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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평점 :
영화와 음악, 책, 그림, 그리고 작가의 사유가 한 묶음으로 해서, 20세트가 담겨 있는 책이다.
살면서 가지는 부당함, 존재이유,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길을 가는 것이 맞는지, 영화와 소설, 그림에서 배워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예를 들면, 타자의 언어가 존재하며 공존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언어관을 영화 <US>를 통해 풀어나간다. 광기가 사유를 감시해야 한다. 꾹꾹 밟아서 숨겨둔 광기는 언제가 터져나오는 것, 그렇다고 인간의 사유가 언제나 정의와 선의 편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광기는 타자이다. 타자의 언어를 억압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없애 노예나 동물로 보려하는 것, 현대사회에서의 식민지, 노예, 일제강점기 모습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영화 어스 속의 지하세계에 사는 복제인간들은 말을 빼앗겼고, 억압당했으며 짐승처럼 네 발로 달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순간 전복을 꿈꾼다.
영화와 예술 속에서 세상은 반영되고, 혹은 어그러져서 찌그러진 채로 뒤집혀 우리에게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아름다움도 예술이고 그렇지 않은 것도 예술이다. 이제 예술엔 철학이, 현대인의 외로움이, 그리고 한 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차별과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용감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추함과 미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유명 화가의 변이 깡통에 담겨 몇천만원에 팔리는 세상이다. 서사도 이유도 의미도 도통 알 수 없는, 기술의 뛰어남과 장인정신도 찾을 수 없는 예술 앞에서 가끔 나는 원시인이 된 기분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게 되는 묘한 이질감. 그렇지만 예술이라는게 아름다움이라는게 꼭 모두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유명 화가의 변이 든 깡통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에게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예술은 더욱 위대하다. 누군가를 웃게 할 수도 있고 어리둥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는 예술, 그것은 또다른 이름의 아름다움.
사유하게 하는 힘, 심장을 뛰게 하는 힘, 불쾌해서 되씹어 보게 하는 힘, 그 모든 것이 바로 예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피는 생명을 뜻하기도 하지만, 잃어버리기 쉽다는 점에서곧 삶의 허무,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조구치의 물음을 생각해보자. 피가 "충격"을 주는 것은 피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우리의 눈에 띄었을 때다. 피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안전하게 피부아래, 혈관 속에 있을 때만 환영을 받는다. 피가 외부로 흘러나왔을 때는 우리는 대개 죽음의 충격에1 노출된다. 이런 점에서 시오타의 빨간 색실들은 예술로서의 기능적 가치를 얻는다. 빨간 색실들은 "피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흘러나온 혈관들이면서도, 동시에 죽을 걱정 없이 안전하게 생명을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예술 작품으로기능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장신구의 불멸성은, 언젠가는 죽어서 부패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보완해준다. 장신구는 영원히 지속되는 "이상적인 세계를 작은 형태로 축약해놓은 "것이다. 늙은 왕은 매일 밤 황금 왕관을 벗어놓으며, 자신의 영혼만이라도 이 왕관같이 영원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사진이 정치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까닭은, 사진이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일반의 믿음이 있어서다. 아직도사진이 진실을 기록한다고, 카메라가 진실의 매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믿음에서 선동이나 조작 같은 사진의 정치적이용 가능성이 생겨난다.
어스>가 인종과 계급 갈등을 다룬 영화라는 해석은 중반을지나면서 깨진다. 윌슨의 백인 친구인 타일러 가족에게도 그들과 똑 닮은 백인 가족이 나타나 목숨을 빼앗기 때문이다. 일체의 설명적 대화 없이 폭력 행위로만 이뤄진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이 영화가 더 이상 인종 차별이나 빈부 격차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 대신 이전의 해석들을 뒤엎으며, 아직 근원이 밝혀지지 않은 광기가 영화에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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