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작가라는 설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처럼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쓴 글대로 타인의 운명을 바뀐다면? 타인의 운명을 설계하는 유령작가들의 치열한 이야기를 만나보았다.
"미은 씨. 잘 들어요. 내가 하나만 얘기할게요."
"........예. 말씀하세요."
"사람이 너무 착하면 좋은 소설가 되기 힘들어요. 소설이란 게 뭐예요? 이야기란 게 뭐예요? 다 주인공에게 일이 터지고 문제가 생기고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갈등이 벌어지고, 그걸 해결하고 그러는 게 이야기의 본질이잖아요."
.............."핵심은, 이야기란 결국 주인공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건데, 작가가 너무 착하면 주인공에게 문제를 만들어내기가 무지무지 어렵거든요. 그죠?"
시영은 정식으로 데뷔한 소설가이다. 하지만 현재는 남의 작품 대신 써주기, 자서전 집필 등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 없는 글쓰기로 겨우 먹고 사는 중이다. 그는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인스턴트 식품보다 못한 음식을 만드는 가짜 요리사. 군대처럼 까라면 까고, 회사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하청업자, 그러니 자신은 그저 가짜라고 말이다. 회사 대표의 이름으로 나온, 시영이 쓴 작품은 현재 인기 웹소설 플랫폼에서 조회수 2회를 기록하며 화제지만, 그건 그의 작품이 아니다. 마감 조금 늦었다고 고료조차 제때 받지 못하는 고스트라이터 신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지만, 당장은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돈으로 시간을 벌고, 번 시간에 글을 쓸 수 있는데, 돈을 벌려고 유령작가 짓을 하느라 정작 자신의 작품을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을 찾아온다. 2년전 마약 과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구설수에 오른 뒤 몰락한 배우 차유나였다. 그녀는 시영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출연하고 싶은 감독과의 미팅 내용을 상상해서 소설로 써달라고. 감독이 그녀를 자기 작품에 출연시켜야겠다고 마음먹는 내용으로 그녀의 미래를 그려달라는 거다. 그녀는 자신이 그 글을 읽고 나면, 그대로 이루어 질거라고 말한다. 그는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긴가 싶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고 고료를 선입금해준다는 소리에 글을 써보기로 한다. 그렇게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고 차유나에 대한 동영상들을 찾아본 뒤, 그녀의 미래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얼마 뒤 차유나는 정말 그가 쓴 대로 영화에 캐스팅되었고, 그는 거액의 돈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정작 자신의 두 번째 소설은 전혀 써지질 않는다.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오진수라는 인물은 그에게 말한다. "고스트로 사는 동안 넌, 너 자신의 글을 쓸 수 없어" 라고. 시영은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고스트라이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미래를 써줄 자신의 고스트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그의 능력을 눈치 챈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큰손 강태한에게 납치되고 만다.
대한민국 소설가 중에 총구를 마주했던 사람이 있을까? 총 맞을 뻔한 적이 누가 있을까?
어제는 내게 총구를 겨눈 놈에게 달려들었고, 몇 대 맞긴 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래, 살아남았으면 살아남은 것에 대해 쓰면 된다. 작가에게 특별한 경험이란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써라.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써라.
나는 썼다.
잠을 깨우던 인쇄 거리의 기계 소리와 오토바이 시동 소리는 이제 내게 노동요가 되었다.
당신은 내가 쓰는 대로 살게 된다는 플롯이 미스터리의 시작이지만, 그 속에 작가로서 창작자의 고통도 들어가 있고, 타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권력욕 속에 현실 비판적인 배경도 녹아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흘러간다. 카카오페이지 선연재 때도 엄청난 화제였던 걸로 아는데, 출간되고 나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유명인의 뒤에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자서전이나 연설문 등을 대신 써주는 유령 작가라는 소재는 기존에 영화나 소설 등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써서 타인의 운명을 설계하는 유령작가라는 소재는 기존에 없었기에 이 작품의 시작점은 매우 기발하고, 흥미롭다. 고스르라이팅의 조건은 대상에 애정이나 분노를 가지고 써나간다면, 이다. 그 말인즉, 고스트라이터가 쓰는 글로 인해 누군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지만, 분노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진짜 갈등과 클라이막스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스토리가 매우 군더더기없이 그려지고 있고, 단순하면서도 드라마틱해서 바로 영상화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장마다 글쓰기에 관한 작가들의 명언들로 오프닝을 열고 있어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작가란 무엇인가? 글 쓰는 사람이다. 글쓰기를 계획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책을 요약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자료를 조사하는 것도 글쓰기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들도 모두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는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다.
-E. L. 독터로
극중 오진수가 이야기에 대해 정의를 하는 대목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고로 스토리는 재밌어도 안 되고 웃겨도 안 된다고. 무조건 궁금해야 된다고. 자고로 뭐든 이야기는 궁금해야 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안 보면 되는데도 끝까지 보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대로 이야기는 궁금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궁금함이 최우선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미스터리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