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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평점 :
그때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던 것의 가치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 그 하루하루에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p.39~40
'기내식 먹는 기분'이라니, 제목부터 설레이는 책이다. 물론 땅 위의 어느 음식과 비교해도 결코 기내식을 맛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매번 기내식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여행이 주는 특유의 비현실적이고도, 감상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2019년 가을 이후로 3년 째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어, 기내식을 먹어 본지도 벌써 까마득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이제 해외 여행을 가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선뜻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이 책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 말하는 정은 작가의 글은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여행에 대한 그리움으로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한 동안 잊어 버리고 살았던 감각이 되살아 나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 삶에 필요한 활력소를 얻고,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지혜를 얻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선물까지 받는다. 거기에 하나 더,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먹는 것이야말로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현지의 생활을 느끼고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기내식을 먹으면서 시작되는 여행의 설레임은 현지에 도착해서 즐기는 그곳의 이국적인 음식들로 차곡차곡 기억을 쌓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그 나라, 그 지방, 그 민족의 맛있는 음식들 속에는 기후가, 지형이, 역사가, 그리고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현지의 음식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의 추억은 보통 현지에서 인상적이었던 음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타국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은 대체로 기억할 수 있다. 두 번째 태어난 것처럼 기억할 수 있다. 온몸으로 들이닥쳤던 낯선 냄새들, 소리들. 익숙한 문화적 코드가 작동하지 않는 낯선 얼굴들. 그토록 낯선 감각 속으로 던져지는 경험은 태어난 이래로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 순간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그때의 나를 부러워한다. 내가 언제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아직 해외여행을 안 간 사람이다. p.106
작가는 십 년 동안 매년 한 달 이상을 세계 여러 도시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 왔다. 아르바이트로 돈이 적당히 모이면 한국을 떠났고, 생활비가 싼 외국의 도시에서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머무르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최저 시급 생활자가 되어 돈을 모으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 절박함과 치열함이 페이지 마다 묻어 있어, 여타의 가벼운 여행 에세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작가의 여정은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 시작된다. '순례자의 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지인의 말에 혹해서 떠난 여정은 15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800킬로미터를 걷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프랑스의 생 장 피에 드 포르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피레나산맥 중간에 있는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가 최종 목적지인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으로 향한다.
생존을 위해 가방의 무게를 줄이느라 가지고 있는 짐들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한 입 먹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영혼의 스프, 개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선한 눈빛의 에리히라는 남자와의 특별한 추억 등 살아생전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과 음식과 장소에 얽힌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인도와 미국 여행기도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중간 중간 작가가 직접 찍은 감각적인 현지의 사진들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었다. 시간 위로 쌓이는 소리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기억되는 인도, 갈 곳이 마트밖에 없어 너무 심심했던 도시 피츠버그에서 발견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여행기가 여행에 대한 본질을 사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정확한 내가 되도록 한다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여행에 목마른 당신에게, 긴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