지만, 과거의 실수를 빌미로 정직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조는 식구들을 실망시키게 되어 죄책감이 들었고, 장시간 노동에도 낮은 봉급에 만족하며 정부의 한심한 관료주의에 시달려온 인생의 한 토막이 끝나 안도했으며, 남들의 졸 노릇만 해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주어진 임무를 청렴하고 성실히 수행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그의 믿음은 크게 흔들리게 되고, 힘들게 결심한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리고, 그의 가족들은 길에 나앉게 생긴다. ,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현실을 헤쳐 나갈 것인가.

 

"당신이 이 모든 사건에 연루됐다는 게 밝혀지면 우리는 여기서 화끈한 서부극을 찍게 될 겁니다."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단순히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 캐릭터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오히려 약간은 법을 어기거나, 제멋대로 하더라도, 사건에 해결하는 영웅 캐릭터가 박수를 받는 장르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조 피킷은 어떻게 보면 다소 고지식하다고 생각될 만큼 꿋꿋하게, 융통성 없이 원칙을 고수하며 일을 처리하고, 아내와 아이들만 생각하는 매우 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선발 시험에 겨우 합격했을 만큼 신체적 능력도 부족하고, 사건을 뒤쫓는다지만 별다른 추리력도 없어 보인다. 서부극의 배경에서 거친 마초의 성격과 외모를 가지지 않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릴러라니, 놀랍도록 신선했다. 시리즈 히어로다운 특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이지만, 바로 그 부분에서 오는 묘한 매력이 눈길을 사로 잡아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고, 그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꼭 피가 튀고 살이 찢겨야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이 증명한다.는 언론의 평처럼, 이 작품은 긴장감을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힘으로 완벽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조 피킷의 팬이 되었다. 부디 이 시리즈가 하나씩 차례로 출간되어 열 입곤 모두를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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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 부의 탄생, 부의 현재, 부의 미래
하노 벡.우르반 바허.마르코 헤으만 지음, 강영옥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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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는 곧 인플레이션의 역사다. 이 때문에인플레이션이 끝났다는 말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2016년에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의 조짐이 보였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 태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통화를 붕괴시킬 수 있는 세력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통화 붕괴 작전의 각본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화폐가 파괴되는 데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인플레이션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통화량의 증가로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모든 상품의 물가가 전반적으로 꾸준히 오르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물건 값은 계속 오르는데, 내 월급은 언제나 제자리인 상태.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만큼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물가가 오르는데, 그에 맞춰 가정의 수입은 오르지 않으니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인플레이션은 반갑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고생에 비하면 지불하는 돈의 가치는 그에 결코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이 책은 역사상 손에 꼽히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그래서 인플레이션을 떠올리면 치를 떨었던 독일의 학자들이 저술했다. 저자인 하노 벡은 2000년 인류 역사에 감춰진 인플레이션의 비밀을 파헤쳤다. 그는 소시민들이 금융위기 시대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함을 깨닫고 인플레이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고,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금리와 인플레이션율은 지난 35년 동안 꾸준히 하락해왔다. 이러한 하향세는 이제 종지부를 찍고 상승세로 돌아설 조짐이 보인다. 바로 그 전환점에 서서,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어떤 전략을 짜야 이러한 위기로부터 소중한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고, 실용적이고, 유용한 정보들을 가득 담고 있다.

 

 

부채를 처리할 때도 인플레이션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셈이다. 결국 인플레이션만큼 국가의 채무를 해결하기에 매력적인 방법은 없다. 앞 장에서 우리는 국가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앞장서서 인플레이션을 조장해온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처럼 오랜 교훈을 정치인들이 잊을 리 없다. 여기에서 반론이 제기될 만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인플레이션율을 직접 결정할 수 있을까?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1923년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쓴 맛을 한번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또다시 인플레이션을 조작하라는 유혹이 손짓을 하고 있다.

 

지폐의 탄생과 함께 인플레이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따라서 돈의 역사는 곧 인플레이션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초의 화폐는 등장하자마자 국가에 의해 본래의 화폐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의 역사는 돈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돈이 나타내는 가치가 달라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나 공감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은 다름아닌 '피해자는 언제나 소시민이라는 점'이었다. 가난할수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많은 타격을 입게 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집도, 금도, 유가물도 없다. 그저 통장에 현금이 조금 들어 있을 뿐. 인플레이션은 바로 이 현금의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이니 저소득 계층일 수록 인플레이션을 피해갈 기회가 더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플레이션 게임의 승자는 누구인가? 저자는 말한다. 인플레이션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채무자와 채권자 중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지는 인플레이션율을 예측하고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좌우된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열심히 돈을 벌고 모으면 된다는 순진무구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 것이다. 경제를 움직이는 감춰진 원리가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고 그저 아끼면 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꼭 만나보기를 바란다. 경제에 관해 완전히 관심이 없었던 이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쓰여진 책이라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경제가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현명하게 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그래도 조금은 덜 피해를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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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할걸 그랬어
소피 블래콜 지음, 최세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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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열차가 강 밑을 지날 때 당신이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어요. 당신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여자가 나예요. 그럴 때미혼이신가요.”라고 묻는다면 실례였겠지만, 그때 내 머릿속은 당신이코피 터지게근사하단 생각뿐이었어요.

 

완연한 가을이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것이 겨울이 벌써 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옆구리가 허전한 계절이 돌아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지금 현재 솔로인 사람들은 12월이 오기 전에 어서 분주히 주변을 살펴서 자신의 짝을 만나길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엔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테니까.

 

여기,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우연들이 모여서, 인연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이 있다. 어쩌면 부질없는 희망일지도, 어이없는 착각일수도 있는 순간들을 따뜻하고 유며 있는 그림으로 표현해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법같은 책이다.

 

미국에는 '놓친 인연(MIssed Connection)'이라는 웹사이트가 있다고 한다. 좀 더 능청스럽게, 좀 더 용기를 내서, 앞뒤 재지 말고 그냥 말할걸 왜 못 했나, 가슴 치며 후회할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쩌다 놓쳐버린 인연에 대한 사연을 올릴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이 있다니, 너무도 영화 같은 일이다. 이곳에서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빨래방에서, 거리에서 우연히 스치듯 만난 그 혹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익명으로 올릴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당사자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안고서 사람들을 웹사이트에 글을 올린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한눈에 사랑에 빠진 그들과 다른 수천 명이 '놓친 인연'에 사연을 인터넷에 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메시지를 상대가 읽을 확률은 유리병 속 편지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사연을 적은 종이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렸을 때 받아볼 확률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솔길에 빵부스러기를 흘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소피 블래콜은놓친 인연사이트에서 무궁구진한 사연들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들의 사연을 읽는 게 좋았다. 그래서 사연들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블로그에 모으고, 그 사연들을 그림으로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의뢰 받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하고 싶은 작업을 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게 되면서, '놓친 인연'을 휴 그랜트 영화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페이스북만큼 중독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다정하고 친근한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희망, 그를 통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 ‘놓친 인연’에 글을 써서 올리며 갖는 희망이 실낱같을지언정,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메시지마다 15와트의 희미한 희망 전구가 달려 있다.

 

M열차에서 실크스크린을 들고 있던 여성분 보세요.

나 당신 쫓아가던 거 아니에요.

나도 그 동네에 살아요.

 

첫눈에 반하는 사랑 따위, 이제는 믿지 않는 너무도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 버렸지만, 가끔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순간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순간은 짧게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말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떠올려보면 아쉬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나의 운명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고, 거기서 어긋난 운명이 내 삶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분명, 아무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삶은 진부하고, 쓸쓸하다. 매 순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싶다면, 항상 사랑해야 한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니 말이다. 

 인생이 좀처럼 나를 믿어주지 않을 때, 현재의 별볼일 없는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세상에 존재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나를 믿어주는 가족, 친구, 연인이 있어 우리는 오늘도 꿈을 꿀 수 있다. 그러니, 아직 그런 소중한 존재를 찾지 못했다면 당신, 소피 블래콜의 이 책을 보면서 당신의 인연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길 바란다. 당신의 인연은 멀리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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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짜툰 6 - 고양이 체온을 닮은 고양이 만화 뽀짜툰 6
채유리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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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짜툰 시리즈를 처음 만났던 것이 2014년이었으니 벌써 3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시리즈는 어느 새 여섯 번째 이야기로 접어들었고, 이번 작품에서는 짜구를 저 먼 곳으로 보내줘야 하는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어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카리스마 군기 반장 뽀또, 새침하고 도도한 아가씨 짜구, 까칠하고 고독한 쪼꼬, 천방지축 막내 포비로 시작한 스토리는 시간이 흘러 낯가림이 심한 막내 봉구까지 다섯 식구가 되었었다. 뽀또와 짜구가 2003년생, 쪼꼬가 2004년생, 그리고 포비가 2009년생, 막내인 봉구가 2015년생이다. 뽀또와 짜구, 쪼꼬는 어느새 삶의 황혼기를 보내는 노년의 나이라 이제는 높은 곳보다는 조금 덜 높은 곳으로 올라가 쉬고, 가끔은 침대 위로 점프하는 것도 힘들어 하고, 종종 다리를 절기도 해서 관절약도 먹이고 있다.

널 만나서 꿈처럼 설레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 13년이 흘렀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진 유전자가 전혀 달라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대도,

나는 이 아이들과 사는 게 참 좋다. 후회하지 않는다.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나도 어릴 때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있고, 강아지는 이 십여 년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강아지나 고양이가 등장하는 작품에는 유달리 공감할 수 있는 대목들이 참 많은 편이다. 특히나 우리집 강아지 토토가 딱 뽀또와 짜구 나이라서 이번 작품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것 같다. 토토는 다행히 아직까지 활발하고, 큰 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소한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진 편이라 나이를 먹어갈 수록 걱정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짜구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며, 아픈 짜구를 위해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주고, 새 화장실도 장만하고, 사료를 잘 먹지 않아 종류 별로 시도해보고, 전용 간식도 따로 마련하는 등의 노력이 남일 같지가 않아서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 일이었으니 말이다.

강아지나 고양이, 그 외의 동물들을 키워본 이들이라면 아마 알 것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것'에는 항상 그에 따른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순히 예뻐하고, 귀여워하는 것만으로 동물을 키울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해마다 늘어나는 유기견, 유기동물들에 대한 문제 또한 어리고 작을 때 단순히 예뻐할 생각만 했지, 그들이 아프고, 늙으면 귀찮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뽀짜툰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들을 진짜 가족처럼 대하는 모습에서 종종 감동을 받곤 한다. 키우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진짜 하나의 대상으로, 가족처럼 대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짜구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다시 남겨진 고양이 네 남매와 함께하는 북적북적 일상이 이어진다. 살아있는 이들은 또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야 하니깐.

고양이와 살아온 지 14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이 녀석들을 보면 가슴이 뛴다.

물론 늘 좋기만 하는 건 아니지.

때론 짜증도 나고, 귀찮기도 하고..

빠른 이별에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희를 만난 걸 후회한 적이 없어.

운명같던 순간들. 나를 만나줘서 고마워.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

짜구가 떠나고, 이제 넷이 된 식구들은..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툭닥거린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카리스마 뽀또는 열네살이 되니 되도록 몸을 사리고, 귀찮아 하는 입장, 올해 열세살이 되는 쪼꼬는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체급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건지, 최근 몇년새 부쩍 더 돼지가 되어 버렸다. 먹신 포비는 종종 쪼꼬가 핫도그로 보이는지 씹어드시려 하고, 이쯤되면 귀찮은 녀석을 피할법도 한데, 이상하게 쪼꼬는 그런 포비의 행동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한살하고도 7개월쯤 더 먹은 봉구는 어엿한 성묘가 되었지만, 뭔가 좀 덜 자란 것처럼 여전히 체구가 작다. 이들 네 식구들의 북적거리는 유쾌한 일상은 짜구를 떠나보낸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오늘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 준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짜구를 잊지 못해 꿈 속에서 만나곤 하지만 말이다.

쪼꼬의 다이어트 대작전부터 도망치는 애들을 쫓아다니며 양치시키기, 새로운 터널을 두개나 구입해서 벌이는 놀이, 그리고 진을 다 빼놓는 목욕 전쟁까지... 배꼽 빼놓는 유쾌한 에피소드들이 가득 이어진다. 강아지도 그렇지만, 고양이들 역시 나이를 먹어도 아이같은 면을 많이 가지고 있어 함께 놀다 보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만들기도 하는데, 제3자가 보기엔 다소 유치해보이는 그 행동들도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나를 순수한 시절로 되돌려놓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겪어온 사람 입장에서 보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공감 백퍼센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뽀짜툰 시리즈는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공감할 부분이 참 많은 따뜻한 작품이다. 나도 강아지를 이 십여 년 키우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주변에 워낙 동물을 아끼는 이들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일러스트레이터 채유리가 가 아기 길 고양이 뽀또와 짜구를 처음 만나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는 과정부터 함께했던 이야기가 식구가 점점 늘어가고, 어느 덧 식구 중 하나가 떠나가는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곁눈질로 대충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오랜 기간 고양이와 함께 애정으로 살아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소소한 디테일들이 마음이 짠해지게도 하고, 빙그레 미소 짓게도 만들어주었다.

단순히 고양이가 애완동물이라는 소유물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걸 매 페이지마다 보여주는, 그야말로 애정 가득한 이 작품이 그래서 난 참 좋다. 스토리 자체는 가볍게 보일 수도 있는 만화이지만 채유리 작가의 이 웹툰에도 그런 애정의 깊이와 따스한 온기가 담겨져 있어 보고 또 봐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짜구야.

나도 너로 인해 참 행복했단다. 

더 좋은 곳에서 마음껏 뛰어 놀고, 더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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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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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지금도 두려움과 멸시가 뒤섞인 까끌 까끌한 감정이 있다. 그래도 갈색 손을 잡았을 때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징그럽다든지 불쾌한 느낌은 없었다. 용기를 내서 다가가면 의외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평범하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악의는 없었다'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굴절된 감정과 공포심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다. 극복하느냐 아니냐는 너 자신이 결정해야 해.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여기는 전쟁터니까?"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작품들을 나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전쟁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게다가 전쟁터의 조리병이 주인공인 이야기라니, 분위기가 어떨지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작품의 배경은 1944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을 무대로 현대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럽 전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의 작가가 젊은 일본 여성 작가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주인공 팀은 인생을 사는 낙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먹는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음식을 사랑한다. 먹는 것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레시피 공책을 즐겨 읽어 왔고, 그 낡은 공책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열일곱 살 생일을 앞두고 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곳곳에 지원병을 모집하는 고지가 나붙는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속을 달려가고,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나 적을 쳐부수어 영웅으로 떠받을 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팀도 전쟁에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자신은 군인이 적성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사격도 잘하지 못했고 달리기도 평균보다 느려서, 덩치만 큰 어린애라고 '키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조리병을 증원한다는 공고를 보고, 조리병이 되기로 한다. 조리병의 역할이란 대원에게 전투식량을 나눠주고, 재료와 시간과 장소에 여유가 있을 때 요리를 하고, 식중독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전투가 벌어지면 총을 들고 일반 병사들과 함께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팀을 비롯한 동료들은 입대한 뒤 2년에 이르는 훈련을 거쳐, 1944년 초여름, 첫 출정을 나가게 된다.

 

“어이, 뭐가 그렇게 시끄럽냐?” 간수가 또 문을 두들겼다.

“그냥 레시피를 외우는 것뿐인데. 난 조리병이니까.”

........나는 계속해서 레시피를 읊조렸다. 보리 수프를 끓이고 진짜 계란을 풀고 P-38로 콩과 참치 통조림을 딴다. 치즈를 뿌려 노릇노릇하게 굽고 삶은 새우에 타바스코와 갈릭 오일을 뿌렸다. 야전 취사 차량의 연기 냄새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뜨거운 오븐과 떠들썩한 말소리, 스푼으로 접시를 두들겨 밥 달라고 재촉하는 식욕 왕성한 병사들. 배고팠던 나날을 달래주는 따뜻한 수프.

이야기는 전체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전쟁터라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우 소소한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굉장히 현실감이 없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전쟁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잠자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일상을 공유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비일상인 곳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인 채 낙하한 공수병,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유도병, 구호소에서 그저 죽음을 기다리던 부상병. 어쩌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란, 그저 우연히 제비뽑기에서 당첨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매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상 미스터리는 어떤 모습일까.

뭐든 낙하산과 바꿔 낙하산을 모으는 병사, 갑자기 사라져 버린 600상자 분량의 분말 달걀, 네덜란드 민가에서 아이들을 남기고 자살한 부부, 설원을 떠도는 유령 병사... 등등 소소한 수수께끼들이 벌어지고, 팀을 비롯한 조리병들이 그것들을 퀴즈처럼 풀면서 그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보다 그것을 풀어내어 답을 찾는 과정이 너무 쉽고, 간단해서 다소 맥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일상 미스터리가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전해주는 긴장감이 더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스터리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리병의 일상이라던가, 조리병으로서 맞이하게 되는 전쟁터의 모습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오븐의 온도를 판단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오븐 속으로 손을 쑥 넣어 뜨거워지는 정도로 오븐 온도를 파악해 요리를 한다거나, 분말 달걀 등 건조 식품으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라던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할머니의 레시피를 줄줄 외운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그 어떤 작품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신선한 내용들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전쟁에 참전해보지 못한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이야기라서, 자료 조사나 상상력으로 빚어낸 배경일 테니 어느 정도 잘못된 부분이나 사실과 달라진 내용 상의 허점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직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묘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그것들을 감싸주며 독특한 일상 미스터리를 완성하지 않았나 싶다. 후카미도리 노와키는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생긴정의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는데, 이는 아마도 현 일본 정부에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고군분투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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