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이야기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똑똑한 책꽂이 38
최지혜 지음, 신소담 그림 / 키다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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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규장각과 외규장각에 대해서 알고계셨나요?

누가 만들었는지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관해

이 책을 통해 더 자세히 알게되어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하던 해(1776년)에 창설되었어요.

정조는 즉위한 다음 날 창덕궁 후원의 연지 북쪽 언덕에 이층 건물

새로 짓게 하고 '주합루'라고 불렀어요.

이 건물 1층의 이름을 '어제존각'으로 부르다가

'규장각'으로 개칭한거죠.

규장각은 왕이 쓴 글과 왕실 관련 도서를 보관하던 왕립 도서관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라 보시면되요.

'규장각'의 '규장'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를 의미합니다.

현재 '규장각'은 원래의 위치에서

'궐내각사'(=궁궐안에 두었던 관청) 지역으로 옮겨 새롭게 복원되었어요.

2023년 5월 13일부터 창덕궁 후원 투어자를 위해

내규장각(=궁궐에 있던 규장각)을 공개했어요.


'외규장각'은 강화도에 위치해있어요.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깝고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국방의 요충지였고 왕이 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한 곳이였어요.

이런 이유로 정조는 강화도를 선택한거죠.

'외규장각'에는 주로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어람용 의궤(왕을 위해 특별히 제작함)

및 주요 서적, 왕실 관련 물품 등을 보관했어요.


'의궤', 조선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건축 등을

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이에요.

조선 초기의 의궤들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어요.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제작된 의궤만이 남아 있지요.

즉,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인거죠.


조선 고종 때인 1866년 초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지하며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고

이 사건을 '병인박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중국으로 도망쳐 이 소식을 프랑스군에게 알렸어요.

이에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했고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라며 조선 정부를 위협했어요.

조선군을 이끌게 된 양헌수

몰래 강화도로 건너가 삼랑성(정족 산성)에 진을 치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어요.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책을 훔쳐갔어요.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귀중한 기록물들이 대부분 불타버렸지만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있었어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님

베르사유 별관 수장고 안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였고

양국의 오랜 협상 끝에 2011년 4차례에 걸쳐

영구 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어요.


돌아온 의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돼 있지요.

나머지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일본 궁내부 등에 보관되어 있어요.


다른 나라의 기록 유산은 주로 글이 중심이지만

조선의 의궤는 '그림'이 중심이에요.

'글'은 부연 설명 정도지요.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요.

외규장각의 중요성은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수준 높은 제작 방식이에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소장된 많은 자료들 중에서

유독 의궤류를 집중적으로 약탈해 간 것도

의궤에 그려진 채색 그림의 가치와 예술성이

이방인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에요.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 역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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