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Philos 시리즈 35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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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가함이란 아무것도 할 게 없고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가함은 한가함 속에 있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나 느낌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즉, 한가함은 객관적인 조건과 관련이 있다. 

반면 지루함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감정이나 기분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방식이나 느낌과 관련되어 있다. 즉, 지루함은 주관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p.120


끊임없는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딜레마가 있다.  자극이 없으면 지루해하면서 지나친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끊임없는 자극은 견딜 수 없지만 자극이 없는 것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지루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살아가면서 정작 지루함은 피하고 싶어 한다.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한데, 왜 그로 인해 지루함이라는 불쾌한 상태가 되는 걸까. 삶을 관통하는 이 정반대되는 두 가지 방향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책은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해 철학적인 고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은 왜 자극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극을 갈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인간의 근원적 모순인 '지루함'이라는 기분의 정체에 대해 탐구한다. 일본에서는 누적 판매 50만 부를 달성하며 현대의 고전이라 평가받기도 했는데, 이번에 초판본에는 없었던 최신 뇌과학 연구와 철학적 사유를 결합해 출간되었다. 러셀, 하이데거, 파스칼, 루소,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 지루함과 권태에 관한 사유가 400년을 이어져 왔다는 사실부터 매우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우리가 겪는 ‘지루함’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우리 각자가 지닌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지루함'이라는 기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지루함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의 발현이다. 하이데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가능성이란 자유를 가리킨다. 인간은 지루해한다. 아니, 지루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결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결단에 의해 인간의 가능성인 자유를 발휘하라고.... 하이데거는 인간이 지루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간만이 지루해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지루해하지만, 동물은 지루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311


'지루함'과 '한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는데, 사실 평소에 지루하다는 생각이나 한가하다는 느낌을 받는 일이 별로 없어서 더 궁금했던 책이다. 대체 한가하고 지루한 감정에 대해서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할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그 사유라는 것이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차근차근 따라 가다 보면 꽤나 일상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사례들도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셀의 지루함론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이런 식이다. 러셀이 말하는 '지루함이란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이란 오늘을 어제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매일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래서 오늘을 어제와 구별해 줄 것을 갈망한다. 사건의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불행하거나, 비참한 사건이어도 된다. 보통 지루함의 반대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루해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흥분할 수 있는 것이면 불행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지루해지고 마는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사실 지루함과 기분 전환이 뒤얽힌 삶, 지루함도 있지만 나름 즐거움도 있는 삶,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다운 삶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빵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빵뿐 아니라 장미로 장식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모리스의 사상을 비롯해서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파스칼의 말, 지루함이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된 것은 낭만주의 탓이라는 스벤젠의 입장, 인간은 어떻게든 무언가에 괴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지닌다는 니체의 의견에 이르기까지 지루함의 계보학을 만나보자.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문학, 생물학, 의학을 넘나드는 사유의 시간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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