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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나는 <새벽의 7인>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유태인 학살의 주요 계획자였으며, 하인리히 히믈러를 월등히 뛰어 넘는 수준으로 190이 넘는 장신에, 4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수영, 스키, 승마, 펜싱 등 스포츠에도 만능이었으며 똑똑하고 비상하기로 소문한 인물이었다. 영화는 그를 암살하는 작전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최근에는 체코 레지스탕스 2명의 코드네임을 따서 <앤트로포이드>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로랑 비네의 <HHhH> 역시 바로 그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에 대해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소하고도 낯설게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는 싸움이다. 이런 이야기는 솔직하게 할 수밖에 없다. 얽히고설킨 수많은 등장인물, 사건들, 날짜들, 끝없는 원인과 결과, 사람들, 실존했던 사람들, 그들의 인생, 활동, 빙산의 일각처럼 다뤄 보는 그들의 생각, 실망스러운 인간관계의 덩굴이 멈추지 않고 언제나 더 높고 더 무성하게 퍼지는 역사의 벽, 그 벽에 번번히 부딪히는 나.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 '나'는 1인칭 화자가 아닌 작가 자신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는 전 과정을 그린 일종의 작가 노트와 소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구성이다. 작가는 '실존인물'과 '실제사건'이라는 역사 소설의 기본 공식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면서 그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허구의 그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녹음, 속기 자료를 토대로 에피소드와 대사를 구성하고 취재, 집필 과정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데, 덕분에 그가 그리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 긴박한 시간 속으로 독자가 완전히 '몰입'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인물이 처한 상황에 감정 이입을 하거나 극적인 구성을 따라가며 긴장감을 느끼거나 극에 몰입해서 내가 책을 읽고 있다는 현실을 잊어버리는 일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작품의 정체가 뭔가.
'역사적인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고증하는 소설도 있고, 실제 일어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설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벽을 교묘히 우회하는 역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자신이 역사를 픽션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며,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실화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날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 교과서를 쓸 마음은 없기에, 개인이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써 나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저 일어난 일들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작가의 시선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등장인물을 만드는 것은 증거를 위조하는 것과 같다'며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다가 205 챕터에 이르러 (전체 257 챕터) 자신이 쓰고 있는, 혹은 쓰고자 하는 소설의 방식에 대해 정의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 이라고 말이다. 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날카로웠던 부분들이 조금은 뭉툭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종일관 대체 무슨 작품이 이렇지? 싶어 다소 불편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소설처럼 구멍이 뚫려 버린다. 일반 소설이라면 소설가가 구멍의 자리를 정하지만 조심성이 지나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카를 다리를 지나 바츨라프 광장을 거슬러 올라 박물관 앞을 지나는 장례 행렬 사진들을 훑어본다. 다리 난간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석조 동상들이 하켄크로이츠를 굽어보고 있다. 뭔가 역겨운 느낌이 든다. 차라리 성당 회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게 낫다. 조그만 자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HHhH>라는 독특한 제목은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로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라는 뜻이다. 나치의 수장 히믈러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유태인 학살의 계획을 세웠던 건 하이드리히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하이드리히가 아니다. 그는 작전의 표적이지 주체가 아니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배경을 설명해 주는 역할에 그친다. 그를 암살한 두 영웅, 즉 유인원 작전이라 불렸던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의 주체였던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진짜 주인공이다. 로랑 비네는 이들 두 사람을 단순히 소설 속 문단을 이루는 검은색 글자로만 표현되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그렇게 역사 속 특정 영웅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간 속에서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흥미로운 건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지만, 어느 순간 역사의 한 복판에 서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는 2차 세계 대전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실화에 가깝게 스토리를 구성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게 사실이다. 설마 저런 일이 진짜 벌어졌을까. 인간이 실제로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싶을 만큼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역사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있었던 사건들을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역사지만 픽션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작가가 끊임없이 토를 달고, 코멘트를 붙이고, 주석을 덧붙이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의 그런 노력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역사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현실과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부단히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전혀 껄끄러움없이 말할 수 있다. 자고로 역사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역사' 소설이라는 그 자체보다 그것이 쓰이는 방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만으로도 이 작품은 우리를 2차 세계 대전의 그 언저리 어디쯤인가로 데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