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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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책 대체 뭐지?'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한 남자의 일생이 주르륵 펼쳐지는데, 밑줄 긋고 싶을 만큼 화려한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사도 없고, 극적인 전개도 없는데, 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올라온다. 대체 뭔데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걸까 싶어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필사를 하면서 머릿속에 다시 새겨두고 싶어졌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을 담담하게 펼쳐놓는 스토리를 내가 원래 전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 나는 복잡한 구성과 스릴 넘치는 구성과 화려한 묘사에 매혹되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소박하고 겸손(?)한 작품에 사로잡히다니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였다. 처음 책이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잊혀져 있다 출간 후 50년이 되어서야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하는데, 어쩐지 그 이유가 짐작이 된다고 할까. 그럴 만큼의 묵직한 감동을 숨기고 있는 조용한 작품이다. , 뭐라고 더 이 책의 훌륭한 점을 짚어내어 설명하고 싶지만, 사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도 이 책을 직접 읽는 것만큼의 감동을 전달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꼭 직접 읽어보아야만 한다. 이제 겨우 1월인데, 어쩌면 이 작품이 내 마음을 흔드는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스토너가 느끼는 이 감정은 그의 성격과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보여주는 대목 중의 하나이다. 아내인 이디스가 친정에서 엄청난 돈을 빌려와 집을 구입한 것은 스토너에게 거의 파괴적인 부담이 었다. 그래서 월말이면 항상 돈이 부족했고, 여름학기 강의를 하며 모아둔 예비비가 매달 꾸준히 들었다. 집을 산 첫해에 그는 이디스의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날짜를 두 번이나 놓쳐 차갑게 꾸짖는 편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는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 점점 기뻐져 그것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위안을 얻게 된다. 그래서 빚과 궁핍이 정기적으로 거듭 압박을 가하는데도 그는 몇 년 동안 행복했다. 아내인 이디스와의 관계는 그가 신혼 시절 꿈꿨던 삶과는 전혀 달랐고, 딸에게 관심이 없는 아내 대신 여전히 그가 딸을 돌보는 일을 대부분 맡고 있었지만 말이다. 살아가는 일이 사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꿈꿔왔던 기대들은 거의 배신당하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은 항상 생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는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그의 동료들이 모두 입대를 하고 스토너만 남겨져 지도 교수에게 실망스런 이야기를 들을 때도, 결혼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결혼이 실패라는 걸 깨닫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릴 때도, 그는 그저 말없이 주어진 상황을 견뎌낸다. 찰스 워커가 영문과 대학원 과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던 싸움이 실패로 끝났을 때도, 로맥스 교수와의 불편한 관계도, 캐서린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이 끝나갈 때도 그는 그저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물론 캐서린과의 사랑이 끝나버린 후 생애 처음으로 병을 앓고 급속히 늙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레이스는 가끔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커다란 서재에 앉아 아버지가 채점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많았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을 걸면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찌나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였는지, 윌리엄 스토너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부드러움에 감동했다.

이디스가 친정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떠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스토너는 친정어머니와 2주 더,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지내게 될 것 같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렇게 그녀는 거의 두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었고, 스토너의 큰 집에는 그와 딸 둘뿐이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이스는 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아침 스토너는 아이를 준비시켜 학교에 보냈고, 오후에는 아이가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춰 대학에서 돌아왔다. 엄마가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가정에서, 아빠와 딸의 관계는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조용하고 명랑한 그레이스는 제 아비에게 향수에 찬 경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들에서 기쁨을 찾아냈다> 같은 표현들은 그들 부자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가 위층에서 안전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같은 대목들은 스토너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그가 처해진 상황은 어찌보면 불행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그 속에서 행복과 위안을 느끼며 그저,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내면에서 자라나는 지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모습에서 놀라움과 사랑을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연히 군청 직원의 권유로 농업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던 스토너. 우연히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만나게 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그가 영문학도로서 평생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남들처럼 연애하고 결혼하고 교수가 되지만, 결혼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라 아내와는 거의 대화 없이 지내고, 교내에서도 출세나 권력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그저 자신만의 학문을 할 뿐인 그는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간다. 그러니 평범한 주인공이 그의 앞에 나타난 장애물들을 헤치고, 역경을 극복하는 통쾌한 스토리도 없고, 묵직한 가르침을 주려는 현학적인 묘사도 없고,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의 전개도 전혀 없다. 그냥 한 인물이 태어나 자라, 누군가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는다.의 스토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네 평범한 삶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범하고 소박 함들이 쌓여서 이루어내는 효과는 엄청나다. 스토너의 이야기는 나의 삶이기도 하고, 당신의 일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각각 살아가는 모습들은 전부 다를지라도, 이상하게 스토너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감동은 책을 읽는 순간이 아니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파도처럼 몰려온다. 올해 당신이 꼭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을 묻는다면, 단연코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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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인용문 때문에 엄청 읽고 싶어졌어요, 피오나님. 박스 안의 것과 또 리뷰 중간에 옮기신 문장들도요. 조용하고 아름다운 책인 것 같아요.
:)

피오나 2015-01-28 21:32   좋아요 0 | URL
저도 종종 다락방님이 옮겨 적으신 글들 때문에 책을 사곤했어요 ㅋㅋ 이 책 너무너무 좋아요! 다락방님도 꼬옥 만나보시길..다락방님이 쓰신 리뷰도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