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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보라색 치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궁리하는 사이 점점 시간만 흘러간다.
느닷없이 말을 거는 건 이상하다. 아마 보라색 치마는 지금껏 한 번도 “저랑 친구 하실래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지 않을까. 그런 식의 만남은 부자연스럽다. 헌팅하는 것도 아니고. p.15~16
동네에 '보라색 치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보라색 치마를 입고 다니는 그녀는 대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상점가 빵집에 크림빵을 사러 간다. 그리고 공원으로 향해 '보라색 치마 전용석'이라 불리는 벤치 한가운데 자리잡고 막 사온 빵을 먹는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나'는 이른바 '노란색 카디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쉽게도 '보라색 치마'와 달리 '노란색 카디건'은 그 존재를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보라색 치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그녀가 내 언니를 닮은 것 같다고, 전직 피켜스케이팅 선수인 방송인을 닮았다고, 그러다 초등학교 친구 메이를 닮았다고 생각해보다 전에 살던 동네 마트의 캐셔 여자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백수일 때는 어느 곳으로 면접을 보러 가는지에 이르기까지 지켜보는 중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다니는 직장의 구인광고가 나온 전단지에 표시를 해서 그녀의 전용석에 몰래 갖다 놓기에 이르고, 결국 그녀와 같은 호텔에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객실 청소원으로 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친해지기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 조차 나누어보지 못했다. 어딘가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직원들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해 어수룩해 보였던 '보라색 치마'는 점점 새로운 일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정상적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오히려 화자인 '나'의 모습에서 불안한 점들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사실 '나'의 행동들은 모두 완전히 낯선 상대를 '스토킹'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보라색 치마가 객실 청소원이 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좋건 나쁘건 직장생활이 몸에 익었는지도 모른다. 왠지 쓸쓸한 기분도 들지만 별수없다. 여자가 대다수인 직장에서 화제에 오르는 건 대개 누군가의 뒷담화니까. 관심이 없어도 있는 척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쉴새없이 대상이 바뀌면서 뒷담화는 계속된다. 늘 누군가가 누군가의 얘기를 한다. p.79
이 작품은 2019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이 상은 일본 현대문학의 지표이자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로 통하는데, 이마무라 나쓰코는 현재 일본 문단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가벼운 분량에다 담백한 문장으로 앉은 자리에서 금방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상한 건 책을 다 읽고 나서의 기분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그런데 이게 뭐지? 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대부분 화자가 생각하는 대로, 화자가 보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스릴러 장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장치인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방식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극 초반부터 '보라색 치마'라는 도시전설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인물을 화자인 '나'가 지켜보고, 친분을 갖고 싶다는 선망을 가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렇게까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왜 '나'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관계가 되어서까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는 걸까, 이상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 혹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보통 인간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는 것도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일상을 염탐하고, 주위를 맴돌며, 관찰을 넘어서 집착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있다. '나'라는 인물이 하는 행동은 다소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고, 상식적인 수준을 살짝 넘어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느 순간에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이상한 점일지도 모르겠다. SNS 등을 통해서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일상화가 된 현대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매력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