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나 친구와 만나는 것에 대해 누군가 감시자, 혹은 보호자가 항상 따라붙는다면 눈치를 보게 되고 의식하게 되니 정상적인 관계 맺기는 어렵죠. 일거수일투족을 다 까발려야 한다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학교 다닐 때 급우들 간의 친구 맺음, 대학 다닐 때 동아리 활동이나 각종 스터디 활동, 이런저런 대내외의 감투를 쓰고 나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관계 맺기에 일환이고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사회성이란 이렇게 관계성에 따른 기회에서 나옵니다. 이게 차단되어 있다면? 통제받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기대게 되고 특히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굉장히 한정적이게 됩니다. 특히 이런 경우에는 마음을 주는 사람이 자칫 못된 생각을 하고 이용하려 들면 거의 넘어가는 편입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직장을 다녀 보거나, 내 손으로 무언가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대해 부담이 전혀 없다는 것. 어떤 것을 하더라도 옆에 누구가 항상 보필 받고 서포트를 받으며 귀족적이며 마치 시녀들이 항상 따라붙으며 대우받고 대접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때, 흔히 말하는 입장 바꿔 생각하는 힘은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성격은 독선적이고 아집적이고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맞는다고 확신하거든요. 그나마 책이라도 많이 읽고 지성이라도 갖추면 다행이지만 사실 먹고사는 일 자체가 없으니 공부할 이유도 없고 배워야 할 마땅한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인간으로써 배움이라는 것이 꼭 먹고사는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이와 관련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은 이것에 자유롭다면 굳이, 애써 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폐쇄적이고 은둔적이고 장막을 치고 가리려 할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 나 내뱉습니다. 이산화 가스 같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아주 특이하고 특별한 불행한 가족사입니다. 어미가 총 맞아 죽고, 아비가 총 맞아 죽는 충격은 상상도 못할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더욱이 아비는 제일 신임하던 직계 부하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어미 또한 총을 쏜 사람의 집단을 상당히 미워할 것이고요. 이것이 대북 정책으로 나타나죠. 미운 원수의 집단과 무슨 협상도 대화도 타협도 불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폐쇄적이고 닫혀 있고 관계 맺기에 상당히 소극적인 사람에게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입니다.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논리가 적용될 믿음이란 없습니다. 하물며 수학의 1이란 숫자조차도 믿으려 하지 않겠지요. 피해 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항상 해칠지도 모르는 불안감은 삶의 전체를 지배합니다. 폐쇄적이고 불통이고 닫혀 있는 것이 이렇게 나옵니다. 심지어 형제마저도 불신합니다. 이런 극심한 상처받은 성격은 미신이나 샤머니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군가 종교적 미신적으로 꼬드기면 그 상처를 부추기고 의지하게 하면 그야말로 푹 빠집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그 사람과 대화에서 대강의 수준과 삶의 방식을 유추합니다. 어떤 주제의 대화에서 무슨 단어를 쓰면서 표현하는 것일까라는 부분에서 대화의 구술적인 단어는 심리적인 배경을 약간이라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언어에 있어서 자기 말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시대명사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래서 저래서 라는 것이죠. 문제는 그래서 그게 뭔지를 개념으로만 파악하고 개념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못 합니다. 그러니 언어의 논리에 있어서 정의, 혹은 단어의 정의가 맞지가 않게 됩니다. 수학 공식에 있어서 사각형이란 개념은 두 변의 길이가 같은 것이란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전제가 있거든요. 절대 추상적이지 않고 확실한 규정됨입니다. 그러나 대화에서는 이 정의하기 자체가 없다면 무슨 말을 해도 논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시 대명사만 있을 따름입니다. 거시기 해서 거시기하고 거시기로 거시기해라 따위의 사고방식은 대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토론이 안됩니다. 흡사 사차원 같은 말만 합니다. 혹시나 어떤 상관이 이따위 지시를 하게 된다면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집행하는게 여간 어렵지 않거든요. 그러니 받아 적어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심리적으로 분석해서 무슨 뜻인지 해석하고 만이 이해하고 집행이 가능하니까요. 다 못받아 적을 경우 녹음까지도 해서 재차 반복해서 들어서 풀어서 적어봐야 합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병원에 빨리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그런데 일반인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입원해서 치료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정부에 수반이 되고 각종 정책을 판단하고 집행에 결제할 권한이 있다면 아파서 장기간 치료해야 하는데 과연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이익이 충돌할 때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도 권력에 누수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국가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국민들을 사찰하고 심지어 고문했던 그런 시절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상태를 지금도 똑같이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요?
피눈물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피눈물의 말? 피눈물의 심정을 안다는 게 아니라 피눈물의 말을 알겠다요. 웃기잖아요? 어미가 총 맞아 죽고 아비가 총 맞아 죽었던 과거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서라도 피눈물의 말을 이해한다는 게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아니라면 말실수와 언어 사고 체계의 오류가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4월 16일이 수요일이었습니다. 수요일 휴무 잡아놨다면서요? 아이들이 배에 갇혀 죽어가는데 머리 올릴 정신이 있습니까? 상식적으로도 사람이 죽어가는 위기 상황이라면 그 어떤 일을 다 제쳐놓고 당장에 그 구조의 모든 조치를 내려야 할 가장 강력한 명령권자입니다. 왜냐면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지고 재산을 지키고자 그 자리에 있겠다고 선서까지 하고 나온 자리입니다. 그저 일반 아줌마들처럼 자기 집에서 머리카락 매만지고 화장하는 걸 가지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굳이 말해야 할 만큼 상식적이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정도쯤이면 거의 정신병적인 현상이거든요. 그래서 결론은 병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심각한 내상을 가진 채로 아픈 줄도 모르고 퉁퉁 부은 얼굴로 초로를 감춘 환자입니다. 국민이 다 아픈 겁니다. 고통은 전이되거든요. 고통은 치료하지 않으면 그냥 가만있지 않거든요. 온통 퍼지고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래서 국민이 다 아프게 되는 겁니다. 박*모의 종교적 매몰형 정신병으로 퍼지고 집권당하겠다고 옹립한 정당도 아프게 되고 다른 촛불든 국민도 아프게 되는 거죠. 또는 누군지 아는 사람이 투표해서 찍은 사람의 실망감도 고통일 것입니다. 그럴 줄 몰랐다는 무지함과 배신의 상처가 또 생기고 깊어졌거든요. 그래서 다 아프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빨리 치료하면 될 텐데 왜 이럴까요?
네, 누군지 아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