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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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허기를 견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빵 봉지는 안이 투명했다구겨진 포장에 빛이 잘 들어왔고 작게 쓰인 글씨가 흔들렸다입가에 묻은 우유속이 빈 것들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참이 끝나가는 오후골판지 위에 드러누운 황갈색 작업복은 몸을 하나 둘 일으키기 시작했다. “백주대낮에는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교실에서부분현장은 다시 흙먼지와 날것의 온도로 뒤섞였다. 천안 아산역에는 하루 열 세대의 기차가 지났다.


어떤 구절은 어느 날의 신문기사처럼 간결하게 '그날'이었다현장은 도로가 잘 보였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그것은 아주 흔한 소리여서 어쩌면 도로의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으로 시마이 할 때까지 다시 부푼, 빵 봉지만큼의 허기를 대신해 견뎠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컨테이너 숙소 이불에 피곤을 뉘이고 무엇을’ 알기 위해 시집을 피곤했다그러나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로 시작하는 시시가 책을 덮으라고 하는 것인가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밤을 졸았었나. “하루종일 침묵한 일을 위해우리는 서로에게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강철로 된 드롭프스*'라고 쓴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그런 날들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

진은영은 서른 살에 등단했다그리고 3년 후첫 시집을 냈다이 시퍼런 시집을 보면서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한다물렁한 살로만 지탱된 생이 없듯이 내게도어떤 굳건함이 있을거라 믿었던 것은 모두 착각인 듯 싶어서시는 너에겐 어떤 방패도 없다는 듯 작정하고 들어왔다가령 이런 물음들.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고요한 저녁의 시부분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찧지 않고서 견딜 수 있겠니그러니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하고비로소 머리의 쓸모를 생각한 것이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모름지기 시인의 포부란 고작 일곱 개의 단어로 사전을 만들고 고작 몇 마디의 말로 거대한 이름을 설명하려 드는 것세상에 사전만큼 무모한 노력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그러나 어떤 사전보다 깊은 갈래를 냈으니이 두 쪽 짜리 사전에 금방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라는 말에서 물에 불은 나무토막을 부르는 걸 보자처참함나무는 쓸모를 잊어버리고 물속에서 헤풀헤풀 풀어질 것이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그것도 모자라 그 위로 ’ 비가 내린다참혹함몇 마디 하지 않았으나 그 몇 마디조차 막아버리고 싶은 구절이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슬픔다음으로 오는 단어가 자본주의라는 점인데오늘이 외면하는 '오늘'을 시가 바로 보겠다는 선언 아닌가시가저 나약한 가지가,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긴 손가락의 부분이라며 머리가 아니라 ''으로 온다.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주소가 없다당신의 기억이 그렇듯 장소보다 시간에 기대 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상의 흔적은 그의 영혼 속에 있고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이 작용한다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앞을 보태줄 수 있을지.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이처럼 있다는 곳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어서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름 '가족'이다누구나 긴 말 하나씩 품는 단어시인도 한 마디 했다긴 말 할 것 없다는 듯 간단히.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전문이렇게 쉬운 비유가 이때까지 어디에 있었나밖에서 빛나는 것이 어째서 한 집에 들어가면 서로를 쏘아보는 날이 되어야 했나이 짧은 시를 쉽게 넘길 수는 없다. 

 

너는그곳에 살지 않는다.

센 언어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1,2장 내내 읽는 이에게 처들어 온다가족에서의 충격은 청춘에서 다다르는데, 청춘」은 연작이다아마도 더용서 할 수 없었던 모양인가익지 않아 무서운 말들에 흠씬 두들겨맞는다서른 세살에 나온 시집이므로서른 세살 이후에 쓰인 단어는 이곳에 하나도 없다분명하게 금 그어진 서른 셋 이전의 날들은 독자와쓰는 이를 따라 무섭도록 쪼아댄다.

 


청춘 2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청춘 2」 전문.

 

어질한 뒷목을 쓸어 정신을 차리면 다른 시. 이제는 더 정확히 '서른 살'이라고 겨눈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뜻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부분서른 살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고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이것 뿐이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스무살의 끝에 몰린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시인이 말하는 방식이 이렇다이런 일갈이 어디 청춘에게만 한정돼 있으랴뒤를 넘기면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무신론자」부분. 보우하사유약한 나를 또 꾸짖고 뱉고 달린다. 시인은 달려서 마침내 이 세상에 없던 포도송이를 하나를 그리는데. 이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일 것이다. 처참하게도 무용한 시가 폭력에 부딪힌다. 일어났던 폭력과 그것을 침묵했던 폭력, 모두에게 말이다.

 

 ...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네가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갈까

 네가 떨어뜨린 물방울은 다 포도송이가 되었다

 건물들 사이로 솟은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포도송이

 누구의 그늘이 될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입을 축일 수도 없다

 열매가 투명해서 아무도 따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쓴다

 너에게 수천 개의 물방울이 모여든 이유를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분신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된 이후로도 다른 스무 살들이 어디론가 끌

려갔다 이곳에서

 빈방의 아이들은 불타 죽고 이곳에서

 철거촌 사람들은 깡패에게 맞아 죽고 이곳에서

 라고 나는 쓴다 이곳은 조용하다

 라고 쓰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

 라고 쓴다 보랏빛 젖은 안개로 쓴다

  

 네 투명한 포도알 위에

 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부분.


''는 누구인가너는 스무 해 첨탑 꼭대기 매달린 포도송이이고포도송이가 떨어뜨린 물방울이다스무 살 메마른 입술을 가진이다그래서 너는 스무 해 동안 일어났던 이 땅을 모두 알고 있거나전혀 알지 못한채로 그 땅을 걷는이다너는 누구인가그러나 너는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며 투명할 포도알과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이 일들을 '쓰는 행위'나는 포도를 알고 있다포도는 작고물이 많고입에 쏙 들어간다그러나 이것은 열매가 투명하다포도라고 할 수 있을까까맣게 가지에 차 오르는 풍성한 부풀음이 아닌 것을 말이다열매가 투명한 포도는 원래 알알이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나 점차 흐려졌다. 학살과 노동자들의 분신과 다른 스무 살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하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던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면서. 이 투명한 포도는 언제 과육과 검은 껍질을 갖게 될 것인스무 살이 되어 그곳을 걷는 '그'가 마침내 한 개의 '몸'을 채워가고 있을것인가절망에 몰린 희망을 시인은 "보랏빛 젖은 안개로"쓴다. 그것 참 지워지기 쉬워라처음으로 돌아가시는 책을 덮으라고 했다. "교실 밖에서"일어나는 삶을 보라고 했다. 배움에 뜻이 있다면 "하루종일 침묵"하느라 "메마른 입술"에 "보랏빛 안개"로 이곳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보랏빛 안개가 내 입술 위에도 내렸을 일을 생각한다. 조용히, 입을 벌려 따라 읽는다.***

 

 

 

 *사탕

**프란시스 위스타슈, 이효숙,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알마. 26p

원문 :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사의 흔적이 그의 영혼 속에 있고, 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그의 행동방식 속에서 알아볼 수 있다."


***따라 읽는 글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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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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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을 모른 척 하는 마음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 오자마자 쓰러져 자는 다네다에게 메이코는 유성매직을 든다.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 같은 그림을 그리고 깔깔, 재밌다. 스물네 살. 그들은 6년을 만났고, 동거 1년 차다. 메이코는 구질구질하기로는 세계 제일인 그냥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다네다는 신문사에서 그림을 그린다. 다네다는 생활을 일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급여를 받는데. 이들이 동거하는 이유는 둘이 떨어진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라기보다 둘이 함께 있지 않으면 제대로 지속될 수 없는 '생활'을 위함이다. 물론,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 를 생각해 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 당번은 정할 수 있다. 카레와 생선구이 카레, 다시 생선구이와 카레로 묘하게 바뀌는 날들에 함께 앉을 수 있다. 평화로운가. 그러나 일상의 '평화'는 무엇이 일어날리 없다고 확신하는 상태다. 이들의 생활은 평화롭다는 포장아래 무엇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모른척한다. 다만 그 속에서 익숙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라고나 할까_다네다

 

가면을 모르는 다네다, 가면을 보는 메이코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는 점심 무렵에도 자고 있다. 조퇴를 하고 돌아온 메이코는 오늘이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런 건 말하지 않는다. 생각할 뿐이다. 이 회사의 어른들은 별 것도 아닌 일로 호통을 치며 체신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희롱을 일삼는다. 함께 다니는 후배는 (이걸 패줄 수도 없고)엿을 먹인다. 도대체가 재미라는 것이 없다. 이러려고 어른이 되었나. 혼자 중얼거린다. 다행히 다네다는 자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다. , 회사 그만 둘까...미안해서 푸념이라도 하지 못했을 말. 회사를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은, 생활이 되지 않아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다네다를 출구 없는 곳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나 자고 있어야 할 다네다는 갑자기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그려진 얼굴로 대답한다. '그만 둬. 정말 네가 그만 두고 싶다면.' 메이코는 눈이 커지며 놀란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메이코는 다네다를 껴안는다. 다네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다네다를, 껴안는다. 그리고 다음 날 메이코는 회사를 그만 둔다.

 

가면이 지워진 풍경

다음 날 함께 밥을 먹으며 메이코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듣고 다네다는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하려고? 우리의 생활은, 돈은, 빗발치는 물음이 다네다를 조른다. 그러나 메이코는 즐겁다. 모아둔 돈도 있고, 무엇보다 다네다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다네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생각도 못했을 용기가 다네다 자신을 누르고 나왔던 것을 말이다. 그가 잠결에 일어나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을 잘 쓰는 에스키모족에 대한 연구를 보면 가면을 쓰는 일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가면이나 역할은 쓰는 사람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는 관중의 집합적 힘의 확장을 뜻한다고 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다네다 자신이 원해서 쓴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인 메이코에게 얼굴을 무방비하게 내줌으로써 그려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꿈이나 현실은 모두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멀다.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답이 없고 그냥 다니는 회사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수도 없게 한다. 꿈이 없는 삶. 답답함에 몸에 독소가 쌓이고 시퍼런 뿔이 나온다. 감자의 먹지 못하는 싹 솔라닌. 메이코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을 그린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겨우 하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듣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말을 발화한 이를 다네다 같은 인물이라고 '혼동'해 버린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고 가면이 지워진 다네다는 '그랬다'는 설명에 경기 같은 반응을 보인다. 어느 인류학자의 논의를 참고해 보면 다네다는 '가면'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났으며(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며) 가면이 보여주는 ''은 가면을 쓰는 사람의 확장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메이코'의 힘이 확장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감자에 싹이 나서...이파리에 감자감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장난스러운 일로 이날은 지나가지만 이들에게 변화를 꾀는 사건으로 중요하게 기록된다. 이렇게 다네다 자기가 자신을 벗어나고 그것을 종용한 메이코의 들뜸이 일상을 채워갈 때 한쪽 베란다에 쌓인 감자는 소라닌이라는 독을 가진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땅속의 감자는 과연 알맞게 익었지만 밭을 떠나자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며 혼잡한 도쿄, 빌딩과 빌딩, 길가와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다. 무엇이 되기 전에 빛을 받으면 먹을 수 없게 되어 쓸쓸하게 버려지는 이 작물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자신을 뜻하면서, 만화의 첫 장 메이코의 고향집에서 한 박스 날라져 온 '실제' 생활에 곤란함, 고민거리에게도 작용한다. 박스를 보며 메이코는 턱을 괸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쩌지, 자신을 향해 발화된 말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을지 모르면서 말이다.




 길이 막혔잖아?


입을 다물게 만드는 말

대학시절 밴드를 했던 다네다는 곡 하나는 끝내주게 쓴다는 세간의 평가를 모른 척 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욕망을 그저 '취미'로 포장해 숨긴다그래서 다네다의 꿈속에서 넥이 없는 기타바디만 남은 기타를 등에 지고 걷는 것은 웃음보다 안타까움이 출몰하는 것이다넥이 없는 기타를 지느라 손이 묶여 버렸다연주를 할 수 없는 미래를 들고서그의 손은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을 배고프고 가난하게 할 뿐이다그런 건 재능이라고 할 수도 없고꿈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어른스러움',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이 느끼는 어른스러움을 보일 수밖에 없는 도쿄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묻는 것이 때로 사치스러운 상황에 있는 이들의 마음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때로는 폭력적인 마음들

메이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아직 모르지만 다네다가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다네다에게 음악을 다시 하라고 권유한다. 때로는 이러한 권유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생활에 대해서도 자리를 빼앗긴 다네다는 이제 꿈이라는 약점, 꿈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을 흔드는 메이코, 흔들리는 다네다. '어떻게든 될 테니까' '젊으니까'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요금이 밀려서 가스가 끊기고 찬 물이 나오고 에어컨이 고장 나는 여름을 넘기며, 다네다는 함께한 친구들과 녹음을 하기로 한다. 죽어라 해보고, 안되면 이번이 마지막이다. 씨디를 보내서 데뷔를 하자.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포기, 라는 다네다의 말. 6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베이스와 가업으로 물려받은 약국을 하는 드러머, 모두 삶이 그와 같기는 마찬가지다.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다네다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네가 움직인다면 어디든 가야지. 여름날, 이들은 치기와 열정이 섞인 노래를 부른다.

 

메이코와 다네다


소라닌, 자신에게 보내는 레퀴엠

그날 이후 메이코가 다네다의 기타를 치는 것은 이 둘을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은유로 이해된다. 무엇을 위해 태워야 할지 모르는 열망을 갖고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가면을 그려 나의 욕망을 대입하고, 생활로서의 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모자라서 마지막 남은 한 자락 꿈에게까지 다네다를 밀어붙이고 말았던 비극적인 결과다. 이 둘은 하나인데, 비유적으로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니다. 결코 두 번 살 수 없는 청춘의 두 얼굴을 연인이라는 두 사람에 화한 것이다. 애인의 죽음 이후, 자신이 꾸릴 수 있는 현실을 되살기를 거부하고 메이코는 애인의 꿈을 집어 든다. 한번도 쳐보지 않았을 기타를 부르트게 치면서 노래를 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던져진 이별의 노래나 다름없는 가사를 부르며 메이코는 마침내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 삼는다. 소라닌은 다네다가 메이코에게 보낸 미리 쓰여 진 이별 노래가 아니라, 자신과 메이코와, 베이스와, 드럼에게 보내는 청춘과의 이별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싹을 언제까지 틔우는지 자신을 다 소진해 버리고 마는 바보 같은 젊음이 돼버린 우리들, 헤어질 수 없는 끈질긴 날들, 퍼렇게 썩어버린 20대를 노래로 부르며 마음과, 몸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떠나보내는 '레퀴엠'이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그래서 비로소 메이코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내가 서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스물세 살, 메이코와 같은 나이일 때 이 책을 처음 보았고 지독한 우울이 밀려왔었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읽겠다는 약속을 두고 책등을 뒤로 꽂아 놓았고 매년 나이를 먹지 않고 똑같은 어리석음과 똑같은 죽음을 반복하는 이들을 봐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2권이 없다. 1권만 읽고 쓰는 리뷰가 미완성임에 분명할 청춘을 대변이라도 하듯 라임이 맞아든다. 비로소 이 책을 보고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그곳을 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수차례 여름마다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서, 아픔이 점점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을 문득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을 하지 못했던 나의 이십대를 연민하지 않고 나를 믿지 못해 내게서 물러나고 당신에게서 물러났던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기울고 멀어진 그림자에게 전한다. 소라닌. 징그럽게도 나를 다 뒤덮었던, 다른 감자를 키워낼 수 있을 것처럼 속이며 자랐으나 실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말이다.

 


*클라이브 갬블, 『기원과 혁명』, 사회평론. 142쪽 요약 발췌.

#소라닌1,2는 영화가 개봉된 후, 개정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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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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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의 행방-신중한 사람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설명할 수 없다그럴만한 능력이 없거나의지가 없거나간혹 둘 다거나그래서 다만 '어쩔 수 없이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때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가 모여서 결국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 볼 때가 있다. (천천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씀해 보세요설명을 하려고 하면 막상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고그래서 풀게 되는 한 토막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 쉬워서 맥이 풀린다. (그런 호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좀 더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나 젠장자신에게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대체로 억울함은 여러 곳에서 도착한 불가피함이 모여 만들기 때문에 손 쓸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그는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가장 먼저 버리거나 포기해야 할 것을 끝내 간직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는 일에 실패한다그것만은 늘 성공적이다.

 

<신중한 사람>은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됐나"를 말한다논리학의 썰이라도 푸는 듯 그렇게 되었다를 '설명하는 중에 '그'의 큰 잘못이 그다지 없다는 점이 잘 드러나 고통스럽다. (결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자연스러운 가운데 부자연스러운 ''가 있을 뿐이라는데그렇다면 이런 문제 제기는 어떤가그의 부자연스러움 가운데 자연스러운 바깥이 어째서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바깥이 자연스러움이 정당한 나머지 그에 반하는 이들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 버리고그것은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응원일까요지친삶에 대한?) 예상했다시피 그런 건 하나도 없다그렇다고 비꼬거나 조롱하는 것도 아니다다행이라고 해야 하나그저 보여줄 뿐이다더 잘 볼 수 있도록덕분에 독자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어디에도 없는>을 읽으며 금기의 질문을 하나 생각했는데비웃음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 사람은 네이버도 안하나'였다. ‘는 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비자 발급 얼마나 걸리나요"를 한 번 물어보지 않는다용감하다고 해야 하나언제 나올지나오기는 할지 모르는 비자를 순진하게 '21일 후에 나온다'는 직원의 말만 듣고 월세방을 정리한다그리고는 하루에 만원하는 여관방에 들어가서 3주를 기다리기로 한다이해할 수 가 없다그래서 당면한 문제는 당연히 '비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다비행기표도 예약만 해놓고 발권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언제 돈을 넣을거냐취소해버린다 라는 독촉문자가 날아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유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국의 외삼촌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혼신을 다해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는유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나의 시각이다바깥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역시 바깥에 길들여진 나의 시선이다그러나 의 사고는 흠 잡을 데가 없다비자를 신청했다비자는 21일 후면 나온다바로 떠나기 위해 집을 정리했다흡사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것 같은 방법이지만 이것만 놓고 보자면 잘못을 딱히 꼬집을 수는 없다.

 

외삼촌이 우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집을 정리했다는 말부터떠나기로 한 수단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주를 내 손으로 치워버리는 것은 무슨 짓이냐는 거다미리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고 유의 신중하지 못함을 걱정하지만 그러나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방법처럼 외국에 나가기 방법을 밝게 이야기 하는 그에게 (그리고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 버린 후에별로 해줄 말이 없다굿럭이라고 빌어주는 수밖에그는 자신의 시계를 바깥과 맞출 줄 몰랐고읽을 줄 몰랐던 것 같다더불어 자신의 것을 읽을 수 있는지도 의심이 든다자신의 돈을 잘 챙겼으며 불안하나마 여관에서도 요식을 잘 해결하고 있다는 변호를 해보지만. ‘3주라는 일시적인 시간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지.

 

시계를 맞추지 못하는 유의 생태는 끊임없이 똑딱이며 나가는 세계와 불화한다다음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난 벌써부터 여기 없다고요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난 여기 없는 사람이라니까그런데 왜 이래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래." 비자센터의 직원은 끄떡하지 않았다누구라도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기다려보세요다른 방법이 없어요." p. 245

 

그의 몸은 벌서 외삼촌 집에 가 있다비행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에 말이다그러나 그가 가고 싶은 곳과 도착할 곳이 같겠는가그의 시계는 그에게만 통용된다그래서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일 없는 자연스러운 바깥과 대립하는 것이다유의 외삼촌이 부르는 초밥집과 그가 일해야 할 생각 속의 초밥집이 다를 것이 뻔하다후에 일어나는 일은 더 기가 막혀서 풀어갈 방법은 마땅치 않다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티켓을 흔들면서이미 날아가 버렸다는 것처럼 안타까운 그를 바라보면나의 시계를 생각하고더불어 바깥의 시계를 떠올리고차이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한다당신들은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라는 설명을 들어 본 일 없이 이곳에 왔다. 그렇게 맞춰서 돌아가기로 한 거대한 침묵 앞이다들어 본 적 없는 법칙에 나를 넣고 잘 갈려 세계에 잘 화되는 것이 훌륭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좁은 입구에 줄을 선다바깥으로 튀는 콩을 잡아다 다시 입구에 집어넣는 늙은 손이 잽싸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아뿔사, 어처구니*가 없다. 돌아가길 멈춘 맷돌 위로 햇빛이 길다.

 

 

어처구니 맷돌의 손잡이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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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기획 사무소 니노미야 시리즈
구로카와 히로유키 지음, 민경욱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날 깔보지 말랑게. 나는 자네 동료가 아녀! p. 89



'투톱'의 역사는 길다. 기록된 처음을 살펴보자면 '성경_창세기'까지 가야한다. "카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남자 투톱의 서사는 이야기가 있으려면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형제가 겪는 갈등과 파국은 질투와 폭력이라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돌아보게 했는데.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에게도 유서 깊은 투톱이 있으니 얼마나 유명한지 노래가 있을 정도다. "흥부가 기가막혀, 흥부가 기가막혀, 흥부가…." 이처럼 남자 둘이 끌어가는 서사는 흔하고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형태가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품절



''이 꾸릴 수 있는 구도는 자칫 굉장히 단조로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갈등과 해소, 경쟁과 화합, 혹은 갈등과 배신. 여기에 인물이 처한 상황, 지위 등의 높낮이, 각기 다른 성격을 조합하면 흥미진진한 대결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살펴볼까. 영화 <의형제>에서 국정원 요원과 남파공작원으로 등장한 송강호, 강동원이 그랬고 <완득이>의 선생과 학생으로 묘한 애정을 과시했던 김윤석과 유아인을 기억할 수 있고 <범죄와의 전쟁>의 공무원 출신 건달과 건달 생활자 최민식 하정우를 떠올릴 수 있겠다. 투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물 건너 온 <니노미야 기획 사무소>의 두 주인공을 만났다. 생생한 캐릭터, 현실감 있는 이야기에 이들의 한국 진출을 가히 '투톱의 귀환'이라 할 만 했다.



일본의 산업구조에서 쓰레기가 줄어들 일은 없고 처리장은 어디나 꽉 찬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사장님, 앞으로는 산업폐기물 비즈니스가 대세요. p.80



니노미야 기획 사무소는 건설 컨설턴트로, 1인 사업자 니노미야는 종종 '흥신소'라고 오해 받지만 가오를 지키기에 게으름이 없다. 흥신소라는 단어가 들릴 때매마다 '컨설턴트'라고 힘주어 교정하는데.(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건설에 관한 거의 모든 음지의 일을 맡는다. 업계를 이해해야 하며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소식통이 될 수 있는 업소의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에 따라선 야쿠자 뒤를 밟고 유력한 개인에게 협박을 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몸싸움도 불사한다. <니노미야 기획>에 들어온 의뢰는 무엇인가. "폐기물 처리장 허가"를 둘러싸고 미묘하게 일이 틀어지는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 알력 다툼을 밝히는 것이다. 


폐기물 처리장이라고 하면 플랜카드를 걸고 반대하는 일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혐오시설, 간단하게도 인상의 전부였다. 이 '혐오시설'이 없다면 그 쓰레기들은 모두 어디에 가야 할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 문제에는 우선 권력층의 움직임과 시의원들의 협의가 있고, 정보를 받고 알리는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발 빠름이 있으며 그 지역의 유지들의 이익 다툼이 있고, 얼마 되지 않는 보상을 받고 물러나야 하는 그 지역의 주민들과 그리고 각 업체마다 협력하며 뒤를 봐주는 야쿠자들까지 섥혀있다. 이 가지를 소설로 만나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를 조망한다. 


설치미술가 하 슐트의 '쓰레기 인간'_산업 폐기물 20톤으로 만들었다고.


햇빛이 들어오는 풍광 좋은 욕실, 온기가 잘 도는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거나 동경하는 이들은 자신이 버리는 쓰레기, 그 밝은 건물이 세워지면서 메꿔야 했던 땅, 건물을 지을 때 발생한 수많은 건축 폐기물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일련의 일을 상상하거나 논리적으로 생각을 연결하는 이도 거의 없다. 그러나 쓰레기는 언제 어디서라도 나온다. (하다못해 몸 뒤집지도 못하는 신생아조차 쓰레기를 생산한다) 처리할 수 없는 쓰레기를 발생하는 생물은 세상에 인간 밖에 없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조차 내 손이 아닌 다른 손을 이용해 버리도록 하는 이 세상은, 폐기물 매립장이 세워지는 불가피하며 어려운 일, 어떤 변명의 여지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비단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상 누군가는 맡을 수밖에 없는 수직적 구조,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층의 생활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풍경은 거대한 돈을 밀고 당기며 움직이는 이들과, 니노미야와 구와바라처럼 셋돈을 받으며 일 돌아가는 꼴을 살펴야 하는 종속된 개인을 만들어 낸다.



뱉은 침을 다시 삼키당가? p. 24



그러나, 이 바닥 최하층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만드는 세계가 눅눅함과 비루함만 있을쏘냐. 이들이 힘을 다해 움직이는 것은 일에 '돈'이 걸려서라기보다, 돈을 받을 수 있었던 '니노미야', 즉 자신의 이름 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인물들을 마냥 미워만 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구와바라와 니노미야는 서로를 재수 없어 여기면서도 결코 콤비를 벗어나지 않는데. 이 둘조차 결국 돈에 엮인 관계이겠으나, 끝에 가서는 끈질기게 의뢰받은 일의 성사를 위해 분발하는 모습이 묘한 감정을 남긴다. 작가는 이들이 겪는 때로는 위험하고, 때로는 실소가 터지는 상황을 서핑 타듯 스릴 넘치게 그린다. 이 와중에 이들의 입말이 어찌나 입에 잘 붙는지 가령 "뱀은 뱀이가는 길을 알제" 라는 구와바라의 구성진 사투리며, 바닥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들이 촌철살인 까는 니노미야의 말씨가, 돈을 받아 둔 일에 대해서 어떻게 몸을 굴려서라도 단서를 찾아내는 건설-산업폐기물이라는 음지의 분야와 예측 불가능한 시너지를 낸다. 이들이 물속에 빠지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폐기물 건설을 둘러싼 거미줄 같은 '인물 관계도'를 표방한 '이해 관계도'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또한 작가는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린 세계를 더욱 실감나게 환기하는데 공들인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부조리 한 것이다. <산업폐기물 처리법>, <산업폐기물의 처리 및 청소에 관한 법률 개요> 등 전문서를 참고해 일반인들이 미처 몰랐던 건설, 특히 산업폐기물과 관련한 현실을 세밀하게 구현한다. 



"이거 받아."

"뭔데요?"

"노래방 우대권이야."

가게 이름은 '캔디스'. 내일이라도 망할 것 같다. p. 536



오백페이지를 넘는 소설 끝에 남는 대화다. 이 썰렁하며, 들리지 않는 냉소며, 이들의 대화는 이렇게 쿨함으로 점철되어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 정작 자신들은 웃지 않으면서 뭉뚝한 대화만으로 서로의 친밀과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 대사를 어떻게 할 거냐. 49년생 노련한 작가는 이십대 젊음의 니노미야, 세상만사 쫄것 없는 '쏘쿨'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고, 함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능구렁이, 노회한 너구리 구와바라를 만들었다. 동고동락, 몸 뒹굴며 다치며 서로를 구하고 욕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고작 ‘노래방 우대권’을 건네 그동안의 고마움을 1/10로 희석시킨다. 끝이 아쉬워 당장 처음을 펼치고 다시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매력 있는 소설은 고맙게도 작가의 첫 작품이다. 이후 소설에서 이들 ‘콤비’를 볼 수 있다는데 '다행'을 느낀다. 소설의 ‘힘’이랄지. 작가는 이 소설의 연작 <파문>으로 2014년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덧붙임_니노미야의 독백이 '니노미야는~했다'로 처리된게 아쉽다. 주인공 이름이 없어도 이해 가능한 것이 다수다.

536페이지 원래 인용글은 다음과 같다. 


"이거 받아."

"뭔데요?"

"노래방 우대권이야."

가게 이름은 '캔디스'. 니노미야 생각에 내일이라도 망할 것 같았다. p.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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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8 0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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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8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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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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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신이 읽을 차례-기 드 모파상





믿음직스러운 선택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내가 알거나당신이 알거나그래서 우리가 알거나한 스푼 맛에 대한 만족이 그렇지 않나. 31개의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고 그들은 외치지만 어떤가, (입안에서 바스락거리며 터지는 외계의 맛은 다신 먹고 싶지 않다)먹는 것은 늘 정해져 있다고르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 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물론 다 알 필요도 없지만) 유구한 맛이라면 나 역시 한 번쯤 알고 싶어진다. 박힌 글씨와 없는 여백을 모두 읽어내야 하는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기울이는 시간과 노력이 다른 활동에 비해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르고 싶다하품이 따라오는 것 같지만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아온 이들의 시간의 단위가 한 세기로 접힌다.

 

무려 톨스토이와 니체가 극찬한(!) 이 작가의 단편집은 순서에 상관없이 손 가는 대로 어디를 펼쳐도 만족이다. 63개의 단편을 수록했고, 803페이지의 두께를 기록했으며 책의 제목은 작가의 이름이 되어 '기 드 모파상'이다그 유명한 <목걸이>로 한 때 여느 유년 깊은 한숨을 불러일으켰던 이충격적인 결말에 모파상의 소설을 약간 '공포'스럽다고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위트와 풍자가 전부라는 듯사랑연애가족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에서도 어느 한 문장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이런 성실성에 탄복하면 그것 말고는 쓸 것이 없었다는 듯 태연한 마침표로 답하는데읽다보면 이 사람 얼굴이 궁금해진다대부분 다섯 장을 넘지 않는 간결한 분량에도 백 수십년 전 프랑스를 속속 그려내는데 망설임이 없다내용이 길다고 무엇을 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


<비곗덩어리>는 단편집의 표제작인 동시에, 모파상을 확실히 자리매김한 작품이라고 한다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넘는 통찰을 갖고 있다배경은 전쟁이 차분해진 시기주민들은 프랑스를 점령한 프로이센 군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무렵으로그 중에는 좀 더 담대하게 프랑스군이 점령한 지방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 마차에 탄 10명의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인물 소개부터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여섯은 계층이 다르나 연금을 받는 부유층두 명은 수녀한 명의 남자는 공화주의자마지막 여자는 매춘부로 인물 소개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비곗덩어리로 소개된다. 9명이 이름과 한 명의 별명은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남녀 사이에서는 파벌(?)을 형성한 대화가 시작된다.


우선 수녀들은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세계에 함몰하며 세 부인들은 계층이 다름에도 매춘부 덕분에 친구가 되고세 남자 역시 공화당원을 보고 돈으로 인해 형제와 같은 공감대를 느낀다이들은 상황보다 '공간'으로 기울여 설명되는 곳에서 행동이 달라지는 데 이것을 유념해 읽을 필요가 있다. 1) 외부가 아직 전쟁중이라는 전체적인 상황에서 2) 마차라는 격리된 공간이곳에서 계급이 높고 낮음과 인물의 고귀함과 비천함부의 유무는 간단하며 심각한 '배고픔'의 문제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져 버린다그리고 우습게도 비곗덩어리가 갖고 있는 먹을 것으로 구원 받는데이 자존심 상하는 고마움은 잠시, 3) 독일인 장교가 점령한 마을의 호텔에 마차가 서면서(공간의 이동이야기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사건은 좀더 복합적으로 던져지며 인물들의 양상 또한 두드러지게 달라진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서는 인물 소개만큼 기억할 만 하다. 적국의 마중에 가장 먼저 순종적으로 두 수녀가 내리고 백작-공장주-상인부부 순으로 별 저항 없이 이어진다문 앞에 가장 가까웠으나 가장 마지막에 비곗덩어리와 공화주의자가 화를 참으며 내린다그 날 밤독일군 장교가 비곗덩어리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말을 전해 오는데이때 처음으로 비곗덩어리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엘리자베트 루세 ''으로진중하게 전해져 온 말은 '자는 것'의 문제여서 비곗덩어리는 화를 내며 거절한다독일인 장교는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말을 매지 못하게 하고그 때문에 마차는 마을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 먼 자들의 도시>와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제한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모습은 다만 소설 속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인류의 샘플이 되기 때문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갖는 괴로운 배경은 인간의 다양한 유형들을 기꺼이 드러나게 했다이 세계에서는 살아야 하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운그야말로 본능을 갑칠한 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소설은 평소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만나고 부딪히면서도 과연 희망이라는 것을 도출해 낼 수 있느냐아니 그전에 희망이 있느냐 는 확신 없는 물음을 던졌다메시지는 다르겠으나 문제에 다가서는 방식은 비슷한 것으로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을 꼽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70억을 넘는 인구를 100명으로 축소해 지표를 설명한다. 이 책이 회자 되었던 이유는 백 명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숫자를 불러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들을 비로소 상상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마차의 '열 명역시 생각해 볼 만 한 인물의 조합이다마차에 올랐던 열 명과 마차에 타지 못한 일반인들의 모습은 당시의 프랑스를 떠올리게 한다일반인(농부)은 마차가 내린 호텔에서 두드러지게 나온다땅에 매이고가족에 매이고프로이센 군인들에 매였을 그들은 어디를 떠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이 적군과 동화되어 그들의 시중을 든다그들에게는 누구의 통치가 아니라 생활의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그러나

 

비곗덩어리의 마지막은 몇 페이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상황에 따라 바뀌는 인물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마지막을 덮으면 웃음기가 싹 가신다모파상은 어떤 인물이 대표하는 성향 하나를 찬미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참여와 윤리를 외치는 공화주의자는 상황을 비웃거나 아는 체 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라마르세예즈'를 불러 부유층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뿐이다신앙으로 투철한 수녀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을 모면하고 방패삼는다자신의 이익에 맞춰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며 언제어디서나 눈을 쉽게 감는다자신들의 배고픔을 구원했던 비곗덩어리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부유층그들의 아메바적인 뇌새김과 뻔뻔함에는 손발을 모아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그러나 쓰고 가감 없는 비판 속에 나는 과연 어떤 인물일 것인가하는 물음이 따라와야 한다. 대답은 마찻발이 굵게 눈을 가로질러 패이는 소리에 잦아든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세어지지 않는 것은 소리가 없다는 말일지 모른다내지 않는 것인가없는 것인가 다시 묻는다.


'비곗덩어리'는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기고 62개의 다른 이야기에 바통을 넘긴다비곗덩어리라고 하면 역시 김수영의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라고 이전의 말을 다시 옮겨 적는다이런 물음이 여기 있어 알린다서둘러 나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미 단편만큼 긴 얘기라니. 그러니 모파상, 다음은 당신이 읽을 차례다. <비곗덩어리로> 옹졸한 분노를 이야기하며 끝을 내달렸지만 단편들 중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도 많고 짧아서 읽기도 좋다. 그 중에 '봄'을 추천한다. "선생, 사랑을 조심하세요. 사랑이 당신을 찌르고 있습니다. 나는 러시아 사람들이 코가 얼어붙은 행인에게 경고하듯 선생에게 이것을 알릴 의무가 있어요" 가을이 다 왔으니 새겨들을만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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