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수 의복 경연 대회
무모한 스튜디오 지음, 김동환 그림, 김진희 글 / 하빌리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통구이 안에 들어간 나이프 끝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말이야. 재단사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옷' 그 자체가 아니라네. 피부와 맞닿아 있는 이 '옷'으로 어떻게 착장자, 나아가 군중들의 마음을 어찌 움직일 수 있느냐지. 나는 이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시종일관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나와 함께 나아갈 사람들은 그런 거대한 것을 움직일 사람들이고...... 토퍼스 팀 자네들이 고수하는 고리타분한 양복 신념은 아주 오래전, 내 스스로 길바닥에 던져 놓았네. 그러니 이제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가?" p.70
19세기 런던, 인간과 수인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다. 수인은 동물들의 팔다리가 인간의 형상을 띠게 되면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옷을 입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금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간의 후손들은 수인들보다 그 수가 적었지만, 기계를 발명하고,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그 번영의 이면에서 수인들의 질투와 불만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마침 세상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로 가득해 도시 전체가 마치 깊은 겨울잠에 빠진 듯 혹독한 계절이었다. 추위에 지친 수인들을 위해 '의복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도시의 유일한 인간 재단사인 W에게도 초대장이 도착한다.

런던 최초의 대규모 의복 경연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데, 우승한 팀에게는 상금 4000파운드와 여왕의 훈장이 수여된다고 한다. 게다가 런던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화려한 상류층과 누더기를 걸친 빈민들이 공존하는 도시였고, '금수 의복 경연 대회'는 단순한 패션 행사가 아니라 도시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갈등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어줄 터였다.
그렇게 4개의 팀이 참가해 4개의 라운드를 치루게 된다. 각각의 팀은 재단사, 햇메이커, 슈메이커 3인으로 구성되는데, 참가한 네 개의 팀 중 인간이 포함된 것은 토퍼스 팀뿐이었다. 1라운드의 주제는 운동복, 스포츠웨어로 체형에 관계없이 착장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2라운드의 주제는 아동복으로 아동 모자 시장의 개척자로 자리 잡은 크리스 부부의 여덟 쌍둥이를 위한 아동복을 만들어야 했다. 3라운드는 빈티지 파티를 위한 옷으로 가장 아름다운 옷이 필요했고, 4라운드 마지막 주제는 '근본으로'였는데, 가장 근본의 옷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쇼가 화려해질수록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인간이 만든 옷을 거부하며 경연을 방해하는 존재도 나타나는데, 과연 인간 재단사인 W는 무사히 의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붉은 커튼이 거침없이 걷혔다. 고요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때아닌 소음에 관객들의 시선이 테라스로 일제히 쏠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윈슬로우는 지팡이와 함께 오른쪽 다리를 내디뎠다. 하이힐 때문에 그의 실루엣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았다.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 그는 먼저 측면의 모습을 관객에게 보였다.
"하이힐이다!"
관객들이 술렁였다. 얇고 높은 굽 위의 윈슬로우의 모습은 마치 절벽 끝의 무용수와도 같았다. 그는 그 끝에서 홀로 고상했다. p.283
19세기말 런던에 있는 양복점에 동물들이 양복을 맞추러 온다는 컨셉으로 기획된 '금수를 위한 의복 가이드'는 독립출판으로 먼저 나왔던 작품이다. 텀블벅 화제의 도서였던 '금수를 위한 의복 가이드'가 소설화된 것이 바로 이 작품 <금수 의복 경연 대회>이다. 일러스트 가이드북으로 출간되었던 것이 스토리가 확장되면서 장편 소설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텀블벅 펀딩 당시 이 세계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이 있었고, 결국 이렇게 특별한 소설이 만들어 졌다. 19세기 런던이라는 클래식한 배경과 그에 어울리는 고전풍 일러스트들이 가득 수록되어 있고, 아름다운 양장본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서 소장용으로도 너무 훌륭한 책이다.

여러 동물들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직업을 가지고, 말도 할 수 있는 세상은 어떨까. 그리고 체형도, 종도, 취향도 제각기 다른 수인들의 옷을 맞춰주는 특별한 양장점을 운영하는 인간 재단사가 있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해 탄생한 이야기이다. 코뿔소, 기린, 오류너구리, 여우, 토끼, 고양이, 곰, 치타, 조류 등의 수인이 제각기 자신에게 맞는 의상을 잘 차려입은 일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재미있었던 소설이었다. 19세기 유럽 복식사에 기반한 정교한 의상 디테일과 감각적인 일러스트들을 통해 읽는 소설을 넘어 보는 소설이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의복 경연 대회라는 설정 또한 이야기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다음 라운드를 기대하게 만들어 주는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옷을 통해 타인을 존중하고, 몸을 이해하는 과정과 인간과 수인, 종이 다르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수인과 인간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자,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소설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