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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ㅣ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
젠더는 한 개인에게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한 개인의 인간됨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는 내가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사회와 협상하려는 나의 노력이다. 214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기 위한 책이다. 『젠더 트러블』을 개설하는 1장과 주디스 버틀러가 각 연구자들의 논의를 비판한 5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버틀러의 기본적인 입장은 개략적이지만 성실하게 소개했다. 이것은 조금 길지만 다음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옮길 필요가 있다. 그의 입장은 '결정적인 토대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남녀의 성차, 통일되고 안정된 범주로서의 여성, 근친애의 금기에 전제된 이성애 중심주의는 사실상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복된 규제적 이상의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산해낸 사법 권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동성애적 욕망은 억압되기에 앞서 애초에 배제되어 욕망으로서 인정도 인식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동성애적 욕망'을 밝히는 과정인데, 여기서 그는 '원본'이 없고 재현만 있는 관계를 발견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관계는 복사본 대 원본의 관계가 아니라 복사본 대 복사본의 관계라는 설명이다. '원본조차 자연스럽거나 본래적이라는 관념의 패러디'에 불과 하다는 주장은, 사회에 의존적이다 못해 '우리 속에 허물어지는 나'32를 발견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 중요한 까닭은 '규범'의 허구를 밝히고 원본조차 원본이라고 여기는 것의 패러디일 뿐이라는 논의를 수면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이성애적 '몸'과 그것과 '다른 움직임'이라는 까닭으로 인간으로 간주될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정언으로 받들여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다움'속에서 '나'라는 젠더와 어떤 섹스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도 전에 규정 지어지는 삶을 받들고 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위험하지 않는 사회는 어디에 있을까. 버틀러는 혼란을 가속해 해체에 닿자는 주장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규범을 탈출해 비로소 '나'라는 젠더와 섹스를 구성해 나가며 성립할 수 있는 해방으로서의 '가능성'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소수자라고 부르는(불리는) '장애인과 크로스젠더, 퀴어와 성적 소수자들'은 '그냥' 존재 할 수 없다. 단단한 '규범'과 싸워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이것과 아무 유사한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길 바란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노동 규범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생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그런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의존하게 만들어 이익을 창출한다. 허나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215
위의 문장은 시대를 바꿔나가려고 하는 이들의 등은 얼마나 연약하면서 강한것이며, 연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묻는다. 게이이면서 레즈비언인 주디스 버틀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또는 여성이라면, 게다가 이성애자라면, 사회에 자신의 젠더를 타협하고 맞춰나가면서 탈락되었던 나 '다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고, 만연한 섹스와 젠더의 구별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고 알아나갈 수 있었던 이들이 가졌던 그들 '다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가혹한가. 그리고 가혹한 곳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없는 우리'를 생각해본다. 생각과 유불리의 '홈을 평평하게 만들기'. 이것은 결국 생존할 수있는 영토를 넓히는 일과 귀결된다. '내가 있는 우리'가 되는 일의 가능성은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제목은 '후기 버틀러가 주장하는 공존하는 삶, 살기 좋은 삶,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다.'216 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