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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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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일어나 걸을 때-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죽고 나서 밝혀질 내 어떤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나는 아직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은 후 내가 살아서 했던 어떤 일 때문에 괴로워 한다든지 혹은 부끄러워 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딜리팅은 유언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알려지지 않는 유언. 전적으로 살아있을 때의 관점에서 행해지고 죽은 후에 비로소 이루어지기에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 걸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같은 것은 그 누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누구도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시작은 냄새다.  


구동치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기묘한 냄새가 흐르는 빌딩에서 두 개 차원의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단단하게 키워진 사람이지만 그 역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므로 살아있으면서 죽은이의 일을 들어주는 일은 '언제나' 과하게 올 수 밖에 없다. 사진 한장을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진은 단순히 필름이 박힌 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없애야 할 사연, 사진이 연계되어 있는 다른 사람의 추억 이상을 포함한다. 


의뢰인이 오기 전 아리아를 들으며 혼자 의자에서 노래를 따라하는 그의 모습은 레옹을 연상시킨다. 레옹은 처리 하는 사람, 이 세계의 사람을 저 세계로 보내는 킬러. 그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한 곳에도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화분을 보라.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애지중지 했다고 생각하기 싫겠지만, 화분은 레옹의 표상이다. 식물이면서 늘 움직일 수 있도록 작은 화분에 있는 삶. 안정을 위한 움직임 말이다. 경계에 있는 이는 경계를 떠날 수 없어 늘 불안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딜리팅 하는 것이 비밀이 아니라 관계라는 점이다. 이권 다툼으로 보이는 사장들 간의 접점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포장되지만 비밀은 혼자서 생기는 속성이 아니다. 반드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만 벌어지며 내가 갖고 있는 비밀조차 나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의 연결을 지워달라는 일인 것이다. 구동치는 단순히 딜리팅을 부탁한 이의 가장 나종에 지닌 것을 잘 버려달라는 당부로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신이 살아 있을 떄 그것을 버리지 않는가. 못하는가. 관계는 혼자서 떠난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에 가서 구동치는 지워진 것을 복원-사진을 복원하는 이를 알게 된다. 그는 어렵게 복원한 사진이 어떤 기쁨을 가져다 주어는지 설명한다. 구동치는 우물로서의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는 일은 어렵다. 구동치는 부탁한 사람조차 확신할 수 없는 '안도'를 위해 그 밖의 다른 표정의 가능성을 깊은 곳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남자가 지갑 속에서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그냥 줄 수 없으면, 반으로 접어서 주십시오. 구동치가 웃으며 말했다. 416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라는 제목은 작가가 그림자의 그늘이 색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지울 것이냐, 바라지도록 기다릴 것이냐 양자택일 하는 사이 의뢰인들의 사연으로 구동치의 그림자는 세상의 낮처럼 다채로워졌다. 구동치는 뒤바뀐다. 자신의 실체가 그림자가 되면서, 그림자가 실체가 된 삶을 산다. 그러므로 다음 대사는 검은색 그림자의 안온에서 그가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끌어온 것이다. '그냥 줄 수 없으면, 반으로 접어서 주십시오.' 내게 주기 전에 적어도 당신은 그 정도의 인사는 해주십시오. 당신이 버릴지 말지 고민하며 이제껏 키워온-가슴 안쪽의-그 오래된 사진을 보며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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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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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어떤 움직임-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이곳의 불은 어둡다. 천장 중심에 있는 등 아래서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빛을 다 가려버린다. 나만한 그림자가 타자를 가리고 모니터에 올라와 눈에 닿는 빛이 부족하다. 나를 치우지 않으면 여기는 계속 어두울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있는 곳을 바꿔야 하겠지. 천장을 바라보며 책상에 앉아야 앉아야 할 것 같다. 위치를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이유 하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떠올리기도 전에 거부된다는 점.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책 하나를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움직여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베른하르트가 병실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과의 이야기를 독백으로 거칠게 그린 책이다. 장이라고 나눌 것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질게 이어진다. 내용이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그러나 꽤 다양한 곳을 도달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말이 어렵다. 증오, 혹은 증오 같은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잘 살피면 나에게서 기인하는 경우가 왕왕하다는 점을 알아두자.


나는 그가 느닷없이 병실로 뛰어들어 와 나를 무작정 힘껏 껴안고 내 가슴에서 울음을 터트릴까 봐 정말로 두려웠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쉽아홉 혹은 예순 살이나 나이를 먹은 그가 나에게 매달려 엉엉 우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49


이런 구절들이 곳곳에 쓰러져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의 병세, 그의 연약함을 모두 받아줄 생각은 없다. 자신이 침식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라면 모든 것을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 미덕 같겠지만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 미덕 따위는 없다. 파울을 가여워하며, 파울을 만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위험을 견디는 것은 이와 별개의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목숨이 하나이고, 또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은 무척이나 병들기 쉬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둘이 같은 병을 앓았다면 서로는 알은 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흔적을 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라는 인식을 받기 어렵고 그러면서 나와 같음을 연민하는 것은 싫기 때문이다. '다행히' 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다른 병을 앓기에 병자이면서 건강한 자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파울은 정신이 아프고, 나는 폐가 아프고. 다시 말하자면 나는 정신이 건강하고 파울은 폐가 건강한 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이고 말 한마디 나누는 법 없이, 모차르트를 들었고, 베토벤을 들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사랑했다. 51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우정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공백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채우는 일은 쉽지 않고, 혼자서 혼자인 상태를 만족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그들은 침묵으로 시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힘도 나올 수 없는 육체를 벗어나 음악으로 간신히 지탱 된 정신의 아치에서 기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는 모르는 표정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네다섯 발자국을 걷는다. 그다음에는 열이나 열한 발자국, 그러고 나서 열세 발자국이나 열네 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환자란 그렇게 움직여야 하지' 16 이 말은 환자의 움직임에만 맞는 것은 아니다. 내딛을 바닥을 신뢰할 수 없는 곳에서 몇 발자국을 시험 삼아 뻗는 것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버려진 발자국들과 제법 길게 가져왔던 발자국을 떠올리자. 움직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이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 신문을 구하려고 몇 개의 도시 몇 백킬로미터를 차로 달렸던 장면은 분개, 어처구니 없음, 조소같은 것이 아니라 쓸쓸하다. 그 많은 도시를, 신문 하나를 위해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다. 무엇이 바보 같은 것인가? 그 신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빌어먹을 자연에 있는 삶이, 아니면 내가 서 있는 땅에게 욕을 해댔던 광기 어린 모습이? 이들의 저편에는 이런 삿대질과 증오에 비켜서 사람들이 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려는 움직임을 평생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숨을 편히 내쉴 수 없는 문장들, 그런 곳을 만들지 않았던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이야기는 그 웃음에 대한 증오는 아니었을까. 나는 빛에 조금씩 둔감해져서 여기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모니터에 가려진 나만한 그림자를 나를 치우지 않아도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글자를 그럴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복은 아니다. 버려질 발자국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렇다고 걸을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한 것처럼. 33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도 결국 움직임이었고 있어야 할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 어려웠던, 그리고 결코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던 그들의 '살아있음'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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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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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

 

 

 

젠더는 한 개인에게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한 개인의 인간됨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는 내가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사회와 협상하려는 나의 노력이다. 214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기 위한 책이다젠더 트러블을 개설하는 1장과 주디스 버틀러가 각 연구자들의 논의를 비판한 5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버틀러의 기본적인 입장은 개략적이지만 성실하게 소개했다. 이것은 조금 길지만 다음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옮길 필요가 있다. 그의 입장은 '결정적인 토대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남녀의 성차통일되고 안정된 범주로서의 여성근친애의 금기에 전제된 이성애 중심주의는 사실상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복된 규제적 이상의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산해낸 사법 권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동성애적 욕망은 억압되기에 앞서 애초에 배제되어 욕망으로서 인정도 인식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버틀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동성애적 욕망'을 밝히는 과정인데, 여기서 그는 '원본'이 없고 재현만 있는 관계를 발견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관계는 복사본 대 원본의 관계가 아니라 복사본 대 복사본의 관계라는 설명이다. '원본조차 자연스럽거나 본래적이라는 관념의 패러디'에 불과 하다는 주장은사회에 의존적이다 못해 '우리 속에 허물어지는 나'32를 발견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 중요한 까닭은 '규범'의 허구를 밝히고 원본조차 원본이라고 여기는 것의 패러디일 뿐이라는 논의를 수면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이성애적 ''과 그것과 '다른 움직임'이라는 까닭으로 인간으로 간주될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하기 때문이다정언으로 받들여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다움'속에서 ''라는 젠더와 어떤 섹스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도 전에 규정 지어지는 삶을 받들고 있다이것을 깨닫는 일이 위험하지 않는 사회는 어디에 있을까. 버틀러는 혼란을 가속해 해체에 닿자는 주장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규범을 탈출해 비로소 ''라는 젠더와 섹스를 구성해 나가며 성립할 수 있는 해방으로서의 '가능성'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소수자라고 부르는(불리는) '장애인과 크로스젠더퀴어와 성적 소수자들'은 '그냥존재 할 수 없다단단한 '규범'과 싸워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이것과 아무 유사한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길 바란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노동 규범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생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그런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의존하게 만들어 이익을 창출한다허나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215 


위의 문장은 시대를 바꿔나가려고 하는 이들의 등은 얼마나 연약하면서 강한것이며, 연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묻는다. 게이이면서 레즈비언인 주디스 버틀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또는 여성이라면, 게다가 이성애자라면, 사회에 자신의 젠더를 타협하고 맞춰나가면서 탈락되었던 나 '다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고, 만연한 섹스와 젠더의 구별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고 알아나갈 수 있었던 이들이 가졌던 그들 '다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가혹한가. 그리고 가혹한 곳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없는 우리'를 생각해본다. 생각과 유불리의 '홈을 평평하게 만들기'. 이것은 결국 생존할 수있는 영토를 넓히는 일과 귀결된다. '내가 있는 우리'가 되는 일의 가능성은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제목은 '후기 버틀러가 주장하는 공존하는 삶, 살기 좋은 삶,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다.'216 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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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펑크 -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
줄리언 어산지 외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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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머릿속에.

 

 

최종 사용자들의 최종 장치에서, 그러니까 양쪽 귀 사이에 있는 바로 이곳에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정보를 걸러 내며, 정부가 그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보기 싫은 게 있으면, 보지 않으면 됩니다. 182



  

세계 어느 곳이나 정부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소관인지, 개개인이 '무엇'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일일이 귀에 헤드폰을 씌우고 가장 좋은 앵글을 보여주며 '이것을 보고 들으라' 일러주는 모습은 언제 봐도 당황스럽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가갸거겨' 따위의 내용이기에 무엇을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말들이지만, '왜 그러느냐'라는 반응에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평화를 위해서.' 알고 있는 이는 알겠지만, '국가''국민'모두 가주어다. 안정과 평화보다 더 실체가 없는 게 바로 이들이다. ''가 포함되는 것 같기도 한데, 라는 생각은 모두 착각이다. '안정''평화'를 위해 '국가''국민'을 버리는 것이 '그들'의 생태다. 개개인의 활개를 어떻게 막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광활한 인터넷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에 가까운 인터넷 창마다 배너마다 권력이 원하는 내용의 제목, 기사, 동영상, 오락거리 등등이 넘쳐난다. 눈 뜨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동안 눈감고 믿을 수 있는 일들이 즐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용자로부터 의도되어진 '댓글'의 개수로 여론을 조작한다? 민주주의라는 가면은 어디까지 투명해질 셈인가? 그 안에 있는 전체주의의 낯빛을 아직 보지 못했는가? 우리가 궁극의 자유를 위한 가장 발달된 도구라고 믿었던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인터넷은 내가 내딛는 거리와 발자국을 차곡차곡 모아놓는다. 많이 움직일수록 많이 남는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사는지, 왜 가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것은 도무지 망각이라는 게 없다. 나는 나의 '자유'로 인해 '감시'당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구글말이다. 이들은 개인의 정보를 개인 스스로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련의 기록을 숨기고 지우는 일도 가능하다. 아무도 '관리'를 맡기지 않았는데 정부를 대신해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 그런가하면 공원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더러 거기 와서 옷을 벗고 놀라고* 하는 곳에서 정말로 대다수가 정답게 자신의 정보를 폭로하며 놀고 있다. (페이스북) 이것은 기업과 정부의 통제, 혹은 협력하는 인터넷의 전형이다. 개개인의 자유를 막대하게 침해하거나 거리낌 없이 유도해내는 대표적인 활동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대해, 양날의 칼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칼을 반으로 접어 날을 밖으로 세우면, 안은 안전하고 단단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설계다. 암호로 얽힌 장벽,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키워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때문에 인터넷에 올라오는 '좋은 자료''나쁜 자료'를 나누는 '검열'에 대한 의견도 명쾌하다. 인터넷을 통해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문제점을 삭제하거나 가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왜 인터넷을 통해 나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이다. (: 각종 음란물) 어떤 명분으로도 검열은 사양한다. 왜냐하면, 검열은 '스스로'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책은 가상의 공간마저 저들의 손으로 넘어가려는 사태를 지켜보는 이들이 썼다. 사이퍼펑크: 대규모의 감시와 검열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강력한 암호 기술을 대대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창하는 활동가. 우리는 '사이퍼펑크'라는 이름을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불러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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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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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은 척추동물의 기관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척추동물인 사람의 눈을 가리켜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다른 척추동물을 살펴보자. 개,,,고양이 등등 다르지 않다. '눈알'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양이 눈', 이라고 하지 '고양이 눈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때로 식탁에 올라오는 생선요리를 보고 '조기 눈알'이나 '동태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이것은 생선을 자주 만나지만 우리의 삶이 생선과 가까운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생선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또는 아주 작은 것을 이르는 말로 '모기 눈알'이라고 '눈알'을 쓰는 것 같다.(엄밀히 말해 모기의 눈은 '눈알'이라고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생선처럼 역시 모기와도 멀다몸으로는 아주 가깝지만마음으로부터는 아주 멀다사람이 별 가책 없이 마주치기만 하면 잡아 죽이는 몇 안되는 생물아닌가여기까지 보면눈을 이르는 말인 '눈알'은 친밀한 대상이 아니고 잘 모르는 대상을 '함부로'부를 수 있는 말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눈알이라는 기관이 있지만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눈알을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도 아닌데 말하는 순간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천지사방이 '눈알'인데눈알은 부재한다


'눈알'이 '눈알'로서 자유롭게 불리는 곳은 있을까아마도 학습용교구용으로 나오는 플라스틱 재료의 이름표에서 일 것이다원래 척추동물의 기관을 이르는 눈알이라는 말은 무생물그러니까 살아있지 않은 것눈이 있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상태일 때 자유롭게 쓰이는 것이다이때 '눈알'은 전체의 부분을 일컫는 말로서 충실하다, '눈알'은 4mm부터 40mm까지 다양하게 수북히 준비되어 있다눈알을 흔들면 검은자가 흔들린다창고에 쌓여 있는 '눈알'들이제 무엇으로 만들지 고민하는 이의 손길로 '눈알'은 ''이 될 것이다외계인이라고 우기고 얼굴에 눈 열개를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일단 눈이 된 후에 다시 '눈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눈알'이었던 것이 형체를 갖추고 나면그 대상은 나를 ''으로써 바라보기 때문이다.


<눈알 사냥꾼>을 이렇게 이해해 보았다. '눈알'이 내게 주었던 위협적인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하나의 개체는 눈알을 갖지 않는다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서 ''이 되었기 때문이다누가 무엇으로도 '눈알'로 해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에서조차 되지 않는다.


공은 튀어 오른 만큼 낮은 곳에 닿는다. <눈알 사냥꾼>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저편에 대한 확신이었다. 눈을 '눈알'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사냥하는 사람의 반대편에는 '눈알'을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아귀 같은 '세월'에 '눈알' 생각을 하며 리뷰를 쓰고 있다. 참혹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자리에 대한 '무책임'이전에 인간에 대한 공감과 예의가 이렇게 '없는사람사람들이 이 짧은 세월 속에 밝혀지고 있다분노와 눈물의 시간 가져다 준 것이 있다면 거짓들 사이에서 죽어버린 진실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드는 이유는 책 아닌 다른 무엇을 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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