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 메메드 - 상
야샤르 케말 지음, 오은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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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이 비로소 '누가' 될 때-의적 메메드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모습이 희박하거나 사라지려 할 때 영웅보다 먼저 몸을 돌린다그들은 영웅을 배신한 것인가대답은 '그들의 뒷모습을 비난할 수는 없다'로 대신하자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영웅이 그들을 배신한 것 일테니까그들이 끝까지 기다렸을 경우영웅이 침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자신도 가라앉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그러나 자신 스스로 구원의 모습이 된다면더 이상 무엇을 기다리거나기다림에 지치거나 혹은 오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그러니까 이것은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문제다.


지주 압디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진 후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메메드는 상상하지 못한다. 압디의 땅원래는 압디의 것이 아니었을 그것을 메메드는 모두에게 나누어주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문을 걸어 잠근다메메드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생각은 불과 두 쪽을 넘기지 못하고 변화무쌍하다죽은줄 알았던 압디가 살아있다는 ''뿐으로 그렇다메메드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실망지주를 죽였다는 소식으로 -환호했던 입을 씻고메메드가'우쭐대던모습으로의 환원그리고 마침내 '지주'가 '우리 지주 어른'으로 발화되는 변화메메드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압디는 언제든지 살아올 수 있다는(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확실함이 만든 대화다메메드는 한 명이고마을사람들은 여럿이다다시 말해 '하는사람은 한 명 뿐이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였다이토록 더디게그 많은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디게 움직이지 않는 사회는 이 때문인 듯 하다.

 

작가가 말하듯 메메드의 삶이 불운한 이유를 나 또한 알고 있다. '그가 천 명의 지주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또 수천 명의 지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테고가난한 자들은 영원히 비극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은내 머릿속에서 그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것이다마을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압디는 죽일놈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내가 있다는 것을 혼자서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듯이내가 알고 있다는 것 역시 혼자서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는다동어반복인가그러나 다시 한번 반복한다멈추는 것을 멈추라, 메메드가 움직였던 동력은 누군가의 행복이 아니라 핫체와 함께 하고 싶었던 자신의 행복이었으니 말이다그러니까 멈추는 것을 멈춘다는 이유로 노여워 하거나 자신을 불행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일궈 놓은 행복에서 행복하고그 행복이 비좁다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줄 역시 '누구'에게 말인가.

 

+

몇가지 구절이 남는다감옥에 있는 핫체에게 메메드의 소식을 전하는 대목. '메메드가 얼마나 컸는지키도 크고 몸도 아주 탄탄해졌지 뭐냐미나레* 만큼 커 보인다니까. 473' 미나레를 직접 본 적 없지만 메메드가 그려졌다그리고 이어서 핫체도 그릴 수 있었는데메메드가 동굴에서 핫체에게 권총을 건네며 '집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513 물었을 때 '거울!'이라고 대답했던 대목에서 단박에 알았다그냥 사람으로사랑하며 살고 싶었던 남녀였다. <의적 메메드>는 여전히 이어지어져 지금 어디에서도 있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설은(소설이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안심이 된다메메드가 '검은 구름처럼 마을을 관통해 떠나버'리면서 끝난다. 한때 '모두의 희망'이라고 불렸으나 모두의 실체는 앙상했고 메메드는 자신의 희망도 지키지 못했다. 메메드는 이것으로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온다.

 

 


* 미나레 : 이슬람어로 등대라는 뜻. 이슬람 신전 앞에 부설된 뾰족한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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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2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사람 작품 가운데 독사한테 물렸나.. 뭐 그런 비슷한 제목 소설을 읽었는데 꽤 독특하더라고요... 이 책도 읽어볼 만하하겠습니다..

봄밤 2014-06-2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화가 독특해요. 다수의 말을 툭툭 받아적는 데 인상깊어요. 터키 문학을 처음 접해서인지, 낯선 풍경이 주는 독특함도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6-30 09:43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저만 그런 생각을 했는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터키 문학이 가만 보면 좀.. 뭐랄까, 구술 문학적 흔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령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요 ?

봄밤 2014-06-30 10: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타령! 와닿아요. 신긴한 건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 다수의 대화라는 점이요, 구시렁 거리는 소리같은 걸 절묘하게 집어낸달까요. 별다른 설명없이 대중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터기소설은 처음인데, 앞으로 찾아보고 싶어요.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
에두아르도 라고 외 지음, 신미경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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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증정을 빨리. JPG

<증정을 두 배 빨리 하고 싶었던 열린책들>


 이 책은 2010년 로베르토 볼라뇨에 대한 글로 엮어 낸 프랑스의 잡지 『시클로코스미아Cyclocosmia』 3호의 내용과 국내 필진의 글을 함께 실은 책이다. 국내외의 작가, 비평가, 번역가, 그의 주변 인물들,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로베르토 볼라뇨를 주제로 작가론, 작품론 등의 비평과와 더불어 그에 대한 에세이와 그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오마주 작품을 담았다.




 이 책은 볼라뇨의 해설이 아니며, 볼라뇨를 성심껏 분석한 글도 아니다. 한바탕 볼라뇨에 취한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 자신을 통과한 볼라뇨를 그려놓은 화집이다. 어디서 뻗어나왔는지 선을 도통 이해할 수 없으나 색채 하나는 화려해서, 감염의 동일한 증상인듯하다. 한 작가의 화풍을 다 알기도 전에 그를 해석한 각각의 프리즘을 보는 것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야말로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이다.


볼라뇨의 계산법? 그것은 <문학+병=병>이다. 어차피 일체가 파국으로 치닫고 종국에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라해도, 그 종착지가 어디든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아마 이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무덤덤해 보이는 그의 몇몇 픽션들 역시 아무런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마치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갑자기 중도에서 유예된 것처럼 끝맺는지도 모른다. 216


어느 순간은 아니었겠으나, 볼라뇨는 어느날 색색의 표지와 무려 나무로 짠 '전집 케이스'에 나타났다. 길게 등장한 가운데 실제로 읽은 것은 몇권에 지나지 않아서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 이 날뛰는 책을 진득히 볼 수 없었다. 감염 되기도 전에 감염기를 읽는 것은 오히려 몸을 잔뜩 세우는 일이지 않나. 걸려들지 않으려고 면역력, 마음의 경계를 높인다.    


필진들의 광란과 불편함 사이에서 안정을 찾았던 것은 마지막에 우리나라 필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의 이해가 적어도 누군가를 통해 번역된 것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심. 둘째. 처음 볼라뇨를 만났을 거리가 어쨌든 나와 동일했을거라는 위로가 있었다. 그러나 함정은 장정일, 금정연도 어지간히 취한사람들이었다! 장정일은 마지막 페이지를 세상에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한 그림을 그렸는데, 봐주기 어려울 정도다. 부제가 그림을 채우는 상황이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제일 마지막장은 볼라뇨의 여러 작품을 번역했던 역자였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그는 감염기를 감추고 비교적 차분하게 볼라뇨의 생을 짚고 그의 문학세계를 짚어주었다. 특히 로베르토 볼라뇨의 삼각형은 얼마나 유용한지, 앞으로 그의 작품을 접할 이들에게 듬직한 지도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삼각형이라니. 그의 소설은 각각 지향하는 바가 삼각형처럼 다르다니. 그래서 역자는 마지막 장에 '지금, 볼라뇨를 읽어야 할 이유'를 정리해 놓았다. <그러하니 볼라뇨를 읽는다는 것은 추악한 현실을 보는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그 현실의 공모자인 한 그의 문학을 추적하는 일은 불편한 모험이다. 부디 누구든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모험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313> 대답 대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제 열린책들 볼라뇨 박스 풀셋 앞에서 말없이 기웃거리는 수밖에. '방법'이,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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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26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라뇨 읽는다 읽는다 결심하는데 계속 못 읽게 되네요...

봄밤 2014-06-2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무엇이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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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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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하드케이스 여행가방, 그 옆에 고급스러운 브라운 색 가죽가방. 그 위에 자연스럽게 말아올라간 여행모자. 반쯤 열린 현관에 짐을 기대 놓았다. 가뿐하게 채비를 마친 가방들은 주인을 기다린다. 여행의 기대 때문일까, 바깥은 '바닥'마저 눈부시다. 그러나 생활로 머무는 안쪽은 벽돌의 그림자며 색이며 하나같이 명확하다. 더이상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을 덮어도 표지는 그대로다. 사진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현관을 나서지 않을 가방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만을 보여준다. 사진은 시간을 멈추므로, 이 평화로운 표지로는 난과 핑핑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어제라는 24시간짜리 예고편도 내일을 확실히 감지 해 본 적 없듯이. 중국 아니라 미국에서의 삶, 두 개의 언어와 두 개의 생활에서 난은 두 번의 고비를 찾아간다. 새로운 나라에서 정착이 한 고비였다면, 다시 휘청이는 고비는 ''.

 

'자유로운 삶'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하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여러개를 낳고,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핑핑이 대답하는 자유로운 삶과 타오타오가 대답하는 자유로운 삶, 그리고 난이 대답하는 삶은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른 방향을 가르키는 삼각형의 모서리처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욕망은 멀어질 뿐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유'를 이야기 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난의 삶은 그의 가족으로 지탱되지만 동시에 그의 자유가 사랑하는 가족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나는 그런 헛소리 못 받아들여요. 내가 왜 희생을 해야 하죠? 나는 이미 충분히 희생했어요. 게다가 '희생'이란 우리의 비겁함과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에요. 내 아들한테는 자기 인생이 있고 나한테는 내 인생이 있어요." 139

 

소설은 정직하다.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 자전적인 자신의 삶을 어떤 수사나 특별한 장치 없이 3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말한다. 팍팍한 빵을 씹는 식감인데, 이 무딤에서 맛이 찾아온다. 작가가 알고, 내가 아는 공통의 맛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야기가 솔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 또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날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난 타오타오는 그에게 '두시백'*이라고 했다. 난은 그 말을 알지 못했다.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한번은 아들에게 철자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157 난은 그러면서 딸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을 맺는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별 의미 없다고 답할 수밖에. 그저 이 쓸쓸함을 알아주길 바랄뿐이다. 가족은 노력과 관계 없이 자꾸만 부딪히며 상처를 준다. 이런 장면이 감정을 배제한 채 자주 나온다. 마음 없어서 더 남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줄기 중에 난의 막내 동생 닝이 이민을 고민하며 난에게 묻는 대목을 기억해야 한다. 난은 막내 동생이 늘 어린애였고, 그에게는 외국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갈 힘이 없었다 335고 기억한다. 그러나 난 역시 미국에 올 때, 그 같은 걱정을 말 없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낯선곳을 개척하고 말고의 문제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달려있는 일이라는 것을 난은 알지 못한다. 닝은 말한다. "외로움은 두렵지 않아. 희망이 없는 것보다 낫잖아. 여기는 완전히 망가졌어."336 마음을 크게 움직였을 말에도 불구하고 난은 닝의 나이와 닝의 어학능력, 그밖에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수 없는 이유를 댈 뿐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 난이 바랬던 모습일까? 난은 자신이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못견뎌 하면서도, 다른이에게는 '현실'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다시 '자유로운 삶'이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 자신에게 올 때와 다른이에게 갈 때 다른 기준을 부여하는 것. 삶의 어깨가 어긋나는 장면같다.

 

다시 돌아와. 난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될수록 그 상태를 경계한다. 그에게 쓰는 문제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자유'로 있을 수 있는 삶. 보통의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 그는 재능과 주어진 여건과 관계없이 '쓰기'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한다. 쓰는 것의 결과가 무엇이던가에 써야한다. 그러나 난이 시에 집중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생활과 멀어지는데, 여기서 핑핑과의 불화를 막을 수없다. 그러나 난에게 '인간은 삶을 완성할지아니면 작품을 완성할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문제는 지금의 삶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국 시를 쓰고, 발표한다. 더 이상 가게를 유지 할 수 없어 정리하지만 모텔 카운터를 맡아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난은 이 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며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이 안온을 오래 오래 유지하기를 바라며 소설은 끝난다해피엔딩인가?  고뇌 끝에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일까. 이런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이 소설의 끝은 이보다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을 정리하기 전, 돈에 대한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난은 가게 카운터의 현금을 꺼내 돈을 불태우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야말로 미친것이다! 그러나 이십분 후 난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가지를 썬다. '핑핑이 체로키 농부 시장에서 골라서 산, 부드럽고 씨가 없는 가지였다. 그는 할 일을 하면서 아주 조용히 나머지 하루를 보냈다.' 418 방금 전까지 돈을 꺼내 태우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가지를 하루종일 잘랐을 난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나는 이 이십분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십분. 조용히 소리가 남는 도마 위. 또 무엇이 빛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은밀한 미침의 순간을 제외하고 나면 말이다.

 



 

*douch bag 얼간이라는 의미의 속어

**윌리엄 예이츠의 <선택>의 일부 379p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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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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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들을 다시 읽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오 맙소사'였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 나서 들었던 두번째 생각은 완전히 다시 쓰자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는 중년 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0


고작 한 페이지 넘기고 확신했다. 핀천, 완전히 반했어! 이런 쑥쓰러움과 유머, 유쾌함과 연민이라면 그의 작품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해를 기울일 '의지'가 있다고. '의향'이 아니다. 노력을 하겠다는 약속이었고, 새끼를 걸고 흔드는 폼에 믿음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작가 서문''어린 친구'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급해졌다. 아직 어린 친구를 만나기도 전에 그를 이해해 버릴까봐. 서문을 듬성듬성 넘기고 바로 작품을 읽었다.

 

로치 요새, 이곳의 일기는 좋다. '햇살은 또 얼마나 뜨거운데' 58 맑은 날도 많으면 괴롭다. 권태로운 빛이 넘쳐 땅 위에 아무렇게나 흐르고 그 위에 하염없는 시간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색으로 끊임없이 덧칠한다. 이곳에서는 오히려 무의미한 일이 의미있어 보일 지경이다. 주인공 러바인은 여기 로치 요새, 그러니까 군대에 있고, 대학졸업장을 가지고 있지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이보다 나을 것이 없고, 돌밭에 뿌려진 씨 같고, 부대 안에서 가장 게으른 녀석이다. 58 자신에 대한 동료들의 설명 끝에 러바인은 묻는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군대에 처박혀 있을까?" 이어진 대답은 '로치 요새만큼 돌 많은 데도 없어.'. 실소다. 마음의 행방을 잡을 듯하면서 뻔하게 놓쳐버리는 서술은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앞은 보여줄 생각도 없고 지나가서 잡을 수 없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일이라는 듯 러바인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는 가장자리를 오래 보여준다. 그래서 '습작에 가까운 소설'이라는 작가의 서문은 맞다고도 할 수 있고, 지나친 우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같다


비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일기에 불구하고 소설 말미에 가면 비가 온다. 그 비는 예상 가능한 로치의 매일 같은 날을 흔든다. 하루쯤 땅도 식고, 러바인의 머리, 혹은 몸도 식을 것이다. 그래서라고 잇지는 않겠지만, 러바인은 ''가 싫다. 머리가 맑게 개이는 일기는 원치 않는다. 이 푹찌는 날씨와 함께 인생도 그러하고자 한다. 서른살, 혈기왕성한 나이이지만 그는 움직임을 원하지 않는다. 이 조용하고 변함없는 햇살 속에서 배를 찌우고, 야한 소설을 읽고, 여자와 한번 자보는 '하루'를 떠올릴 뿐이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로치의 기후 때문인가, 50년대, 미국을 감싼 기후 때문인가? 순응과 획일이라는 집단에 안정하고자 하는 조용한 세대의 출현을 러바인에게 투영한 결과라면 어떨까. 소설집 가장 첫번째 자리를 꽤찬 미숙한 작품은 당시 미국에서도 외떨어진 사회, 게다가 군대, 어떤 청년으로 하여금 사회 전반에 흘렀을 풍경을 정확히 겨눈다.


'The Small Rain' 이슬비라는 제목이다. 이슬비는 비를 맞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옷은 젖는 희한한 이름이다.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은퇴 이후 따위에 눈길조차 주지않는 러바인은 그 세대의 밖에 있고자 한 이는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차마 지켜볼 수 없던 그의 무력함은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거부하려던 불온함이 아니었냐는 의혹이 충분하다. 다음 같은 문장을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 두사람은 바보 같은 개구리 울음소리에 계속 시달린 끝에 서로 떨어져 누웠다. "커다란 죽음의 한가운데에." 러바인이 말했다. "작은 죽음이 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 라이프지의 사진 설명 같네. ''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 맙소사." 73 그러니까 '삶의 한 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는 대목이 정녕 청년에게서 나오는 소리인가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청춘은 조로가 아니냔 말이다. 

 

오, 맙소사. 어쨌거나 비는 내렸다. 소설은 끝났지만 그 후로도 왔을 비다. 미국의 그 날들도 지나갔다. <이슬비>에서 <로우랜드>로, 또 다음 작품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아직 맨 앞에 있었다. 일부러 다 읽지 않고 지나왔기 때문이다. 어린 친구의 소개는 이렇게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혹은 그것을 핑계 삼아 길을 걷다가 맥주를 한잔하며 옛 시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나서 제일 처음 생각하는 것이 다짜고짜 돈을 빌려주는 거라니!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솔직한 걱정과, 유머러스하게 넘기는 중년의 그가 묘한 표정을 만든다다. 그들이 공유했던 미국의 날들은 통과하는 중이거나 통과한 후다. 시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만날 거리를 떠올리는데, 그날의 조명이며, 습기며, 길 양쪽의 풀냄새까지 끼쳐오는게 아닌가. 그때 주고 받을 이야기만 공백이다! 이제 어린 친구를 만나보았으니 어서 작가 선생도 만나야지 다짐한다. 그들은 훗날 내 기억 어디에서 만나게 될 것인데, 아마 내가 생각해둔 그 길이 맞을 것이고 차갑게 얼린 맥주를 두사람에게 들려줄 것이다. 오늘, 한차례 소나기가 다녀갔고 멀리서 장마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맞았다'는 생각 할 틈 없이 모두 젖고 마는. 그런 비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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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용산 - 딸에게 보낸 편지
김재호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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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꽃-꽃피는 용산

 

 

만화의 칸 모두를 자를 대고 그렸다. 그래서 읽는 이는 어디서부터 그리기 시작했는지 쉽게 알아 챌 수 있다. 한 칸 한 칸 공간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교도소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의 칸일 터였다. 자를 밀고 올라오는 잉크는 자주 뭉쳤다. 잠깐 숨을 돌리거나 마음이 저 모르게 벌어졌을 틈일 것이다. 이 떨림을 고스란히 담아낸 손이 고마웠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칸들이 모두 같은 크기를 갖고 있었던 것. 그리기 전에 생각해 두었을 분할이다. 모두 같은 크기로 담자. '어떤 이야기라도'. 나는 이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날 용산의 망루에서 불타고 있는 컨테이너도, 교도소 운동장에서 본 꽃들도, 들리지 않는 딸의 울음도 모두 같은 크기의 칸에 그려져 있다. 만화에서 모든 칸이 동일한 크기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슬픔이라는 말로 담는 것이 폭력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진동과- 삶의 궤적을 지나온 기억이 고르게, 과장 없이 그려져 있다. 어느 한 칸은 크게 그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하니까,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들어왔으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이 마음은 저자에게 '할 수 없는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큰 칸을 그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작은 칸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작게 그릴 수 없다. '모두' 소중하므로.

 

지금도 밀양, 진도, 그 밖에 도처에서 일어나는 저울질은 가치 있다는 것을 안전한 쪽으로 옮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은 어디로 내몰리는가. 자본과 권력의 준엄한 등식으로 용산과 삶에서 유배된 내가 있다. 내가 그리는 만화는 한 장의 종이에 그리움을 전할 뿐이지만 이곳의 크기마져 동일하지 않다면. 세상에 소중한 것들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자리가 없다, 자리가. 살아있을 자리가 말이다. 그래선 안된다. 어떤 칸도 그 옆의 칸보다 크지 않고, 어떤 칸도 어떤 칸보다 작지 않다. 만화는 마음의 확장과 소멸을 어떤 장르보다 섬세하게 폭주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일한 칸에 성실하게 그려간 것은 그날의 일과, 헤어진 가족과의 살가운 추억이다. 보고 싶은 이들의 얼굴이, 눈동자가, 눈물이 모두 한 손에서 비롯된다.

 

세 가지, 많아야 네 가지 색으로 그려진 만화의 기록을 시간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가 감옥에 있는 오 년은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무려 중학생으로 '변하는' 마법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안 국가가 몰아간 용산의 죽음은 바래고 잊혀지는 것 같다. 그러나 <꽃 피는 용산>은 산 이는 그날을 떠안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움이라는 폭력으로 생생히 아프다. 세상에 무엇으로도 다시 채울 수 없는 아빠와 딸 사이 공백이, 아내와 떨어져 서로를 만질 수 없는 안타까움의 날들이, 아빠 없는 아이의 하루와 남편 없이 혼자서 생활과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의 날들이. 그리고 아들을 감옥에 간 이후로 돌아오는 당신의 생일상을 받지 않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 네가 나오는 날이 내 생일'이라는 이 고전 같은 대화가 아직도 이 땅에 울린다.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세련되어 나와 거리가 먼 것, 그래서 이야기와 나의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안심하고 무뎌지고 싶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매끈한 선들에 편했던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구나. 손결 알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칸마다 울컥한다. 이 두께를 이루다니, 그러나 만질 수 없는 시간이라니, 이것의 배로 많을 거라니, 이 책이 나오고도 진행되는 내일이, 지하철을 타고 스쳐지나는 서울의 풍경이 이렇게 평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 ', 필 것인가 용산' 물으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들릴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이 어떤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다만 이 작은 기록으로 '용산을 기억하라' 기대 할 수 있을 뿐이다. <꽃 피는 용산>이 선명한 꽃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음에 핀 꽃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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