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살인자들까지
보호한다면?"
"아가야,
내 나이엔 그 무엇도 위험이랄 게 없다는 걸 아느냐?"
벤투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100세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녀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허리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할머니를 어떻게 굽히게 한단 말인가? 이 심문의 길도 평탄치 않고 꼬부라질 조짐이
뚜렷했다.
p.41
이야기는 102세 할머니와 경찰의 대치 상황에서
시작된다. 베르트 할머니는
자기 집을 포위한 경찰들에게 총을 쏜다. 정확히 스물두 방, 그리고 법무사 이웃의 엉덩이도 쏘았다.
수사관 벤투라는 자신의 경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중이다. 총기와 범상치 않은
입담으로 무장한 이 빠진 노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2차 세계대전부터 두 차례 전쟁을 겪었고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나치 군인과 가정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거침없이 죽여버렸다. 이 작품은 현재 경찰서에서 할머니의 험한 욕설과 유머가 뒤섞인 취조 과정과 그녀가 태어났던 1914년부터 과거 회상 형식으로 교차
진행되며 102세 할머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00년을
관통해온 킬러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누아르와도 같았다.
베르트 할머니는 전날, 도망자인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들여서 먹을 것을
주고 보살펴 주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도망자가 된 사연이 그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 폭력적인 전남편을 피해 여자를 지키려다 남자는 그를 살해하게
되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베르트는 죽고 못
사는 두 연인에게 꿍쳐둔 현금도 쥐어 주고,
자신의 자동차 열쇠도 넘기며 그들의 도주를 도왔고, 그 결과 이렇게 경찰서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주 중인 두
남녀를 쫓던 경찰은 황당하게도 불법무기를 소지하고,
경찰에게 총질을 해대는 황당한 할머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할머니의 자백을 듣다 보니 그녀가 이미
세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하실에서 시신 일곱 구가 발견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체
102세 할머니의 집 지하실에 사람 뼈와 동물 뼈가 가득 널브러져 있었던 이유는
뭘까. 어떤 취조에도 능청을
떨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이 할머니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자,
다시 시작할까요?
시신이 총 일곱 구가 발견됐고, 부인은 세 차례의 살인을 자백했어요. 나치 한 명과 두 남편. 나머지 네 명은 누구죠?"
베르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장난은 끝났다. 그들의 뼈가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고약한 기억들을 다시
파헤쳐야 했다.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뭐가요?"
이번엔 100세 노인의 목소리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괴물들이라고.
또 다른 괴물들." p.202~203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시작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그리고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까지 노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작품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노년의 주인공들이 굉장히 매력있고, 개성 넘치게 등장했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 만난 102세 베르트 할머니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연쇄살인범에 괴팍하기 짝이 없는 독설가라는 캐릭터도 흥미롭지만,
할머니의 삶 뒤편에 있는
'모든 폭력적이고 저급한 남성들에 대한 응징'을 보여주고 한 작가의 시선이 더욱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 법과 정의를 믿으며 살아왔던 벤투라
형사가 베르트 할머니를 취조하면서, 자신이 항상 존재한다고 믿었던 법과 정의가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것 또한 독자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실제 현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라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가부장, 여성 혐오를 깨부수는 속 시원한 블랙 코미디로서도 매력적인 작품이고, 그 익살스러운 유머 이면에 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과
횡포, 아동
학대, 사회적 약자 비하라는
주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페미니즘 스릴러로서도 멋진 작품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유쾌하게 즐겁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