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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라가 그렇게 원예 농업에 빠진 한 가지 이유는 식물을 돌볼 때면 가차 없는 자기비판 습성에서 한숨 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물을 키우면 명백히 용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삶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불가능한, 영속적으로 이행하며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실패하고 실수해도 ─ 예컨대 양파 씨앗은 오래 보관할 수 없다거나, 흙 온도가 낮으면 당근색이 연해진다거나, 회향풀은 다른 식물의 성장을 막기 때문에 따로 번식시켜야 한다는 사실들을 배울 때 ─ 전혀 야단맞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텃밭에서는 진실이 올바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고, 옳음의 반대가 틀림도 아니었다. p.76
미라는 버려진 땅에서 작물을 키우는 게릴라 가드닝 단체 〈버넘 숲〉의 설립자다. 게릴라 가드닝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에 쓰레기 대신 꽃과 식물을 심어 정원을 만든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토지 소유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환경 운동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이상을 품고 있는 미라는 5년간 활동해왔지만 조금씩 침체되어 가고 있는 버넘 숲의 미래를 위한 돌파구를 찾는 중이다. 그녀는 산사태로 고립된 마을 부지 답사에 나섰다가, 제조업체의 CEO이자 억만장자인 로버트 르모인과 우연히 맞닥뜨린다.
땅의 원래 주인이 알면 안 되는 계획을 각자 품고 있던 미라와 르모인은 원예가와 기업가라는 상반된 직업에 추구하는 가치도 전혀 달랐다. 이론상으로는 철천지원수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서 묘한 공통점, 자신만만하고 매력적인 야심가라는 점을 발견한다. 미나는 처음에 자신의 가짜 신분 중 하나를 골라서 말하며 그 자리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사실 르모인은 그녀의 이름이 미라라는 것과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낸다. 이유는 그녀를 먼저 발견한 즉시 미라의 휴대 전화와의 강제 연결로 신원 정보에 접근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르모인은 미라에게 '당신이 날 방해하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미라와 그녀의 프로젝트를 이용해야겠다고 마 음 먹었기 때문이다. 르모인은 자신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숨기기 위한 연막작전으로 버넘 숲에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데, 그로 인해 갈등이 시작된다.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지나고 보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아닐 경우에는, 적어도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잘못된 일은 말이야, 종종 훨씬 분명해. 잘못된 일은 많은 경우 옳은 일보다 더 잘 보여. 더 명확해. 이건 내가 안 넘을 걸 아는 선, 이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일, 이런 식으로.」 p.332~333
공식적으로 버넘 숲은 시내의 열여덟 군데에서 경작하고 있었다. 요양원과 어린이집 정원, 병원 주차장 근처, 학생 임대 아파트 마당 등에 자리하고 있었다. 땅과 수돗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땅 주인들에게 모든 수확물의 반을 주고, 나머지 반은 회원들끼리 소비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도 했다. 누구도 임금을 받지 않았고, 모든 자산은 공동 소유였으며, 활동은 거의 모두 비상근으로 이뤄졌다. 미라의 친구이자 현실적인 조력자인 셸리는 활동 계획을 좀 더 안정적으로 세우기 위해 농산물 구독 서비스를 시작해보자고 의견을 냈지만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셸리에 비해 미라가 버넘 숲에 품은 야심은 급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사회 변화였다. 버넘 숲에는 현명적 목표를 품은 이론 공상적 사회 개량주의자들, 두 개의 파가 존재했다. 미라는 르모인의 제안을 손에 쥐고 버넘 숲의 일원들을 설득하려 한다. 어떤 조건도 없이, 그냥 기부 같은 걸로 자금을 대주겠다고 했다며, 그걸로 우리가 제대로 된 비영리 기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버넘 숲의 일원들은 각자 생각이 달랐다.
이 작품은 <루미너리스>로 맨부커상 최연소 수상을 했던 엘리너 캐턴이 10년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자본주의 구조 밖에서 활동하던 원예가가 엄청난 자본과 함께 나타난 기업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를 넘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맥베스의 '버넘 숲'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려보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과세 신고도 하지 않고 단속도 받지 않으며 때로는 범죄자, 때로는 박애주의 친구 모임 같은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억만장자 르모인이 나타나면서 사태가 달라지고, 충격적인 사고와 어두운 비밀이 드러나면서 산사태처럼 휘몰아치는 전개가 이어진다.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서도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압도적인 몰입감의 페이지 터너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