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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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지금도 두려움과 멸시가 뒤섞인 까끌 까끌한 감정이 있다. 그래도 갈색 손을 잡았을 때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징그럽다든지 불쾌한 느낌은 없었다. 용기를 내서 다가가면 의외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평범하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악의는 없었다'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굴절된 감정과 공포심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다. 극복하느냐 아니냐는 너 자신이 결정해야 해.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여기는 전쟁터니까?"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작품들을 나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전쟁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게다가 전쟁터의 조리병이 주인공인 이야기라니, 분위기가 어떨지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작품의 배경은 1944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을 무대로 현대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럽 전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의 작가가 젊은 일본 여성 작가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주인공 팀은 인생을 사는 낙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먹는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음식을 사랑한다. 먹는 것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레시피 공책을 즐겨 읽어 왔고, 그 낡은 공책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열일곱 살 생일을 앞두고 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곳곳에 지원병을 모집하는 고지가 나붙는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속을 달려가고,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나 적을 쳐부수어 영웅으로 떠받을 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팀도 전쟁에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자신은 군인이 적성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사격도 잘하지 못했고 달리기도 평균보다 느려서, 덩치만 큰 어린애라고 '키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조리병을 증원한다는 공고를 보고, 조리병이 되기로 한다. 조리병의 역할이란 대원에게 전투식량을 나눠주고, 재료와 시간과 장소에 여유가 있을 때 요리를 하고, 식중독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전투가 벌어지면 총을 들고 일반 병사들과 함께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팀을 비롯한 동료들은 입대한 뒤 2년에 이르는 훈련을 거쳐, 1944년 초여름, 첫 출정을 나가게 된다.

 

“어이, 뭐가 그렇게 시끄럽냐?” 간수가 또 문을 두들겼다.

“그냥 레시피를 외우는 것뿐인데. 난 조리병이니까.”

........나는 계속해서 레시피를 읊조렸다. 보리 수프를 끓이고 진짜 계란을 풀고 P-38로 콩과 참치 통조림을 딴다. 치즈를 뿌려 노릇노릇하게 굽고 삶은 새우에 타바스코와 갈릭 오일을 뿌렸다. 야전 취사 차량의 연기 냄새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뜨거운 오븐과 떠들썩한 말소리, 스푼으로 접시를 두들겨 밥 달라고 재촉하는 식욕 왕성한 병사들. 배고팠던 나날을 달래주는 따뜻한 수프.

이야기는 전체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전쟁터라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우 소소한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굉장히 현실감이 없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전쟁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잠자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일상을 공유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비일상인 곳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인 채 낙하한 공수병,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유도병, 구호소에서 그저 죽음을 기다리던 부상병. 어쩌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란, 그저 우연히 제비뽑기에서 당첨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매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상 미스터리는 어떤 모습일까.

뭐든 낙하산과 바꿔 낙하산을 모으는 병사, 갑자기 사라져 버린 600상자 분량의 분말 달걀, 네덜란드 민가에서 아이들을 남기고 자살한 부부, 설원을 떠도는 유령 병사... 등등 소소한 수수께끼들이 벌어지고, 팀을 비롯한 조리병들이 그것들을 퀴즈처럼 풀면서 그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보다 그것을 풀어내어 답을 찾는 과정이 너무 쉽고, 간단해서 다소 맥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일상 미스터리가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전해주는 긴장감이 더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스터리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리병의 일상이라던가, 조리병으로서 맞이하게 되는 전쟁터의 모습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오븐의 온도를 판단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오븐 속으로 손을 쑥 넣어 뜨거워지는 정도로 오븐 온도를 파악해 요리를 한다거나, 분말 달걀 등 건조 식품으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라던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할머니의 레시피를 줄줄 외운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그 어떤 작품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신선한 내용들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전쟁에 참전해보지 못한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이야기라서, 자료 조사나 상상력으로 빚어낸 배경일 테니 어느 정도 잘못된 부분이나 사실과 달라진 내용 상의 허점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직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묘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그것들을 감싸주며 독특한 일상 미스터리를 완성하지 않았나 싶다. 후카미도리 노와키는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생긴정의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는데, 이는 아마도 현 일본 정부에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고군분투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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