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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시민들 ㅣ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평점 :
체 게바라, 헤밍웨이, 피델 카스트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럼, 시가 등등.. 쿠바를 대표하는 단어에는 낭만적 상상이 가득하다. 하지만 실제로 쿠바에 가 본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고, 우리에게 낯선 나라이긴 하다. 낭만과 현실은 다른 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소설가 백민석이 홀연히 쿠바로 떠난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이 책은 소설가 백민석이 쿠바에서 느꼈던 감흥을 2인칭 시점으로 담백하게 풀어놓은 여행기이다. 쿠바라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도 궁금하지만, 여행 에세이가 마치 소설처럼 2인칭으로 쓰였다는 것도 굉장히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장치는 이 책을 흔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일종의 소설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쿠바는 여행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멀고 낯선 나라에 속한다. 문득 바다 생각이 낫다고 해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3개월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과 수교가 안 돼 있어 정식으로 여권 비자를 받는 게 아니라 별도의 여행자 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를 가진, 덥고, 습한 나라이다. 소설가 백민석, 그는 대체 왜 많은 나라 중에 쿠바를 다녀오게 된 것일까.
"아바나 어때?" "멋져. 정말 멋져." 쓸데없는 대화다. 아마나에 대해서라면 당신의 언어는 무력하고,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몇 장이 더 효과적이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백민석이 직접 찍은 것들이다. 그는 여행 초반에 카메라를 잃어 버렸고, 쿠바의 어느 점포를 가도 팔지 않는 카메라를 포기하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로 한다. 그리고 나머지 멋진 풍경은 플래시 메모리 대신 자신의 기억에 담아 가기로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원료로, 그에 어울리는 글을 덧붙이는 과정으로 쓰인 이 책은 단순히 여행지에서의 감흥을 끄적인 에세이라기 보다는, 사진이 곁들어진 짧은 단편 소설처럼 느껴진다. 그는 쿠바의 아바나를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서 찍은 사진의 순서를 뒤섞어서 무작위로 배치한 뒤, 사진의 차례가 정해지는 대로 글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난 뒤, 백팩을 메고 산책을 하고 나서, 플로리다 해협에 지는 낙조를 보며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런 일상을 보내면서 그는 아바나의 하늘이며 구름이며 바다며 방파제며 그 무엇도, 자신이 그 동안 알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자주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덥고 습한 나라에서, 그는 그렇게 고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같이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수시로 쏟아지는 장대비는 그치다 말다를 반복하고, 태양은 눈을 찌를 듯이 화끈거리게 덥기만 하다. 하지만 그곳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아바나'였고, 계획 없이 쏘다닌다 하더라도 아바나는 그를 심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곳이었다. 무작위로 길을 떠나 걸음을 멈추면 그곳이 가볼 만한 곳이 되고, 어제 걸었던 길을 또 걸어도 또 다른 볼거리가 나타난다는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백민석은 석 달이라는 긴 여행 동안 아바나의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사실 아바나를 걷는 일은 아바나 시민들도 때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뙤약볕은 현지인에게도 견디기 힘든 것이고, 부채를 이마를 가려도 햇볕은 가볍게 뚫고 들어온다. 아바나에서는 서늘하게 그늘진 골목을 찾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 모든 좁은 골목마다 격렬하게 뜨거운 미친 태양의 볕이 가득 차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바나에서 끝없이 걷는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아바나에 대한 독서 행위나 마찬가지다. 낱말을 읽듯 집집마다 기웃거리고, 행간을 읽듯 골목마다 헤집고 다니고, 문단을 읽듯 지역을 훑는다. 나중엔 책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듯 아바나 전체를 알게 되거나, 알게 되었다고 자신을 속이게 된다.
쿠바는 햇볕이 강하고 대기오염이 적은 탓에, 카메라로 피사체를 겨냥할 때마다 명암의 멋진 대비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셔터만 눌러도 사진이 되어 나온다는 그곳에서, 소설가 백민석의 사진도, 마치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은 것처럼 근사하다. 스펙터클한 대자연의 장관이 언제나, 다양하게 펼쳐지는 나라. 그곳에선 태양도, 구름도, 파도도, 하늘도, 당신이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니다.
백민석은 처음 한 달 동안 그 낯선 나라에서 가이드북 없이 다녔다고 한다. 한 번도 사전 계획 없이, 스케줄을 짜지 않고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이런 낯선 나라에서 무계획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여행이라는 것이 어떨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는 덕분에 늘 길을 잃었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미지의 것들과 부닥치며, 쿠바라는 나라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아바나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쌔고 쌨다고. 스페인어를 모르면 식당에서 곤란해질지도 모르고, 게다가 외국인에게는 이중 환율제를 적용하고, 동남아의 찜통더위하고는 또 다른 미친 태양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은행 자동 인출기를 써야 하는데 비자 카드가 없다면 또 큰 곤란을 겪게 되는 나라이다. 그러니 당신이 한국에서와 독같이 생활하고 싶다면, 아바나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저런 영혼의 족쇄를 훌훌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당신은 아바나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쿠바는 쉽게 상상하는 관광지로서의 나라가 아닐 거라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한번쯤 여행을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간다.
사실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에 가서 일부러 짬을 내 현지 시민들의 일상을 둘러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외국에 자주 나가는 편이 아니고, 여행을 가서도 그다지 길게 머물지 못하니, 이름난 곳부터 둘러보게 마련이니 말이다. 나 역시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든 비슷한 경험을 해 왔다. 그런 내게 이 책 속 여행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색다르고,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가고 싶은 여행지 하면 주르르 떠오르는 수많은 나라와 도시들이 있지만, 단 한 번도 쿠바를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은 어느새 반쯤 아바나로 향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계절, 일상을 벗어나, 잠시 자신의 삶을 놓아두고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쿠바로 떠나 보는 건 어떨까. 미친 태양이 작열하는 그곳에서 당신은 예상보다 훨씬 뜨겁고 눈부신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바나는 그런 곳이니까 말이다. 낭만과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아바나에는 그것을 뛰어 넘는 무언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