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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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10 15일 파리, 검은 실크 스타킹과 실크 레이스로 장식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여우털로 소매와 옷깃을 장식한 발까지 늘어지는 긴 모피 코트를 입고, 펠트 모자와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착용한 한 여인이 감방을 나와 처형 부대가 대기하는 장소로 향한다. 그녀는 눈을 가리지도, 묶이지도 않은 채 침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처형할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두 명의 병사들이 몸을 곧추세우고 총을 어깨에 바짝 붙이는 순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여전히 태연했고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그 여인은 그렇게 총살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녀의 이름은 마타 하리, 죄목은 스파이 혐의였다.

죄가 없다? 어쩌면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겁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이 도시에 첫발을 디딘 이후로 죄가 없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정부 기밀을 원하는 자들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결국은 내가 조종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죄로부터 도망쳤고, 나의 가장 큰 죄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이용한 것이라고는 상류사회 살롱에서 떠도는 풍문들뿐이었지만 나는 스파이라는 죄명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마타 하리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아름다운 미모로 유럽의 사교계를 오가던 무희였던 여자가 어떻게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정보를 판 이중간첩 혐의를 받게 되었을까? 생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떳떳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품위를 지켰던, 팜므 파탈의 대명사 마타 하리, 나는 그녀에 대해서 뮤지컬 작품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파리 물랑루즈의 유명 댄서로서도 신비롭고 관능적인 무희였고, 유럽 각국의 최고 권력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실제로 이중 스파이였는지 여부와 별개로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매혹적인 무희이기도 했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터라 한 여자로서의 삶도 매우 궁금했고 말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마타 하리를 독립적인 삶을 택했고 남성 중심 시대에서 여성의 권리를 표명했던, 20세기 첫 페미니스트였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권위자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란 이유로 그녀에게 죄를 전가했다고 말이다. 그는 실제로 제네바에서 유엔평화대사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힘쓰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사랑과 여성의 권익에 대해 관심이 많은 작가가 그려내는 그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마타 하리를 그려내면서도 소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누구나 쉽게 그녀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안드레아스 부인이 내게 정확히 이런 표현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우리 인생은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되어 있노라고, 태어나 공부하고 남편감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가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남자일지라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늙어가고, 거리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너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어' 라고 말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시기했다. 마타 하리는 고위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두터운 인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중 스파이 의심을 받게 되자 그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걸 가졌을 때 항상 다정했고 자신을 돕고자 했던 친구들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곁에 있어 주리라 믿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그늘 아래 확증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감옥에 갇힌 순간에도 그녀의 영혼이 여전히 자유로웠다는 데 그녀의 가치가 있다. 물론 마지막까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였지만 총살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죽는 이유는 말도 안 되는 간첩 혐의 때문이 아니라 항상 꿈꿔온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고, 꿈에는 언제나 비싼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 작품을 쓰면서 대화 일부를 만들어냈고, 일부 장면들을 삽입했으며, 사건의 순서를 약간 바꾸었고, 서사와 관련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생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 쓰인 내용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다. 오직 사랑만을 갈구했고, 언제나 스스로이기를 원했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여인. 마타 하리가 실제로 스파이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비밀이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문서에는 그녀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녀가 한때 유럽을 들끓게 한 뇌새적인 미모를 가진 만인의 연인이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 이 작품은 그녀의 일대기라고 부르기에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허구의 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애매할 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마타 하리라는 한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전히 권력에 의해 무고한 삶이 희생되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혹은 우리 여성들에게), 삶의 어느 순간에도 진정한 나로 살고자 했던 그녀를 통해서 우리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잃어버리지 말자고 말이다. 마타 하리같은 여성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말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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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과 마타 하리의 실제 삶을 묘사한 책을 안 봐서 모릅니다. 코엘료가 마타 하리를 ‘20세기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치켜세운 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초‘라는 말만 넣지 않았으면 부정할 수 없는 평가라고 생각해요. ^^;;

피오나 2016-11-15 12:37   좋아요 0 | URL
하핫. 그거야뭐 개인의견차이니까요. cyrus 님께서 생각하는 20세기 첫 페미니스트는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cyrus 2016-11-15 13:52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ㅎㅎㅎ

물론 제 의견도 꼭 맞다고 볼 수 없어요. 제 생각에는 버지니아 울프인데, 사실 지금 딱 생각나는 20세기 페미니스트가 울프 뿐입니다. ^^;;

피오나 2016-11-15 18:15   좋아요 0 | URL
오호..버지니아 울프도 있었군요!! 멋진 의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