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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나는 삶이 고통스럽거나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이 소설 속 빵집 주인이 건넨 한 덩이의 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빵을 건네는 이의 마음으로 허공에 작은 빵집을 짓는다. 젊은 부부에게 온기를 전하는 빵집 주인의 마음으로. 어딘가 있을 당신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들을 건네기 위해서. p.22~23
어릴 때부터 워낙 빵을 좋아해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빵을 먹으면서 살아 왔지만, 그 중에서도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특별한 빵이 있다. 말린 과일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슈거파우더를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만드는 음식 중 하나인 슈톨렌이다. 이 빵은 갓 구운 것보다는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서 2~4주가량 숙성시킨 후 먹는 것이 좋은데, 그래서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슈톨렌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 이 빵을 처음 먹었을 때는 럼향 가득 품은 달콤하고 쫄깃한 건과일의 맛과 꾸덕하고 깊은 풍미에 반했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달콤한 꿀과 럼주에 건과일들을 숙성하는 기간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라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정상을 들여서 만드는 빵이라는 점과, 그만큼 여타의 빵과는 달리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슈톨렌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슈톨렌을 미리 주문했고, 12월을 앞두고 도착한 슈톨렌을 얇게 조각 내어 먹으면서 백수린의 신작 산문을 읽었다. 달콤함과 담백함 사이의 깊은 풍미와 묵직하고 건강한 맛이 커피와도 홍차와도 참 잘 어울리는 빵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맛있는 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근사한 책이 나의 오늘 하루를 또 버텨내게 해주었다. 다정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위로 받고 또 용기를 얻으면서, 나는 그렇게 소중한 책을 또 한 권 만났다.
이 책은 어느덧 등단한 지 10년 가까이 된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다. '경향신문'에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책 굽는 오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소개하기 위해 연재했던 짧은 원고들을 수정, 보완하고, 거기에 새롭게 쓴 글들을 더했는데 '책'과 '빵'에 대해서 가볍고 경쾌한 마음으로 썼던 글들이라고 한다. 가볍지만 너무 따뜻하고, 경쾌하지만 뭉클하고,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고, 맛있는 그런 글이라 읽는 내내 설레이는 마음이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p.227
백수린 작가는 '빵집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전히 책을 읽다가 빵이 나오는 구절을 만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그 책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곤 한다고. 아마도 대부분 빵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방까지 빵집 투어를 다니고, 해외에 가서도 베이커리 맛집은 빼놓지 않고, 사다 먹는 걸로도 부족해 베이킹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고, 급기야 오븐을 사서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고, 주변에 선물도 했던 터라 나 역시 그랬다. 빵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 책은 일부러 찾아 읽고, 누군가 빵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일단 호감부터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페이지 곳곳에 빵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이 책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단순히 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빵을 곁들이는 식이라 더 근사했다.
오랜 시간 반죽을 숙성시켰다가 구워야 하는 캉파뉴와 소박하지만 풍미 깊은 마틴 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 노래>, 뉴욕의 대표적인 유대인 먹거리인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는 필립 로스의 <울분>과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만 있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은 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에서 만날 수 있는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일본인들이 유년 시절 즐겨 먹는 가장 흔한 빵인 멜론빵과 제임스 설터의 소설들은 예술품처럼 완벽한 형태를 지닌 티라미수, 그리고 침니 케이크와 아고타 크리스토프, 슈톨렌과 로맹 가리, 바나나 케이크와 윌리엄 트레버, 롤케이크와 켄 리우, 옥수수빵과 존 윌리엄스, 단팥빵과 앨리스 먼로 등등.. 갓 구운 빵의 온기만큼 따뜻한 글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일을 빵의 반죽을 빚고 굽는 일과 함께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공감되고, 이해되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그날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알맞은 차를 끓이고, 티푸드나 초콜릿을 준비한다는 것도,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는 시간 동안 소설을 시작했던 그 초심의 마음을 불러온다는 것도 그녀의 작품만큼이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고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한다고 했는데, 그 다정한 온기가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전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만큼, 나쁜 소식투성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지기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