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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의사와 나, 그리고 곰이 내 몸 깊숙이 두고 간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할 일은 이제 '이 소통을 유지'하는 데 있다.
곰에 맞서 생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일'에 맞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인 변화의 재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단일성은 결국 그것의 본래 모습인 환상으로 판가름 난다. 형태는 그것만의 고유한 도식을 가지고 재구성되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요소는 모두 외부에서 온다. p.90~91
짧게 자란 풀들로 뒤덮인 평원이 붉게 물들고 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드러나는 것은 갈색 털 뭉치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체액과 피로 덮인 모호한 형상을 하고 여성이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류학자인 나스타샤 마르탱은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의 화산 지대를 홀로 탐방하다가 곰에게 습격을 당한다. 광대뼈와 턱, 얼굴 전체가 찢기고 오른쪽 다리까지 물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등반용 얼음도끼를 휘둘러 가까스로 곰을 쫓아내고 여덟 시간만에 구조된다.
러시아 클리우치의 군사기지 병원으로 이송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인공 턱을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회복한 뒤 마침내 가족들과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이미 너무도 달라져있었다. 이 책은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강렬하고 생생한 체험을 기반으로 쓰인 일종의 다큐멘터리이자 회고록이다. 눈앞에서 번뜩이는 곰의 이빨과 축축한 숨결,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시베리아 곰에게서 생존한 사람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 ‘얼굴 훼손은 정체성의 상실’이라며 끊임없이 기분을 묻는 심리치료사와 자신의 몸을 연구 대상으로 대하는 의사들, 더는 함께 일상을 공유할 수 없는 친구들 속에서 저자는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인 그들과 저 위, 고도의 툰드라에 존재하는 곰의 세계 사이를 잇는, 이상야릇한 가교가 된다'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경계, 가장자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 접경지대, 그리고 중간 세계에 대해 써왔다. 다른 존재의 힘을 만나는 것이 가능한 곳, 자기가 변질될 위험을 감수하는 곳, 그리고 한번 가면 다시는 되돌아오기 힘든 매우 특별한 공간에 대해서. 나는 매혹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항상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사냥꾼은 먹잇감의 냄새를 풍기고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목소리를 흉내 냄으로써 위장하지만, 가면 너머에서는 여전히 자신인 채로 상대의 세계로 들어간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혹은 우리가 속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상대를 죽일 수 있는가. 혹은 실패하고 상대에게 집어삼켜져 인간의 세계에서 살기를 멈출 것인가. p..149
병실에 있는 저자에게 FSB, 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이 찾아온다. 클리우치 즉 군사 요충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곰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러시아 군사 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고도로 훈련을 받은 비밀 요원'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간첩 행위는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 시간 넘게 설명해야 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의료진은 러시아의 수술이 잘못되었다며 ‘프랑스식’으로 다시 수술받아야 한다고 진단하고, 다시 또 수술이 시작된다. 육체적인 고통은 점점 심해졌고, 내면에서는 살아 숨 쉬는 곰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낀다.
이 모든 길고 끔찍한 과정들을 서술하는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시적이다. 곰과의 결투 이후 섬광의 순간, 숲의 자명함, 죽지 않도록 결심하게 만든 명백함, 시간 이전의 시간, 살아갈 세상에 대한 주제로 협상을 구축하는 시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사유가 아름다운 언어로 페이지마다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곰에 맞서 생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일에 맞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인 변화의 재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가을에 시작되었던 이 이야기는 겨울을 병원에서 보내고, 봄을 거쳐 여름으로 향한다.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불확실성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다. 그래서 저자가 피해자로 남는 대신 인류학자로서 다시 서기 위해 한 선택이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인간과 짐승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면 보이는 세상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