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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문화 - 미국과 일본의 선택적 기억, 집단적 망각 ㅣ Philos 시리즈 34
존 다우어 지음, 최파일 옮김, 김동춘 해제 / arte(아르테) / 2024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안전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참화와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상상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타인의 심리에 대한 감수성과 더불어 도덕성도 무뎌진다. 머나먼 곳에서는 일어나는 파괴에 대한 간단하고 실제적인 이해 역시 추상적으로 흐르게 된다. 태평양전쟁의 경우가 확실히 그랬다. 1945년 미국의 폭격 작전이 60곳이 넘는 도시지역을 가루로 만든 뒤, 패전한 일본에 상륙한 미국인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대도시들이 온데간데없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은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와 동일한 반응이 2003년 봄에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국인들에게서도 나왔다. p.169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항공모함 6척이 하와이 제도 오아후섬 북쪽 200마일 해상까지 접근해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가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다.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하고 미군 2,334명과 민간인 103명이 사망한다. 다음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상하원 합동 회의에 나타나 미합중국이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고의적으로 갑작스레 공격당했다며, '오욕 속에 길이 남을 날'이라고 표현한다. "오욕"은 즉시 일본의 배신과 기만과 더불어 '진주만'을 가리키는 미국의 코드가 된다. 그리고 1945년 8월,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한 폭탄이 터진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에 의한 사망자 수는 무려 21만 5000명에 달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 테러범들에게 미국의 민항여객기 4기가 연쇄적으로 납치당했다. 이 비행기 충돌로 인해 110층 짜리 쌍둥이 빌딩인 세계 무역 센터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미 국방부 본부인 펜타곤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다. 9.11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10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사망자가 많은 테러로 기록되었다. 9.11 테로 공격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인지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미국 논평가가 가장 먼저 끄집어낸 단어는 '오욕'이었다. 전문가와 정치인, 경악한 미국인들은 어디서나 거의 반사적으로 '진주만'을 떠올렸다. 과거와 현재는 한순간, 마치 영화 속 플래시백처럼 접합됐다. 미국은 9월 11일을 진주만에 도덕적으로 상응하는 것으로, 그날 시작된 투쟁을 제2차세계대전에 상응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 거기서부터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시작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에 세상의 새로운 악들이 더 있었다. 힘의 정치라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일본 점령은 "대기 지역"과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세력권이라는 더 큰 의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법과 질서 유지에 항복한 일본군을 활용하는 일은 처음에는 계획에 없었을지라도 이 게임의 의미심장한 일부가 됐다. 그리고 패전 일본에 쏟은 자애로운 가부장 같은 관심은 다른 아시아인들을 향한 미국 및 연합국의 정책 및 관행과 날카롭게 대비됐다.
아시아에서 포성이 정말로 멈추고 평화가 찾아온 곳은 유일하게 일본뿐이었다. p.556
'전쟁의 문화'라니. 과연 전쟁이 '문화'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 일반화된 태도나 의식, 습관, 신념 등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문화'란 무엇인가. 이 책은 “진주만공격, 히로시마 폭격,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이라크 침공”이라는 네 사건을 통해 드러난 전쟁의 문화를 살펴보고, 현대 전쟁의 문화적 패턴을 분석한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9.11 이후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비교하는 것이 중심 서사인데, 전쟁계획가의 오만과 위선, 그리고 합리적 선택권의 행사가 실제로는 어떻게 비합리와 무책임의 상징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9.11과 결부된 많은 것들이 진주만과 제2차세계대전을 떠올릴 만한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기에 역사와 동시대의 사건을 하나로 묶어서 살펴보는 일이 더욱 의미가 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오히려 만성적인 전쟁 국가가 되었고, 전쟁의 문화는 미국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상한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미국과 일본, 두 제국의 전쟁문화를 세세하게 해부하면서 현재라는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역사적 시각 자료 122컷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생생하게 진주만, 히로시마, 9•11, 이라크라는 네 전쟁에 대해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 전쟁의 논리와 수사가 어떻게 폭력을 용인하고 그 기억이 어떻게 선택적으로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전쟁의 문화'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미국이 개입한 아시아 전쟁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 말이다. 이 묵직한 책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단히 훌륭한 대답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