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사건은 이렇다. 스물 두 살의 여자가 자정 무렵 살해된다. 범인은 육중한 것으로 여자의 두개골을 내려친 다음 복부를 칼로 세 번 찌른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 현장 근처에서 술에 곯아떨어져 잠들어 있던 노숙자가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그는 범행에 대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그다지 특별해 보일 것 없어 보이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담스베르그 반장을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사건이 된다.

"난 사실을 믿지. 그가 돌아왔고, 나에겐 다시 기회가 찾아왔어. 더구나 난 그 조짐을 미리 느꼈다네."

"조짐이라뇨, 무슨 조짐이오?"

"경고 말일세. 술집 여종원원, 포스터, 일렬로 꽂혀 있는 압핀."

당글라르도 당황한 나머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느님 맙소사, 조짐이라뇨? 서장님, 이젠 신비주의자가 되셨나요? 도대체 무슨 허끼배를 따라다니시는 겁니까? 귀신? 유령? 그 귀신은 어디에 산답디까? 서장님 머릿속에 둥지를 틀었나요?"

 

평범해보이는 사건으로부터 특별한 것을 이끌어내어 우리의 주인공과 연결해내는 방식에서 작가만의 개성이 가장 드러나게 마련인데, 프레드 바르가스의 방식은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다. 우리는 우선 강력계 형사 스물네 명을 추위에 떨게 만든 보일러 고장에 대해 알아야 하며, 아담스베르그 반장을 비롯해 주요 인물들이 곧 퀘벡에 가서 DNA 연수를 받게 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중 비행 공포증이 있는 당글라르는 그들이 타게 될 비행기가 대서양 상공에서 공중 폭발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연수를 가지 않으려 하는 중이고, 일년 전 자취를 감춘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는 아담스베르그의 여자 카미유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된다. 게다가 아담스베르그 반장이 문제의 이 사건과 맞닥뜨리는 방식은 더욱 기묘한데,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등을 내려친 폭풍 같은 충격으로 전조를 만들고 있다. 그는 당글라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길을 걷다가,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그것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특별한 사건과 제대로 연결되기 까지 우리는 오십여 페이지를 넘게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세발작살 살인 사건과 아담스베르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드디어' 그 전모가 밝혀지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곧바로 이들의 퀘백 연수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백여 페이지 동안 현재 벌어지는 사건과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퀘백에서의 일상이 길게 늘어지더니 그들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 하고 나서야, 그러니까 이백오십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사건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전혀 연결될 것 없어 보이던 퀘백 에서의 그것에서부터 비롯되어 아담스베르그 서장의 발목을 잡고 그를 과거로부터 옭아매는 귀신 과도 같은 세발작살이 그의 현재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딱 이 책의 중간 정도 되는 분량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흘러오던 이야기는 이후 가속도가 붙어 엄청나게 속도감이 생긴다. 빨리 마지막 페이지가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나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안달이 날 수밖에 없도록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들이 두툼한 두께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에 있다. 정말 치밀하게 날줄과 씨줄로 연결된 플롯을 거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여유 넘치는 흐름으로 끌고 가다가, 어느 순간 시계 톱니바퀴 마냥 딱딱 이가 맞는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는 뭐 게임 끝이다. 그 누구도 프레드 바르가스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입조심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를 믿으라고 설득하지 말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자네가 용감하고, 정신이 똑바로 박혔다고 믿네. 악마를 찾아내게. 악마를 찾아내서 법의 올가미로 옭아 넣을 때까지는 남의 관심을 살 행동일랑 하지 말게."

아담스베르그는 내내 난간에 기대서서 순수함으로 빛나는 이마를 지닌 캐나다 동료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그런데 상스카르티에 자네는 왜 나를 미친놈 취급하지 않나?"

"그거야 자네가 미친놈이 아니니까 그렇다네. 아주 간단하지. 밥 먹으러 갈 텐가, 갈 텐가 벌써 정오가 지났네."

 

수십 년에 걸쳐 무려 열 세 명이나 되는 살인을 저지른 무시무시한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범인은 그 존재 유무만 의심스러웠지 이야기의 시작부터 밝혀 놓고 있기 때문에 살인 사건 수사 자체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아담스베르그 서장을 비롯한 캐릭터들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페이지를 찢고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담스베르그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사로 느림의 미학을 말과 행동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세상에, 살인 사건 조사에 '느림의 미학'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때로는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가 숨어 있다고 믿는 그의 감각이 분명히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천재적인 수사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닌 주인공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홀린 것처럼 그에게 점점 사로잡히고 마는 마력의 캐릭터이다.

그의 충직한 보좌관 당글라르는 직관에 의존하는 자신의 상사와는 달리 논리로 무장한, 웬만한 정보들은 모조리 습득하고 있는 만물박사이다. 다섯 명의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홀아비인 그는 바람둥이 상사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그의 여자 카미유를 몰래 도와주는 다정다감함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여자 형사 르탕쿠르이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렸을 법한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그녀는 어디에서든 적응력이 뛰어나며, 지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에 행정 처리 능력도 우수하고 몸싸움에도 지지 않는데다 사격 솜씨 또한 일품인 강력계의 다재 다능한 대들보이다. 특히나 그런 그녀의 에너지를 불가시성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은 가히 놀라울 만한데, 작품의 후반부에 그녀가 아담스베르그를 어떻게 돕는지 그 활약은 정말 멋지기 그지 없다. 뿐만 아니라 퀘백에서 만난 상스카르티에, 아담스베르그의 오랜 친구인 클레망틴 할머니와 그녀의 절친인 할머니 해커 조제트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이 두 할머니의 역할은 이 작품에서 매우 놀라운 분위기 전환과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아 정말 이 두 할머니는 너무 사랑스럽고 흥미진진한 캐릭터이다.

 

대부분의 범죄, 스릴러, 추리 소설들을 읽으면서 책장들을 다시 휘리릭 넘겨보며 놓쳤던 단서와 복선과 디테일들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읽을 때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정교한 플롯과 탁월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이야기지만, 페이지마다 너무도 여유롭고 침착하게 진행이 되어 그것들을 인물들과 함께 고스란히 즐기기만 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레 막바지를 향해 속도를 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만 않는다면, 읽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만나더라도 그 어떤 단서도 놓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책은 그 동안 꽤 많이 출간되었었다. 물론 현재는 모두 절판 상태지만 말이다. 우선 아담스베르그 서장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 그리고 이번 <트라이던트>의 바로 전 작품인 <4의 비밀>이 있고, 다른 시리즈 작품인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도 있다. <트라이던트>는 지난 2008년에 <해신의 바람 아래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의 개정판이고,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도 올해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될 예정이다. 아담스베르그 서장 시리즈의 가장 최신작(그래 봐야 2011년 작이지만)은 작년에 비채에서 출간되었던 <죽은 자의 심판>이다. 9권의 시리즈 중에 국내에 출간된 것이 4권이니, 나머지 시리즈도 곧 출간되기를 기다려본다. 특히 시리즈의 최신작이 바로 작년에 출간되었으니, 국내에도 최신작부터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아무래도 그 전에 원서부터 사 모으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지만, 아담스베르그 시리즈의 다음 작품을 빨리 국내에서 만나보고 싶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이야 말로 내가 왜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는지 제대로 이해할만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누가 범인인가' '대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국내 출간된 추리, 미스터리 분야의 소설이 이백사십 여권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 내가 읽은 책이 팔십 프로가 넘는다. 거의 매년 그렇게 해왔으니 꽤 많은 책들을 읽어 온 셈이다. 그런데 그 어떤 작가도 프레드 바르가스처럼 쓰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소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구성, 배경, 등장인물이 완벽하게 조합되어 있는 기막히게 멋진, 아름답게 쓰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가.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만나보라. 특히나 그녀의 작품 중에 <트라이던트>는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당신도 무조건 그녀에게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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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3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의 원제와 출간연도를 꼼꼼하게 정리한 글이 좋습니다. 이런 정보가 있어야 독자는 특정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

피오나 2016-03-31 19:00   좋아요 0 | URL
하핫. 감사합니다ㅎㅎ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수요가 있어야 새로운 책들이 계속 번역 출간될테니까요^^

ICE-9 2016-03-3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프레드 바르가스의 팬이셨군요. 반가운데요, 저도 팬.
오, `해신의 바람 아래서`와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가 원래 저런 표지였군요. 저게 초판본이겠지요. 제 것은 파란 동그라미 사나이와 같은 디자인인데, 아무래도 나중에 통일되었나 보군요. 그건 그렇고 작년 국내 출간된 미스터리의 80%를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도 부지런히 읽어야될텐데...ㅠ ㅠ;

피오나 2016-04-01 08:43   좋아요 0 | URL
하핫. 역시 헤르메스님도 프레드 바르가스의 팬이시군요ㅎㅎ 저야 워낙 특정 장르에 편중된 독서를 해서 그렇구요. 헤르메스님처럼 폭 넓게 읽는게 더 어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