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저런 걸로 따져도 역시나 사진의 가장 큰 주제가 사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 들고 사람에게 들이대는 것이 상당히 주저되는 것도 오늘의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함부로, 섣부르게 카메라로 사람을 담으려 했을 때, 아무리 선의로 한다 하더라도 생기는 오해와 갈등이 있어서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풍경이나 찍으며 사람의 모습과 사유를 은유로 대신하기도 한다.
비교적 오래전 사진을 보면, 사람을 찍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시절이, 카메라 기계가 발전된 오늘날 보다 사진에 있어서 만큼은 훨씬 더 자유스러웠다. 지금의 사진 활동이나 영역이 예전에 비해 한층 고도화되었다 할지라도, 사진의 기본적 휴머니티는 오래전 사진만 못하다. 이제는 사람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는 웬만한 정성과 친분과 시간과 기회적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어렵다. 사진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가 증거의 능력이다. 특히 사회가 비정상적일수록 사진은 고발의 증거로써 아주 유용한 증명이었기도 하다. 위법적인 행위와 탈법적 행위에서 사진은 이 위법성을 증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니까. 대표적인 게 파파라치와 같이 고발성의 성격을 사진으로 남길 때, 무엇인가 밝혀지기가 두려울 때,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다. 사진에 찍힘으로써 그 증거력이 올라가고 따라서 사진에 찍히게 되면 들킬 수 있을 때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의 목을 조르려 멱살을 잡는다. 윤동주 시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을 그리워했었다고 시로 노래했으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파파라치처럼 만들어진 사진의 증거력은 오히려 사진의 자유를 축소시켜 버렸다.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사진에 찍힐 때 미소를 짓게 되고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는 가리려 하고 숨으려 한다. 밝혀짐에 따라 불이익을 받을까 염려에서 나오는 행동들일 것이다. 부끄러움이나 불법적인 행위에 있어서 사진은 그야말로 예술이 아니라 까발려져 버리는 고발용이 되어 버린 탓이다.
한때 시장에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으나, 어느 때부터는 시장에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게 되었다. 시장 상인들의 위생이나 가격 등의 정보가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많았으니 찍어 봐야 무슨 도움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나 비슷하다. 치부라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감출려고 하고 사진을 싫어하며, 조금이라도 자랑하고 홍보를 위해서는 사진에 찍히어 알려지기를 원한다. 마치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잘한다고 사진을 찍고 대문짝만 하게 보고서에 사진으로 도배를 하는 걸 보면 사진의 용도라는 것이 은폐용으로는 적이 되고 홍보용으로는 아군인 셈이다. 길에서도 함부로 사진을 담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다. 지나가는 남자나 여자를 동의도 없이 찍었다가는 초상권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성형이 일상이 된 정서에서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진을 찍으면 여유롭게 뽐낼 것이고 반대로 스스로가 자신 없는 얼굴이라 여기면 한사코 가리기 바쁘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사진을 찍히는 사람도 어쩌면 이 사진에 대한 관념과 자신의 처지와 입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주관적으로 사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에 셀프 사진은 도배를 해도 누군가 남이 자신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고소감이 되는 것도 사진의 찍는 주체와 찍히는 주체의 충돌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찍든 남이 찍든 얼굴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보통은 이 양태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는 사진은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무기가 된 거다. 사진 한 장 찍어 멱살 잡히지 않으려면 예수라도 된 듯이, 세상의 사람에 대해 어설픈 이론을 사진에 붙이는 것도 현실에서는 먼 이상 같은 소리일 따름이다. 사진은 인문학이기 이전에 이미 일종의 욕망의 표현이다.
사진은 단 한장을 보더라도 많은 사실을 암시한다. 프레임 안의 풍경이 프레임 밖의 상황을 직접 보이지 않아도 예상을 할 수 있고 사진의 현실에서 나아가 사회문화적인 관점을 내포하기도 한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같은 사진이 얼마나 다르게 해석되는지, 사진에서 사람이 포함되지 않아도 얼마나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지를, 다음의 사진을 한 장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