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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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나이가 들어 늘그막에 란 뜻이다.
첫 창작집 치곤 제목이 묘하다. 늘그막에 쓴 글도 아니며 만년이란 제목의 단편도 없다.
젊은 마음을 가졌지만, 선술책을 발견해 미남이 되고자 했다가 과거 덴표시대의 미남으로 변신해버려, 오히려 그 시대엔 고풍스런 늙은이처럼 되어버린 <로마네스크>의 다로가 된 기분인걸까.


첫 단편은 <잎> 죽을 생각이 었다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새해 선물로 여름옷감을 받곤 좀 더 살아야겠다고 한다. 생각보다 사람의 수명을 늘리는 일은 간단하다. 여름엔 겨울옷감을 선물하면 된다. <추억>은 작가의 자전적 단편이다. 열등감 속에 숨은 엘리트 의식과 그런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으로 겪게 되는 불안한 중학생 시절, 목소리를 더 높이고 허풍은 더 세지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허풍만큼 마음 속 호랑이는 자라서 시커멓고 커다란 입을 벌릴 것이다. 작가의 우울함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감도 예술조차 돈벌이와 생활력이 차지하는 삶에 대한 허무도 모두 삼켜버리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입 벌린 호랑이는 작가 자신이니, 결국 작가 자신은 자신이 변한 호랑이의 식도를 지나 꿀꺽해야 하는데, 자신이 변한 호랑이에 자신이 먹힌다면 그 역설적인 트림은 누구의 몫일까.
윌리스 스티븐슨이란 사람의 “눈사람”이란 시가 생각났다.
“그 곳에 없는 그 무엇도 아니며, 그 곳에 있는 그 무엇도 아닌 것.”


창피당하고 더럽혀진 체 귀향하는 데쓰씨지만 그러나 데쓰씨에겐 명분이라도 있다며 부러워하는 <열차>
지상낙원같아 보이는 원숭이섬을 탈출하는 원숭이들과, 불길을 피해 훨훨 날아가고 싶은 참새들.
옛날 만담같은 <어복기>나 <로마네스크>
그 사이에 백수에 건들리거리며 거짓말을 일삼는 기노시카, 아니 시부로, 아니 작가가 있다. 자살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 혼자 살아남아, 그 검은 밤과 더 검은 바다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20대의 요조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구호와, 이해할 수 없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쓰잘데기없는 것들을 쌓아 악을 만들어 내는 세상 속에서 젊은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고, 어느 것도 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싶고 무언가가 되고 싶은 이들이 현실의 외줄을 탄다. 외줄을 타는 어릿광대들은 농담으로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죽음”은 농담이 되었다.




-만년에 대한 작가의 말-


재미없는 소설은 말이죠. 그건 어설픈 소설입니다. 무서워 할 것 없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은 딱 잘라 거부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같이 재미가 없으니까요. 재미있게 쓰려고 애쓰다가 재미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소설, 그건 말이죠, 보세요, 왠지 죽고 싶은 심정이죠.
이런 식의 말투가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일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시시합니다. 이제 와서 당신한테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격정의 끝에,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무표정, 나는 미소 짓는 가면이 되었습니다. 아니요, 잔인한 부엉이가 되었습니다. 무서운 건 없습니다. 나도 이제 겨우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뿐입니다.
<만년>을 읽으시겠습니까?
아름다움은 남이 가리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서 문득 발견하는 것입니다. <만년>안에서 당신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독자의 황금 같은 권리입니다. 그래서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르는 녀석은 두들겨 패도 절대 알 수 없으니까요.
이제 그만하고 실례해야겠습니다. 저는 지금 대단히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중이라서 반쯤은 건성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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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30 12: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등~!

mini74 2021-08-30 12:02   좋아요 5 | URL
앗!! ㅎㅎ 고맙습니다 ~

새파랑 2021-08-30 12:14   좋아요 6 | URL
만년 읽으면 뭔가 쓸쓸함이 느껴지더라구요. 어느정도 경험을 해야 저런 글을 쓸 수 있지 하는 기분? 근데 호불호가 클 것 같은 작품일거 같아요. 저는 극호~!!

라로 2021-08-30 13:2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어주 맘에 들어요. 그리고 읽어 보고 싶고요.

mini74 2021-08-30 13:27   좋아요 5 | URL
영국태생의 텍스타일 디자이너 제니 플린 그림이라네요. 저도 표지가 좋아서 찾아봤어요. ~

페넬로페 2021-08-30 13: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말이 좋네요
만년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요 ㅎㅎ
그래서 읽어보고 싶어요^^

mini74 2021-08-30 13:28   좋아요 6 | URL
도도하지요 ㅎㅎ

청아 2021-08-30 13: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4등👉👈 아무래도 만년에 읽어야하는건 아닐까 싶었는데
‘작가의 말 ‘을 보니 그럼 안되겠어요 모르는 녀석은 사탕을 쥐어주면 잠시 알더라구요ㅎㅎ

mini74 2021-08-30 14:02   좋아요 5 | URL
다자이 오사무 말처럼 독자의 황금같은 권리를 누리세요 ㅎㅎ 근데 누릴려면 먼저 읽기는 해야 한다는 ~ 작가가 예전 학교 다닐 때 잘난척 엄청하던 남자애랑 말투가 묘하게 닮아서 혼자 웃었어요. 저는 초콜릿 을 쥐어줍니다 ㅎㅎ

scott 2021-08-30 15: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열쉼히 달려서
. 。 ,∧_∧ ゚。
 ・(゚´Д`゚ )。
  (つ   ⊃
   ヾ(⌒ノ
     ` J🖐등!

mini74 2021-08-30 17:34   좋아요 3 | URL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ㅎㅎㅎ 오등 하니 자동으로 나와요. 국어시간에 이거 못 외우면 벌 섰거든요. 고맙습니다 스콧님 *^^*

scott 2021-08-30 21:31   좋아요 4 | URL
찌질이 다자이 이 작품 [만년]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단

[마지막에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훌륭해질 수 있을까? 그즈음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늘 공허하게 발버둥을 쳤다. 얼굴에 열 겹 스무 겹의 가면이 달라붙어 있어서, 어느 것이 얼마나 더 슬픈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다들 나처럼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전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남몰래 다짐했다.]

미니님 8월 마지막 하루 앞둔 오늘 평안한 밤 보내세요 ^ㅅ^

서니데이 2021-08-30 2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6등.^^
다자이 오사무, 만년은 표지가 예쁘네요.
mini74님, 좋은 밤 되세요.^^

mini74 2021-08-30 22:04   좋아요 4 | URL
서니데이님도 좋은 밤 보내세요 *^^*

붕붕툐툐 2021-08-30 22: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스러운 작가의 말이네요~ 당연한가?ㅎㅎㅎ
저는 좀 맞으면서 배웠으면 좋겠는데...ㅎㅎㅎㅎㅎㅎ

mini74 2021-08-30 22:45   좋아요 3 | URL
ㅎㅎㅎ툐툐님 넘 웃겨요 ~ 편한 밤 보내세요 ~~

오늘도 맑음 2021-12-20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미 말했지만, 저는 미니74님의 리뷰가 느무~~~ 좋습니다.
디자인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느무~~ 사랑하는 저이지만.....
이책은 두들겨패어 다시 읽어도 재미 없게 읽지 않을까 하는......
이말을 한다면 또 싫어하시겠지만.....
미니74님의 리뷰가 더 재밌었어요ㅎㅎㅎㅎ

mini74 2021-12-20 13:25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맑음님 댓글 읽는 재미도 👍 이제 쌩쌩하신거죠? 즐거운 월요일 보내세요 맑음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