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알'은 척추동물의 기관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척추동물인 사람의 눈을 가리켜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척추동물을 살펴보자. 개,소,말,고양이 등등 다르지 않다. '눈알'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양이 눈', 이라고 하지 '고양이 눈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때로 식탁에 올라오는 생선요리를 보고 '조기 눈알'이나 '동태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것은 생선을 자주 만나지만 우리의 삶이 생선과 가까운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생선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또는 아주 작은 것을 이르는 말로 '모기 눈알'이라고 '눈알'을 쓰는 것 같다.(엄밀히 말해 모기의 눈은 '눈알'이라고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생선처럼 역시 모기와도 멀다. 몸으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으로부터는 아주 멀다. 사람이 별 가책 없이 마주치기만 하면 잡아 죽이는 몇 안되는 생물아닌가. 여기까지 보면, 눈을 이르는 말인 '눈알'은 친밀한 대상이 아니고 잘 모르는 대상을 '함부로'부를 수 있는 말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눈알이라는 기관이 있지만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눈알을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도 아닌데 말하는 순간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천지사방이 '눈알'인데, 눈알은 부재한다.
'눈알'이 '눈알'로서 자유롭게 불리는 곳은 있을까. 아마도 학습용, 교구용으로 나오는 플라스틱 재료의 이름표에서 일 것이다. 원래 척추동물의 기관을 이르는 눈알이라는 말은 무생물, 그러니까 살아있지 않은 것, 눈이 있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상태일 때 자유롭게 쓰이는 것이다. 이때 '눈알'은 전체의 부분을 일컫는 말로서 충실하다. 자, '눈알'은 4mm부터 40mm까지 다양하게 수북히 준비되어 있다. 눈알을 흔들면 검은자가 흔들린다. 창고에 쌓여 있는 '눈알'들. 이제 무엇으로 만들지 고민하는 이의 손길로 '눈알'은 '눈'이 될 것이다. 외계인이라고 우기고 얼굴에 눈 열개를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일단 눈이 된 후에 다시 '눈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눈알'이었던 것이 형체를 갖추고 나면, 그 대상은 나를 '눈'으로써 바라보기 때문이다.
<눈알 사냥꾼>을 이렇게 이해해 보았다. '눈알'이 내게 주었던 위협적인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하나의 개체는 눈알을 갖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서 '눈'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으로도 '눈알'로 해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말'에서조차 되지 않는다.
공은 튀어 오른 만큼 낮은 곳에 닿는다. <눈알 사냥꾼>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저편에 대한 확신이었다. 눈을 '눈알'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사냥하는 사람의 반대편에는 '눈알'을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아귀 같은 '세월'에 '눈알' 생각을 하며 리뷰를 쓰고 있다. 참혹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자리에 대한 '무책임'이전에 인간에 대한 공감과 예의가 이렇게 '없는' 사람, 사람들이 이 짧은 세월 속에 밝혀지고 있다. 분노와 눈물의 시간 가져다 준 것이 있다면 거짓들 사이에서 죽어버린 진실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드는 이유는 책 아닌 다른 무엇을 들기 위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