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91 | 29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리엄 벨맨이 열 살하고도 나흘이 되었을 때 떼까마귀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위험한 곳에서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나무를 볼 수 있다. 그렇다. 바로 지금, 당신의 시간에서. 그러나 그 가지에서 떼까마귀는 한 마리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떼까마귀들은 생각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p.167

대저택의 페허에 숨겨진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고딕 미스터리 <열세 번째 이야기> 이후 다이앤 세터필드는 장장 7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끝에 두 번째 소설을 발표한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최초의 장례용품 전문점이 문을 연다. <벨맨 앤드 블랙>은 죽음을 전시하고 애도를 파는 가게를 중심에 두고 미스터리를 품은 빅토리아 스타일의 유령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19세기 영국 휘팅포드의 작은 마을, 주인공 윌리엄 벨맨이 열 살이 되고 나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강과 숲 사이의 들판에 있었고, 그곳은 떼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먹이를 찾아 땅을 쪼아대는 들판이었다. 윌리엄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자주 있을 법한 허세로 아주 멀리 있는 나뭇가지의 새를 맞출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정권을 한참 벗어나 들판 중간쯤에 있던 그 새를 맞추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소년들은 그의 허세를 터무니없다고 비웃었다. 윌리엄 자신 조차 말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높고 멀리 날아간 돌멩이가 자신의 여정을 마쳤고, 아직 부리가 검은 어린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며 죽었던 것이다. 열 살배기 영웅이 으레 그러듯 윌리엄은 미소 지었고, 우쭐해 했지만, 멀미가 났고 창피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 동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벨맨&블랙요. 장례용품을 파는 엠포리엄."

"블랙 씨 되시나요""

벨맨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 벨맨입니다."

"그렇다면, 벨맨 씨, 장례용품이라면 제대로 만드셔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니까요. 그게 곧 미래죠, 안 그런가요? 나의 미래. 당신의 미래. 모두의 미래."    p.233~234

이야기는 벨맨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가 결혼을 해 가족을 꾸리고, 방직 공장에 이어 장례용품 전문점을 새롭게 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죽음을 전시하고 애도를 파는 가게'라는 설정이 너무도 고딕 미스터리와 잘 어울려서 시작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이 나오는 것은 두툼한 페이지의 중반 이후 2부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윌리엄 벨맨은 영리하고 잘생겼으며, 교회 성가대의 스타였고, 아가씨들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소년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백부는 그를 믿고 벨맨 방직공장에 고용해주었고, 노련한 사업가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는 방직 공장이 전에 없던 성장을 거듭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본격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런던으로 무대를 옮긴 2부에서부터이다. 가족들이 하나 둘 열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벨맨이 어린 떼까마귀를 본의 아니게 죽였던 그 순간부터 얼핏 등장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가족들의 장례식 장에서도 끊임없이 벨맨의 눈에 띈다. 아마도 죽음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존재는 벨맨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로, 그는 검정색 차림의 남자를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급기야 그가 영국 최초의 죽음에 대한 물건을 파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도 블랙이라는 남자와의 동업으로 진행된다. 생각보다 도처에 널려 있는 죽음들이 벨맨의 삶을 끊임없이 침투한다. 죽음은 그를 슬픔에 잠기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시종일관 그의 삶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죽음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애도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잡한 계산에 심취한다. 애도의 단위는 무엇인가? 슬픔을 어떻게 세고, 무게 달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그렇게 암울한 계속을 하며 마음속 주판알을 튀겼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과 거래를 하기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는 죽은 자를 석조 제단에 올려놓고 떼까마귀들이 뼈를 바르도록 방치했지요.  그거 아셨어요? 아주 오래전. 우리의 십자가들과 첨탑들과 성경책들이 생겨나기 이전.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모두 누군가를 잃는다. 또 누군가는 모두를 잃는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울고 애도한다. 당연히 죽음은 유행을 타지 않으니, 벨맨이 구상한 사업에 대한 수익은 장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한 자나 약한 자,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들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점이 벨맨 앤드 블랙의 사업을 번창하게 만든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이야기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망자를 ‘저세상’으로 인도하고 돌아오는 존재인 떼까마귀에 대한 묘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둡고 음습하고 불안한 기색이 만면에 깔려 있는 이야기지만, 다이앤 세터필드의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답다. 전작인 <열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비다 윈터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마치 가족과도 같아서, 우리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을 잃었다고 해도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니까. 그들에게서 멀어지거나 등을 돌려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정보에 관한 법안이죠. 경찰수사에 이용 가능한 정보에 DNA정보를 추가합니다. 그 법안이 통과되면 모든 수형자의 DNA 정보를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경찰청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 방지를 위해 DNA 정보를 등록하라고 홍보할 수도 있죠."

"그런 법안이 통과될까?"   p.36

 

오래 전에 <플래티나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작품이 세련된 표지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완전히 달라져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와의 면밀한 상의 끝에 한국어판 제목을 새로 붙였다고 하는데, 원제와는 다르지만 작품의 주요 키워드라서 크게 의미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국내 출간작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플래티나 데이터> 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표지 때문에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덕에 뒤늦게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역시나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면모가 돋보이는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시부야 외곽에 있는 러브호텔에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여성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은 남아 있지 않았고, 지문도 찾지 못해 유일한 증거는 체모 몇 가닥 뿐이었다. 아사마는 과장의 지시에 따라 경찰청 특수분석연구소로 향한다.  그곳에서 소장 시가와 연구원 가구라는 체모만으로 DNA 프로파일링을 해서 범인에 대한 정보를 예측한다. 기존에 DNA 감정이라는 것이 용의자 이름이 추려진 상태에서 기존 데이터에 구축된 DNA와 비교를 통해서야 정보를 얻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용의자는커녕 단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서 수집한 DNA 정보만으로 범인을 예측하다니 말이다. 이는 정부가 국민의 DNA 정보를 수집해 관리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DNA 수사 시스템덕분이었다. 물론 DNA 정보 등록이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대다수 국민들이 정보 제공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다, 하루에 1만 건이 모인다 해도 전 국민의 정보를 모으려면 수십 년이 걸리니 이것이 완벽한 범죄 예방 시스템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긴 했다. 그럼에도 디지털 데이터를 통한 범인 검거율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그럴 리 없어. 솔직히 말해줘. 정보가 필요해."

거울 속의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정보, 정보. 네 머릿속에는 그거뿐인가. 나이를 먹어 귀가 안 들리면 오히려 장수한다는 말도 있지. 정보를 얻는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모르고, 안 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더 행복할 수도 있어."    p.190

전 국민의 DNA 정보를 채집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면,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작은 증거만으로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 자체부터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극미량의 증거만 남겨도 체포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범죄자의 싹을 잘라 종국에는범죄 없는 세상이 실현되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테니, 정부의 계획은 그야말로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DNA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 전원에게 혐의를 둘 수밖에 없고, 덕분에 가해자 친족이 부각된다는 단점도 생긴다. 가해자만이 아니라 혈연관계인 사람에 대한 차별까지 유발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보도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게다가 DNA 법안 통과를 비웃듯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게 ‘NOT FOUND일치하는 정보 없음으로 처리되는 사건이 거듭되던 어느 날, 시스템 개발자가 갑작스럽게 살해당하고, 연구원 가구라가 범인이라는 시스템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가구라는 살인범 누명을 쓰고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도망치고,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아사마의 추적이 이어진다.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엔지니어로 일했던 이력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는 유독 과학과 공학적 요소를 미스터리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품 역시 작가의 그러한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특히나 과학과 기술이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 벌어질 수 있는 무시무시한 폐해를 짚어내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기술과 과학의 순수성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표 롤로코스터에 탑승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메시스의 사자 와타세 경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장 벽에는네메시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본부장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인데 올바른 어원은복수가 아닌의분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살인의 동기도 의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 복수라면 사분이라고 불러야 하겠죠. 하지만 의분이라면 집행자는 제삼자가 됩니다.”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믿는 사람이 벌인 짓이라는 건가?”   p.50~51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행 현장에서 피로 쓰인 '네메시스'라는 문구가 발견된다. 네메시스, 인간이 저지르는 몰상식한 행위에 대한 신의 분노를 의인화한 여신이다. 대부분 복수의 여신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 어원은 의분, 즉 불의에 대하여 일으키는 분노라고 한다. 피해자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사형이 아니라 무기 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의 가족이었다. 누군가 가해자 대신 그 가족을 벌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사적 복수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개인이 모두 사적 복수를 하려고 나선다면 정의라는 것 자체가 무너져 버릴 테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범인은 누구인가' 보다 '범인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과연 네메시스의 행동은 사적 복수인가, 사법 체계에 대한 테러인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와타세 경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원죄 사건을 다루었던 <테미스의 검>에 이어서 이번에 만난 <네메시스의 사자>는 사형제도의 존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형제도에 관해서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 형벌의 목적을 교화로 보는 입장, 오판의 가능성, 정치적 악용의 가능성 등을 근거로 해서 폐지하자는 주장과 이를 남용할 것은 아니지만 극악한 범죄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아주 폐지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여전히 대립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사형제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아직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로 사형을 시행하지 않고 있기에, 실질적으로는 사형제도 폐지국가와 마찬가지이긴 하다. 반면 일본은 조사에서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사형을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쪽에 가깝다고 한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사법과 사형제도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진짜 적은 '네메시스'가 아니다.

바로 우리와 사법 체계를 향한 일반 시민의 불신이다. 그 불신이 '네메시스'를 낳았고, 행동하게 하고, 감싸고 있다.

바꿔 말해 '네메시스'는 모두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정의의 사도인 것이다. 국가가 내세우는 법치주의의 정당성을 비웃고 판례가 나타내는 거짓말 같은 법의 정의를 베어 넘어뜨리는 신의 대행자다.   p.293

최근 국내에서 한 동안 뉴스에 오르내렸던 흉악 범죄를 저지른어금니 아빠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많은 논란이 되었고, 덕분에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 반대 논란도 다시 일어나고 있다. 형법의 목적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범죄의 원인을 교정하고 갱생시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사법이라는 것은 얼마나 정의를 지켜내고 있는가. 피고인의 인권만 중시하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법의 보호 아래 살려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네메시스'가 등장해 법정 바깥을 복수의 장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사법 체계를 향한 일반 시민들의 불신이 '네메시스'라는 존재를 만들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국가가 내세우는 법치주의의 정당성을 비웃고 판례가 나타내는 거짓말 같은 법의 정의를 베어 넘어뜨리는 신의 대행자라니. 그는 피해자 유족의 대변자인가, 희대의 연쇄 살인마인가?

'원죄'를 다루었던 <테미스의 검>에서는 원죄를 감추려는 경찰 조직 전체에 맞서 외롭게 싸움을 했던 와타세의 고군분투가 리얼하게 그려졌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물을 던지고 있는 <네메시스의 사자>에서는 네메시스를 쫓는 와타세 경부와 고테가와 형사가 등장하지만 사건 해결보다는 제도 자체를 둘러싼 문제점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대신 그 동안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도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어 '나카야마 월드'만의 소소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늦깍이로 등단해 엄청난 집필 속도를 자랑하며 많은 작품들을 써내고 있는 작가이다. 2018년에도 출간 일정이 가득 잡혀 있고 현지에서도 두 달에 한 권꼴로 책이 나오고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국내에서도 곧 <날개가 없어도>라는 악덕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와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 출간될 예정이고, 내년 초에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악덕의 윤무곡> 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두 소녀는 여느 평범한 10대들처럼 서로와 많은 것을 공유하는 단짝 친구이다. 함께 음악을 듣고, 어려운 숙제를 도와 주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각자의 취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너 나 좋아하니?

엄청.

다행이다, 나만 그런 거면 어쩌나 했는데.

 

두 사람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우정을 넘어,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서로를 아끼고 너무 좋아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사이를 알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고민한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도 잘 모르고,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자신들의 감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책은 두 10대 소녀의 사랑을 서정적으로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틸리 월든은 영미권 그래픽노블계가 지금 가장 주목하는 작가로 <아이 러브 디스 파트>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기도 하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인 작가는 이 짧은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제목인 아이 러브 디스 파트는 좋아하는 음악을 하나의 이어폰을 나눠 들으면서 나는이 부분이 제일 좋다"라고 말하는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 속에서 비롯되었다. I love this part. 난 이 부분이 듣기 좋더라. 난 이렇게 하는 걸 좋아해. 난 이 넓은 세계 속에서 유일한 바로 너를 사랑해.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함께 공유했던 그 특별한 시간을 통해서 여전히 같은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서로를 떠올리고, 같은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는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띤다. 만화책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보통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이 책 <아이 러브 디스 파트>는 단순한 스토리를 감성적인 드로잉으로 풀어내고 있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 동안 만나왔던 그래픽노블이 예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문맥적으로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거나, 글은 적고 그림은 너무 상징적이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 작품은 굉장히 쉽게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보라색을 주조로 한 담백한 컬러 사용과 여백을 충분히 활용한 컷 구성도 인상적이고, 스토리 자체도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단편적인 장면들을 부각시키고 있어 더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사랑하지만 더는 못하겠어. 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렇지만 내가 널 어떻게 미워 하겠어.

 

누구나 이들처럼 순수하고, 풋풋했던 시절을 지나 왔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자신에게 유일한 존재를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히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 어른인 척 말고 진짜 느낌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박산호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 보면 또 넘어질 것이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넘어져도 될 순간과 안 될 순간을 구분하는 지혜를 기르고, 그렇게 넘어지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 무엇보다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지니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되는 묘미란 걸 요즘은 조금 알 것 같다.    p.50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에, '어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외로운 분투를 응원하며, 라는 문구때문에 뭉클해졌다. 사실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는 명사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그 책임이라는 것의 무게가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아서 그것에 따른 제대로 된 어른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저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었거나, 물리적으로 나이를 먹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에 가까운,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라고. 왜냐하면 다들 나이 드는 건 처음이니까. 다들 사는 게 처음이니까, 세상에는 처음인 것 투성이니 말이다.

박산호라는 번역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머리에 새긴 건은 톱 롭 스미스의 걸작 <차일드 44>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이후로 존 하트,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로렌스 블록, 제이슨 매튜스, 존 코널리 등의 작품을 거쳐 최근 돈 윈슬로의 <더 포스>에 이르기까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작가들의 작품에 항상 이름을 같이 하는 믿고 보는 번역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어 잘 모르는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옮긴이가 박산호라는 걸 알게 되면, 어쩐지 작품이 궁금해져서 찾아서 일게 되곤 한다. 그런 그녀가 써낸 에세이라고 해서 이번 작품은 정말 기대가 되었다. 영어나 번역에 대한 글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과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어른'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고 하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궁금했다.

 

 

준비하다 탕 소리가 나자마자 달리는 경주 같은 인생에서 경주마처럼 눈이 가려진 채 헉헉거리며 달리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끝나버리는 인생이라면 너무 허망하다. 그보다는 이번 도쿄 여행에서 호텔을 찾아가다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간 골목에서 담장 너머로 보이는 우아한 정원에 넋을 잃은 것처럼 인생에서 만난 우연한 순간에 감탄하고 싶다. 목적지로 최대한 빨리 직진하는 것보다 그 여정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참 맛이란 걸 느끼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작고 사소한 순간들을 알알이 느끼며 살고 싶다.    p.189~190

통역가를 꿈꾸다 읽고 쓰는 게 좋아 번역가가 된 후 16년 넘게 번역을 하고 있는, 이제는 베테랑 번역가로 이름만 들어도 믿고 지지하는 독자가 있는 위치에 있는 저자는, 여전히 자신이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지, 자각도 자격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결혼과 출산 후에 찾아온 우울증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냈고, 이혼 후 아이와 함께 건너간 영국에서의 삶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고 한다. 번역가로서 일을 하면서도 프리랜서로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그 모든 날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깨닫는다. 인생이란 완벽하지 않으며,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어른이라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겨도 멈칫하지 않으며, 인생이란 선의를 주고받으며 서로 돕고 사는 걸 이제는 알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몸과 영혼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무리해서 아둥바둥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한다. 무엇보다 내 몸을 아끼고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살다 보면 누구나 넘어지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것이 분명 있고, 넘어지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런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실패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있을 거라는 말에 위로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만하면 괜찮아. 이만하면 아주 잘했어. 라며 나를 다독여주고, 나이를 먹어서 서글퍼지는 게 아니라 나이가 주는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 괜찮은 어른, 느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건 어렵다. 그러니  어른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당신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다. 사는 게 마음 같진 않지만 분명 인생이 다정해지는 시기가 온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 보자. 분명 내일이 되면 또 다른 희망이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91 | 29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