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시장에서 장사하는 한 상인의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다. 나라의 대통령이 왕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나타낸다. 엄연히 대통령이라 함은 국민의 선택을 통해서 선출되어 권력을 위임받은 권한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다. 그래 공무원. 선출직 별정 공무원. 별정이란 별도로 법률로 정해진 직분이라는 뜻일 테고, 왕은 선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왕은 신분상 물려받을 뿐이다.
물론 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먹고살기 바빠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공부도 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저 선거하라니 선거하고 누가 찍으라니 찍을 것이고 먹고살고 장사하며 사는 고민은 했어도 내가 살고 있는 체재의 존재 근거에 대해 고민 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왕이라고 착각하는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헌법 1조. 고등학교 정경 시간에 나온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민주주의를 모토로 삼는 공화국이라고 했다. 대체 공화국의 공화는 무엇을 말할까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공화의 국가. 공화의 의미를 따져 물어 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이 나라는 왕이 통치하는 왕정제의 국가처럼 착각을 한다. 공화춘 짜장면 이라면 헛다리 짚는 꼴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이다. 왕이 결코 아니라는 전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선거이든 상속이든 어쨌거나 최고 수반이라는 인식을 그저 봉건시대의 왕이라는 의식 하나만 남았다. 그러니 대통령이 왕이라는 오류를 생각한다. 대통령이 공무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국에서 법률로서 정해진 절차에 의해 선거이든 임명이든 선임이든 모든 직분은 공무원이다. 또 이에 등달아서 공화국의 사람들은 백성이나 신하가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와 백성의 권리와 의무는 전혀 다르다. 백성에게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백성에게 베푸는 시혜가 권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화국의 국민이 여전히 백성이나 신하처럼 착각한다. 분간도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착각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구성된 나라에서 여전히 왕과 백성처럼 혼돈할까? 이성의 기본 전제인 지성이 빠졌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투표는 왜 하는가. 국민의 선택에 대한 기준을 왕으로 구분할 것인가? 이미 기본적인 전제조차 빠진 생각이라면 결과는 대통령을 왕이라 착각한다. 아직도 여전히 그들은 조선시대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체제와 현상을 파악하는 데는 책만한 것도 없다. 물론 강의를 듣고 전문가들에게 질문하고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식을 얻기도 좋겠지만 이는 장소와 시간의 제약 때문에 다량의 많은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 그러나 책은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하다못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도 책이란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현상의 물결은 헤쳐 나가야 한다. 어느 시장을 돌아다녀 봐도 막상 먹고살기 바쁘고 장사해서 돈벌이 해야 하는 일에 한편에 틈틈이 약간의 공백시간에 책이라도 들여다볼 정신은 없다. 하기야 어느 장사 집에 책이라도 한 권 비치해놓고 틈틈히 읽어야 할 여건이 되지 못하는 변명이야 늘 일상이다. 정보와 지식이 차단당한 우민은 결국 맹신적인 틀린 믿음을 낳기 마련이다. 겨울철 시골 어르신 집에 보일러만 놔서는 안된다. 인터넷도 놔야 하고 늙어서라도 최신 트렌드에 부합된 정보와 지식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늙어갈수록 고집은 평생에 겪은 경험이 전부라면 요지부동이다. 변화에 둔감하고 바뀌는 것에 저항한다. 세상은 나날이 달라지는데 여전히 모습은 조선시대의 상투른 머리로 오늘을 바라보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보는 사람은 고역스럽다.
나이가 먹어가고 점점 노화의 현상이 나날이 늘어간다. 젊음은 어느덧 서서히 풀이 죽어가고 늙음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 간다. 지능의 기억력도 예전 같지도 않고 새로이 습득하는 정보는 곧잘 새겨지기도 전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망각의 강에 빠져 버린다. 그러니 이런 변화에 대하여 스스로가 변신을 하지 못하면 뒤처지고 멍청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대하여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체념은 시간의 체념과는 다르다. 흐르는 시간을 어쩌지 못하는 한계에서 결국은 스스로가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비록 흘러버리는 지식일지라도 한 오랜만이라도 붙잡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오래전 조상들의 가르침이었다. 늙어서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결국 자신을 이 변화에 맞춰가는 것일 테다. 아마 지식은 더더욱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확대시켜할 생존의 덕목이자 필수가 아니겠는가? 늙어갈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하지만 지갑도 물론이겠지만 일단 책을 열어야 한다. 눈이 점점 침침해져서 글씨가 멀어져 보여도 더더욱 바싹 앞당겨서 학습의 과정을 놓쳐서는 안된다.
지난 일요일. 거울을 보니 검은색 머리카락이 흰 머리카락으로 탈색이 점점 더 심해졌음을 느꼈다. 늙음이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라서 염색을 했다. 그러나 고정관념처럼 검은색의 염색을 하지 않고 아예 차라리 흰머리가 어울리게 갈색. 노랑에 가까운 갈색톤으로 염색을 해버렸다. 물론 머리카락도 요즘 유행하는 투불럭의 귀두 컷?으로 했다. 뭔가 어색하고 누가 혹시나 뭐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내가 내 모습의 결정권이 있는데 누가 지랄을 하든 말든 그들의 상관도 없을 테니 신경 쓰지 않기로 한마음을 먹자마자 전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아예 더 파격적인 머리를 하고 싶은 욕구. 중년의 패션을 아예 리드하고 싶은 파격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젊음은 자신을 끝없이 가꿀 때에만 퇴색되지 않는다. 자신을 가꾸는 일에 게으른 노인네는 되기 싫었다. 늙어 갈수록 노인네들의 몸에서 나오는 퀴퀴한 냄새, 일본어로는 가령취라고 한다. 노폐물, 각질의 산화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늙어서 나는 분비물 피지 등에서 나오는 냄새이다. 그러니 더 청결하게 씻고 바꾸지 않으면 자신은 모르지만 옆에 누군가에게 악취를 내게 된다. 삶의 지식도 마찬가지고 경험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음을 못 느낄 따름이다. 지식이 없는 경험은 공허하다는 것도 알 수는 없다. 생존의 경험으로 모든 오늘의 시간을 헤아릴 수도 없다. 전부가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 늙어서 고집이 세지고 물건에 집착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바들바들 떨며 쉽게 정리를 하려 들지도 않는다. 결국 이런 노인네가 자식들과 사회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를 바라볼 때 현재의 자신이 하고 있는 모습은 초라하다. 향수도 팍팍 뿌리고 향긋한 내음으로 지성의 품격을 뽐내고 그렇게 해서 지갑이라도 팍팍 열어 자랑하는 노인네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나도 그렇게 자랑질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즉 이 변화에 대해 스스로가 변화의 긍정을 행동으로 나올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내 존재의 삶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 이것이 죽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지난 주에 오프라인 강의 수료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자 승급 교육은 별도로 다시 다른 강좌 수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주 또 신청하고 온라인 강좌 수강중입니다. 이거 또 틈틈이 서재를 보도록 하겠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