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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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도 아닌데 살금살금 걸을 필요는 없지만 천정 부근에 시어머니 혼령이 떠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부재일 때 내가 사는 곳을 남들이 보는 건 누구라도 싫기 마련이다. 차를 같이 마시는 친한 친구가 와도 기껏해야 방안을 대충 둘러보는 정도일 테다. 그런데 원래는 남이던 며느리인 내가 서랍 속과 옷장과 벽장 안까지 전부 보려 한다. 하물며 멋대로 필요 불필요의 판단을 내리고, 쓸 만한 물건은 가져가고 필요 없이 여기는 물건은 가차없이 버리려 한다.          p.9~10

 

<70세 사망법안, 가결>, <후회병동>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가키야 미우의 신작이다. 두 작품 모두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실재하는 현실을 보여주며 노후에 대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은 홀로 살던 시어머니가 돌연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며느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도와줄 사람은 없고, 업체를 부르자니 비용이 만만치가 않고, 하루라도 빨리 정리해서 방을 빼지 않으면 비싼 월세를 계속 내야 했다. 하지만 집안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방대한 양의 물건에 아연실색하고, 그 와중에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서 이상한 일들이 이어진다. 전원을 켜지 않은 코다츠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고, 열어 두고 간 문이 꽉 닫혀 있고, 시든 야채와 물건들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어딘가 수상한 사람이라도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며느리 모토코는 홀로 유품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다. 누군가 만능키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전문털이범이라도 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기묘한 일이 계속 생겼지만 어차피 훔쳐가도 곤란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기분이 꺼림칙하고 혼란스러운 그대로 모토코는 물건들과 가구들을 정리해나간다. 시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은 점점 커졌고, 왜 쓰지도 않은 물건을 계속 사들이고, 쌓아 두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일이 의외로 많아."
후유미가 돼지고기와 베이컨을 넣자 치직하는 소리가 났다.
"부모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죄 많은 존재이기도 해"라고 모토코가 말했다.
"맞아.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어. 정말로 성가신 존재야."
후유미는 그렇게 말하지만 어머니를 용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상반된 마음을 청산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괴로워할지 모른다.              p.171

 

시어머니 집에는 남편의 초등학교 교과서, 시아버지의 40년 치 월급명세서 다발, 50권이 넘는 앨범과 유통기한 6년이 넘은 샐러드유, 잔뜩 쌓여 있는 신문과 잡지와 골판지 등, 뜯지도 않은 통신판매로 구매한 물건들, 식기장에 빼곡히 들어 있는 그릇들... 어디서부터 손대면 좋을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물건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접이식 밥상, 석유난로, 에어컨, 청소기, 장식장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 부피가 큰 전자제품 집기들도 집안을 점령하고 있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 시어머니 혼자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집을 정리하는 내내 모토코는 화가 나서 있지도 않은 시어머니에게 원망을 해대고, 반지 하나만 남긴 채 유품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세상을 떠난 친어머니와 비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친어머니가 남긴 두 개의 일기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 '두 어머니'의 삶과 마주한다.

 

인간이 평범한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작품이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고, 물건들은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짐이 될 수밖 없을 것이다. 극중 며느리는 유품을 정리하며 생전에는 알지 못했던 시어머니의 모습들을 알아 가며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긍정적인 결말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가급적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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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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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던 것의 가치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 그 하루하루에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p.39~40

 

'기내식 먹는 기분'이라니, 제목부터 설레이는 책이다. 물론 땅 위의 어느 음식과 비교해도 결코 기내식을 맛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매번 기내식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여행이 주는 특유의 비현실적이고도, 감상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2019년 가을 이후로 3년 째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어, 기내식을 먹어 본지도 벌써 까마득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이제 해외 여행을 가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선뜻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이 책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 말하는 정은 작가의 글은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여행에 대한 그리움으로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한 동안 잊어 버리고 살았던 감각이 되살아 나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 삶에 필요한 활력소를 얻고,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지혜를 얻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선물까지 받는다. 거기에 하나 더,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먹는 것이야말로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현지의 생활을 느끼고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기내식을 먹으면서 시작되는 여행의 설레임은 현지에 도착해서 즐기는 그곳의 이국적인 음식들로 차곡차곡 기억을 쌓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그 나라, 그 지방, 그 민족의 맛있는 음식들 속에는 기후가, 지형이, 역사가, 그리고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현지의 음식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의 추억은 보통 현지에서 인상적이었던 음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타국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은 대체로 기억할 수 있다. 두 번째 태어난 것처럼 기억할 수 있다. 온몸으로 들이닥쳤던 낯선 냄새들, 소리들. 익숙한 문화적 코드가 작동하지 않는 낯선 얼굴들. 그토록 낯선 감각 속으로 던져지는 경험은 태어난 이래로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 순간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그때의 나를 부러워한다. 내가 언제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아직 해외여행을 안 간 사람이다.           p.106

 

작가는 십 년 동안 매년 한 달 이상을 세계 여러 도시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 왔다. 아르바이트로 돈이 적당히 모이면 한국을 떠났고, 생활비가 싼 외국의 도시에서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머무르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최저 시급 생활자가 되어 돈을 모으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 절박함과 치열함이 페이지 마다 묻어 있어, 여타의 가벼운 여행 에세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작가의 여정은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 시작된다. '순례자의 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지인의 말에 혹해서 떠난 여정은 15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800킬로미터를 걷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프랑스의 생 장 피에 드 포르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피레나산맥 중간에 있는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가 최종 목적지인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으로 향한다.

 

생존을 위해 가방의 무게를 줄이느라 가지고 있는 짐들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한 입 먹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영혼의 스프, 개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선한 눈빛의 에리히라는 남자와의 특별한 추억 등 살아생전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과 음식과 장소에 얽힌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인도와 미국 여행기도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중간 중간 작가가 직접 찍은 감각적인 현지의 사진들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었다. 시간 위로 쌓이는 소리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기억되는 인도, 갈 곳이 마트밖에 없어 너무 심심했던 도시 피츠버그에서 발견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여행기가 여행에 대한 본질을 사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정확한 내가 되도록 한다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여행에 목마른 당신에게, 긴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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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 휘청거리는 삶을 견디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법
캐서린 메이 지음, 이유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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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이제껏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아니, 이미 깨닫고 또 깨닫기를 반복했었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맞서고 고통받고 또 애도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새로웠다. 그 순간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절실히 느꼈다. 한 아이의 엄마인 내게 세상은 결코 오롯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함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p.36

 

캐서린 메이의 전작인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책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코앞에 둔 어느 날, 갑작스런 남편의 맹장염, 건강 문제로 인한 실직, 아들의 등교 거부 등 연거푸 닥쳐온 시련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이 ‘인생의 겨울’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직감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을 견뎌내는 것을 담담히 기록한 책이었다. '윈터링(wintering)'에 대한 지적이고도 서정적인 사색의 풍경들이 페이지마다 밑줄 긋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책이었다.

 

이번에 만난 그녀의 신작은 서른 아홉에 아스퍼거 증후군을 진단받고, 주말마다 험준하고 가파른 해안길을 수백 킬로미터 걷기 시작하며 자신의 상처와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우연히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경험을 통해 두려움보다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삶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영국의 가파르고 험준한 트래킹 코스를 걷기로 다짐하게 된 것이다. 녹초가 될 때까지 가파른 해안길을 오르며 그 동안의 삶을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과정은 놀랍도록 감동적이었다. 한 번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살아 왔는데,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낯선 진단으로 인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폐인에게서 경험하는 사소한 불편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경험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설명은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 전에는 한 번도 단언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단언한다. 나는 자신을 넘겨버리는 습관을 버리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자주 압도당하는 느낌을 느끼는지, 평범한 사건들로 인해 얼마나 극단까지 몰리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이해한다. 사실, 공감한다. 누구나 그게 어떤 기분인지 어느 정도는 안다.          p.296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나서야 자신에게 자폐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애초에 성인이 되어서야 자폐증 진단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경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에 없던 증상이 성인이 되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성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단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내향적인 성향과 힘든 상황에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 버린다거나, 엄마가 되어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도망가고만 싶어 하는 마음들이 모두 그저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라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그 동안 살아온 전 생애를 부정하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메이는 피하지 않고,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속 울음을 들여다보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주말마다 험준한 해안길을 걸으며 깨닫는다. 여태껏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삶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고 애쓰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을 위해 억지로 스스로를 감추고, 속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잘 하면서, 스스로를 다정하게 돌보는 것은 서툰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느라 '나'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으려는, 불행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모습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23년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그려보았다. 조금 더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타인을 위하는 것만큼 내 마음도 돌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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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빛나게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황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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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행성은 저마다 중력이 있고, 그 중력의 힘을 이용해 우주선은 이리저리 휩쓸리며 경로를 바꾸면서 여행한다. 그런 우주선의 모습이 우리 삶과 닮았다고 느꼈다. 인간에게도 중력 혹은 운명처럼 절대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은 이런 거스를 수 없는 것들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어서 힘차게 살아갈 때도 있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에 닿게 되겠지. 그곳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힘을 거스르지 못해 음악을 만들고, 그 힘을 동력 삼아 음악을 만들며 살아간다.          p.14

 

온앤오프의 음악을 프로듀싱했고, 동방신기, 소녀시대, 샤이니, 레드벨벳, 세븐틴 등 수많은 아티스트의 곡을 작업한 작곡가 황현의 에세이이다. '한국의 베토벤', '황버지'라는 수식어로 오랜 시간 케이팝 한가운데에서 활동했던 이가 음악이 아닌 글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뭘까 궁금해졌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표지를 한 겹 넘기면 파스텔 톤의 석양이 지는 바다가 나타난다. 누구나 삶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한 번쯤은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후회의 파도를 넘나 들면서 살고 있지만, 가끔은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삶이라고, 우리를 빛나게 할 일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 화려하게만 보이는 삶이지만,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들이었다. 노래 가사처럼 감각적인 문장도 있었고, 인간적이고 진솔한 문장들도 있었다. 그가 만든 음악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처럼 가요를 잘 듣지 않더라도, 음악 얘기만 하는 책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울고 싶기도 하는 모습들 모두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상황들이니 말이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다양한 감정들을 복기하며 곡을 써냈고, 그렇게 탄생한 음악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빛나게 해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내 삶을 말하자면, 늘 재미있지는 않다. 오히려 고민과 고통이 반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데드라인은 언제나 정해져 있고,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곡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에 자주 압박감을 느낀다. 자꾸 도망치고 싶을 때는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만하자 해놓고 나는 또 작업실에서 나를 태우고 있다. 일단 내 몸을 망치더라도 작품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내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p.271~272

 

누구나 타인의 단편적인 일상을 보며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 착각하며 살아 간다. SNS만 보더라도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한 사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인을 부러워할 필요도, 괜한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만의 기준을 지키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스스로를 나 자신은 알아줘야 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뭐 별건가.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적어도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황현의 섬세한 글을 읽으면서 조용한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인터미션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특히 와 닿았다. 가끔 너무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랙'걸린 게임 캐릭터처럼 버벅이다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럴 때, 억지로라도 바깥에 나가서 쉬는 시간을 갖으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바쁜 하루라는 연주회의 인터미션 타임이 되면 근처 카페에 가서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고. 생각을 덜어내고, 일부러 사방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조금 쉬는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쉬는 것을 불안해하지 말고, 그냥 쉴 것. 그 짧은 휴식이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가끔은 잘 살 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면, 위로가 필요한 순간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멜로디의 탄생 배경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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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2 -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 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2
오차(이영아) 그림, 조영선 글, 샌드박스 네트워크 외 감수, 악동 김블루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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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힘과 운동, 빛과 파동, 우주' 편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는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 편이다.

 

구독자 170만 명을 보유한 '악동 김블루' 채널의 인기 크리에이터 김블루는 재치 넘치는 입담, 욕설 없는 청정 방송으로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덕분에 아이들이 읽고 또 읽는 과학 학습 만화 시리즈로 쉽고 재미있게 기초 과학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이 시리즈는 김블루와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과 소동이 만화 형식으로 그려져,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초 과학 이론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파란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김블루는 언뜻 까칠하고 불친절해 보이지만, 풍부한 과학 능력으로 친구들을 살뜰히 챙긴다.

 

김블루의 친구들은 착하고 순진한 청소 솔, 잘난 척 대마왕 뚫어 뻥, 매사에 시큰둥한 빗자루, 겁 많은 때밀이 타올, 조용한 명상가 두루마리 휴지, 명랑한 수다쟁이 수세미까지 각종 생활용품들로부터 탄생해 개성 넘치는 모습과 더불어 친근하고, 귀엽다.

 

 

전편에서 김블루와 친구들, 그리고 지구를 정복할 기회를 노리는 외계인 지지는 우주선이 폭발하기 직전에 탈출 캡슐에 몸을 실었다. 탈출 캡슐은 무사히 착륙에 성공했고, 그들은 어떤 장소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낯선 풍경들이었고, 그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야기가 끝이 났었다.

 

지구에서 못 보던 식물들이 가득한 외계 행성에 오게 된 김블루와 친구들의 모험에서 시작하는 2권은 그들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스토리로 이어진다. 게다가 김블루의 매력에 빠진 외계인 지지는 지구 정복의 꿈도 잊은 채 무인도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무인도는 김블루의 왕국이 되어 간다. 과연 김블루와 친구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은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고약한 입 냄새의 정체를 찾아라, 우리 몸에서 뼈가 사라진다면? 높은 산에서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까?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비행기를 이륙시켜라 등등 어린이들이 궁금해할 법한 일상적인 호기심을 기초 과학 이론과 엮어 흥미롭게 설명해주고 있다. 각 장 끝의 ‘왕친절한 과학 수업’ 코너에서는 풍부한 그림 자료를 곁들여 앞서 배운 개념을 다시 한번 다질 수 있도록 했다.

 

광합성, 소화 효소, 뼈의 구조와 기능, 밀도, 기압과 끓는점, 물의 상태 변화, 전도, 에너지의 형태, 에너지 보존 법칙 등 이 책에서 다룬 18가지 과학 이론은 초등 교과 과정뿐 아니라 중학 교과 과정까지 아우르고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교과 연계표를 통해 각각의 단원과 학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기존에 나왔던 대부분의 과학 학습 만화는 초등 교과 과정의 과학 지식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에 비해 이 시리즈는 초등 학습 만화로는 유일하게 난이도 높은 중학 교과 과정의 과학까지 맛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더욱 알짜배기 학습 만화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수업보다 더 재미있는 기초 과학 이야기! 지금 바로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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