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너리스 1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균형을 상징하는 천칭자리이다. 연애나 친구관계, 금전적인 면 등 모든 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무슨 일이든 극단적으로 달리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단다.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누군가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재미로 운세를 보거나, 별자리 점을 보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개의 별자리로 각각의 성격을 규정해서 캐릭터를 만든다면 어떨까. 엘리너 캐턴의 이 작품 <루미너리스>는 바로 그러한 매혹적인 상상을 정교하게 건물로 구축한 소설이다. 2013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그녀는 무려 스물여덟의 나이로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작가로 등극하게 된다. 게다가 원서 832페이지로 역대 가장 긴 작품으로도 맨부커상의 기록을 갱신한다. 국내 번역본 역시 두 권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다. 페이지를 빠르게 주르륵 넘겨서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꺼운 분량은 이 책을 완독하는데 굉장한 부담을 주고 있다. 자고로 재미있는 책은 기본 500페이지 이상의 두툼한 두께를 자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만만치가 않았으니 말이다.

활동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주는 임무를 맡으면 처음에는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해 몰두하는 법이다. 하지만 토마스 발퍼의 에너지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스스로 계획했던 것이 아닌 경우에는 오래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조급함으로 바뀌고, 낙관주의는 넘치는 게으름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그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시작하는 타입이었다.

1866년 뉴질랜드의 금광 호키티가 마을, 무디는 갓스피드호를 타고 금을 찾아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크라운 호텔에 묵게 된 그는 우연히 호텔 흡연실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두 명의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고 배 안의 화물칸에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내향적으로 변했고, 그답지 않게 방 안의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이곳의 은밀한 회의 같은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토머스 발퍼를 통해서 그는 그곳에 모인 열두 명의 남자들이 특정한 의문과 그것으로 인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어떤 창녀, 그리고 젊은 갑부의 행방불명, 살해된 부랑자의 집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 무디는 자신이 타고 왔던 갓스피드호의 선장 프랜시스 카버가 의문의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열두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듣게 된다.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열두 명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려 500여 페이지 가깝게 들려지는데, 정리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고 있어 몰입을 하려면 꽤나 애를 써야만 한다. 1권의 마지막 즈음에서야 토머스 발퍼의 이야기를 끝으로 무디가 스스로 사건을 정리하는 식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봐주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하다. 앨리너 캐턴은화자의 역할을 하는 무디가수성을 대표하며, 따라서 수성이 관찰되는 시기에 맞춰 그가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구성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요 인물인 12명의 남자는 각각 황도 12궁을 대표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별자리에 맞는 성격과 특성을 지니고, 나머지 인물들은 행성에 속해 이들 사이를 넘나든다. 물론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천체의 흐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걸 체감하려면 치열한 조사와 고민을 했을 작가만큼, 독자 역시 메모를 하거나, 각각의 비유와 상징들을 구분해서 기억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긴 하다.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 1권보다 조금 더 두꺼운 페이지를 자랑하는 2권에 이르면,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배경 설명이 계속 이어져 다소 장황하고 집중하기 어려웠던 1권에 비해, 2권은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반전이 등장해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음모들이 마치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각각의 장마다 구분되어 있는 별자리의 특성을 인물들과 결부시켜 보면, 이 작품의 이야기는 더욱 매혹적으로 변신한다. 크게 한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금을 찾아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는 현대의 우리와 닮아 있다.

제목인루미너리스luminaries’는 점성술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두 별인 해와 달을 뜻한다고 한다. 별들이 가장 찬란하게 그 빛을 발한 뒤 소멸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좇는 것도 결국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마는 허황된 꿈 혹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순간이나 바닥 끝까지 추락해 스스로의 삶에서 밀려나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일지라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들의 절실함은 누군가의 탐욕으로 핏빛으로 물들고 말지만 말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들 별자리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당신에게 그 숨겨진 비밀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지만, 이 두터운 책을 시작하려면 어느 정도 각오는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속에서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3-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내용이 지루해서 한번은 이 소설을 선정한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의 생각을 의심했습니다. ㅎㅎㅎ

피오나 2016-03-09 14:32   좋아요 0 | URL
하핫.저도 너무 지루해서..페이지가 안넘어가더라고요. 읽는데 한참 걸렸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