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에 꿀꺽!
카이오 히터 글, 로랑 카르동 그림 / 느림보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 오리 일곱 마리가 연못에서 참방참방"


그림책은 '아기 오리 일곱 마리'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말해볼까. 아기 오리는 '어미'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참방참방, 이라는 귀여운 말에는 어떤 근심도 없이 태평하다. 표지에서는 일곱 마리 아기 오리는 똘똘 뭉쳐 수면 사방을 내다보는데, 서로를 제법 단단히 지키는 것 같지만, 위험은 그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악어는 수면 아래에서 뽀글뽀글 숨을 쉬며 한눈에 아기 오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그림에 "한입에 꿀꺽!"이라는 (!느낌표까지 가미된) 제목. 긴장을 이렇게 단순한 장면에 한 줄의 글귀만으로 이뤘다.



책을 작은 손으로 집어 든 아이가 있다. 자신처럼 작고 귀여운 아기 오리를 바라볼 너덧 살의 아이. 이 나이 아이의 내면은 '초자아'라는 새로운 심리적 구조를 준비한다. 초자아는 자아를 관찰하고, 명령을 내리고, 판단하고, 처벌의 위협을 주는, 부모와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일까. 동화에는 '어미'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직 연못과 아기 오리 일곱 마리와 거대한 악어 바나베만이 전부다. 네 살배기는 자연히 아기 오리 일곱 마리에게 자신을 이입하는데. 아기 오리들의 모습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세계를 이제 자기의 것으로, 부모와 분리된 '나의 세계'로의 인지를 돕는다. 아기 오리들이 부모를 찾거나 보호를 바라지 않고 엄청나게 큰 악어와 대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내가 아기 오리라면, 이라는 가정을 설 풋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커다란 악어는 '바나베'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아기 오리 일곱 마리는 첫째, 둘째, 셋째라는 서수의 호칭만 있다는 점이다. 아직 '이름' 하나에 자신 하나를 같이 작동하지 못하는 일을 이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기 오리 한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리나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이 생겨서 분간하기 어렵고,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악어에게 먹히는 순서대로 불리는 막내, 여섯째 등의 숫자일 뿐이다. 책 표지를 다시 볼까. 오리 일곱 마리가 하나로 모여 있는 그림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오리, 성장하게 될 큰 오리가 겹치는 것 같다. 결국, 일곱 마리는 한 마리 큰 오리 이전의 모습을 뜻하고 성장하지 못한 미숙한 아이가 그리게 될 어엿한 큰 오리의 '상'을 암시한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분이 종잡을 수 없고 여러 개의 꿈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아이의 특성이 일곱 마리의 오리에서 각각 나타난다. 혼자서 참방참방 헤엄치는 걸 좋아하는 막내 오리, 허둥지둥 도망을 못 쳤던 여섯째 오리,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다섯째 오리, 멋진 이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넷째 오리. 악어 바나베는 여섯째 오리까지 순탄하게 잡아먹고(한 입에) 나머지 오리는 힘으로 잡아먹는 게 어려워지자 여러 가지로 변신을 한다. 특히 배트맨으로 분장하고는 '나와 함께 바나베를 잡으러 가자'며 꾀는 부분은 놀랍다. 배트맨이라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는 파탄으로 흘러, 이제 아기 오리는 여섯 마리나 잡아먹혀, 마지막 남은 새끼 오리는 울면서 바나베에게 빈다.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는지 당뇨병이 있다며, 뼈마디도 욱신거린다며(웃음) 잡아먹지 말라고 애원한다. 이렇게나 티 나는 거짓말, 어른의 말을 잘 담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인다. 아기 오리 일곱마리가 한 마리의 큰 오리가 되기까지. 일곱 개의 수난 일곱 번의 좌절, 일곱 번의 역할을 겪어야 한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지. 자,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만들까. 하나 남은 아기 오리는 이 위험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책을 다 덮은 후, 아이는 일곱 마리가 한데 올망졸망했던 모습에서 늠늠한 큰 오리를 하나를 발견하게 될까?


*네이버 지식백과_심리 성적 발달 단계, 심리학 용어사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시인선 65
민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어두운 갈색에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이 색은 마을 입구에서 비를 맞는 장승의 부라린 눈이고색색의 줄을 가지마다 걸친 성황당 나무의 단단함이다연기가 올라오는 지붕낮은 기둥을 이루는 손 때이며 다른 소문이 침범할 수 없는 방 입구의 붉은 글씨다지금은 사라진 마을그곳에 살았던 이들을 단단히 결속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시작은 달이다달은 존재하는 것일까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누구나 달이 있다고 하늘을 가리켜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을 끌어내 '여기 달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달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아닐까 싶다달이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과학의 일이 아닌가 하며 어물쩍 물러선다그러나 시인은 이지러지는 유약에 묻는다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목을 빼고 저것을 쳐다보았다고? 시인은 달을 보고 짖었을 늑대를 풀어놓는다. '줄을 풀고 창문으로 넘어들어온 달이 구석에서 나를 물고 어금니를 드러낸다// 오줌발이 얼마나 센지 사방 벽으로 튀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달은 나무를 잘 탄다움직이는 달」 부분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달에 관한 신화 중 가장 얼굴이 잘 보이는 달이다달은 소원을 등에 받아두기만 하지 않는다달은 유년의 등을 쫓길 잘하는 곰보 핀 개구진 모습이다시인의 주문으로 달은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움직인다시가 가진 힘은 새로운 믿음을 견지하는 데 있지 않을까아름다움이 논리를 뛰어넘는 것을 본다달이 있다고 하는 건 이렇게 말하는 거다달이 갈긴 담벼락 오줌발을 보여주면서


달을 존재하는 것으로 끌어내린 시인은 이제 '동백'을 통해 설화를 빚는다. '나는 천천히 돌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눈 덮인 지붕 아래서 죽은 자들이 일가를 이루고 산다/ (...) 파리채로 모기를 잡던 여자가 밥상을 내온다이걸 먹으라고기가 차서 주위를 둘러보면벽에 문드러진 동백들동백부분벽에 문드러진 동백이 보여주는 인상은 무엇인가시는 끝이 났고기가 찬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의 안위를 담보할 수 없다동백이 주는 서늘함과 죽은 자들이 이룬 일가의 으스스 함.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화자의 순진함이 위험해 보인다. '동백'은 다른 세계를 알리는 이정표이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연기'로 보인다동일한 제목의 '동백'을 보자. '나는 항상 그를 본다 유년의 어느 날따귀 맞은 채 올려다본 교정 한가운데서유유히 담을 넘던 사내의멋진 신발을 기억한다동백」 부분. '목줄을 풀고들어오는 달도 있는데, '민첩하게','산 너머로 달아나는동백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동백'을 잡으려는 ''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동백을 '멋진 사내'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이어지는 동백의 연작에서는 동백으로 현재와 예전을 포개 잇는.

 

'딸애가 여우에게 물렸다고새 장화에 피가 묻어 친구들이 자길 피하더라고설산에 떨어진 핏자국 따라 첩첩산중등굣길 걸어 너를 업고 오는 길동백2」 부분여우에 물린 딸을 안고 ''는 급한 대로 바위를 두드린다딸을 뺏긴다기다린다시간이 흐르고 의사는 돌이 된 딸을 돌려주는데지폐를 건네고 돌려받는 여비가 '동백몇 닢이다. '낯익은 총성만 동백나무빈 광주리에 담겨내려오는데동백3」 부분동백연작의 인상은 눈 속에서 피는 붉은 꽃잎의 기이함으로 현생과 다른 생을 이으려는 간절함 아닐지눈 속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과 여우와총성과 광주리가 떠오르는 세계로 가는 길은 끊겼다콘크리트 바닥에는 눈도 여우도 없다그러나 길마다 동백은 키 반듯하게 잘려 동그랗고 매끄러운 잎들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 않나커다랗게 피는 붉은 꽃이 어둔 보도블록에 떨어진다시인은 지금과 이 낯선 공간을 '동백'으로 겹쳐 꿰매잇는다단절된 이야기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동백을 매개로 일어난 것은 이름 하나로 그칠 꽃에서 거대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음이다뭐라고 말해야 할까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지금과 이어내는 시인의 바늘을그것으로 하여금 몰랐던 눈밭이 하나 생기고그리로 발을 옮김으로 우리의 삶이 확장된다바위를 두드려 의사를 만나는 공간을 낯설어하면 안 된다. 작년 겨울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 일가가 안나의 치료를 위해 트롤을 만나는 장면이 떠올리자없는 세계로 내는 문을 ''라고 한다그렇다면 세상의 문제는 이야기 없음이 아니라 상상력 없음이리라이야기 있으되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하지 못하는 문제로 명확해진다열광의 일부도 시에게 돌리지 않는 깜깜한 얼굴에도 여전히 시를 읽는 시인을 생각한다.

 

2. 투명한 공간을 그리는 화가, 아니 시인

 

 

나는 기다려

천천히 녹는 겨울을

흐르는 평범한 세계를

 

-거울부분.


이전과 사뭇 다른 차분한 어조는 맹렬함과 선명함이 없이 ''에 도착한다방이라 하면무엇이 없을수록 깨끗하고 정갈한 방일 테지만 그 무엇들 중에서 가장 없어야 정갈할 것으로 방에 사는 이임을 떠올리면사는 이 없이는 '방'자체마저 사라지는 위험을 떠올린다정갈함과 방의 존재 이유는 태생적으로 반대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각기 다른 부제를 통해 방의 연작들은 화자인 ''를 희미하게 지우는 시도를 지속한다이것으로 마침내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연의 모습에 다가가려는 모습이랄 수 있을지방에 대한 이와 같은 집중은공기의 연작에서도 이어진다.

 

나는 빛도 어둠도

털이 다 빠진

까마귀도 아니야

 

나는 백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니야

 

공기-나는」 부분.

 

시인은 어떤 색으로도 덧칠 할 수 없는 오래된 기억의 색(달과 동백)으로 시작해 어떤 색도 들어올 수 없는 '색 없는 풍경'(공기와 방)을 기록했다. '달과 동백'에서 시인은 달에 대한 수천 년 인간의 믿음을 담벼락으로 끌어내리고 길가를 네모 반듯하게 장식한 동백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달은 누구나 어느 곳에나 있으나 잡을 수 없는 풍경이고 동백은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초록 잎을 '생경'하게 간직하는 기이한 풍경이다. '달에게 물리'던 시인은 '광주리이고 내려가는동백의 정취로 떠나 ''과 '공기'에 도착하는데방과 공기는 내밀하고 순수하게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 같다. 그곳은 무엇보다 내가 없는 어떤 곳자신이 지워진 곳으로 나타난다그래서 시를 색으로 이야기한다면어떤 것으로도 덧칠 할 수 없는 색의 풍경과 어떤 색도 존재하지 않는 색으로써의 풍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 마지막 시는 '저리 보면달이 뭐 별건가'불청객」부분. 로 끝난다이것을 말하기 되기까지, '어금니를 드러낸 달'을 불러온 것에서 불과 시집 한 권의 시간이다. 배가 산으로 간다의 제목은 산을 오르는 배가 사실은 산 몇 개로 이뤄진 구조물이었다는 '그림'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시집 뒤표지배가 산으로 가거나 산이 배로 가는 일은 결국 한 모습이었다는 그림. 이것과 같은 구조인지, '달'로 오래 들고 볶은 그가 마침내 '달이 뭐 별건가'라는 대답을 냈다그를 보며 언제고 '시가 뭐 별건가라며 웃음을 보일 모습을 기다린다시인이 처음 만든 일가, 고동-치는 색을 몸에 녹여내는 일이 우리가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거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을 수 있는 비밀일 수 있다는 것을 귀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처_한겨례





아.올것이 왔구나! 



김사인 시인의 목소리를 두고두고 들을 수 있다니 

당장 받아듣습니다.



김나영 문학평론가는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부럽고 부럽고 불납니다.



1회는 진은영 시인. 다음 회에 함민복, 이제니 시인 등이 출연한다.



바로가기_http://www.podbbang.com/ch/847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끄러미 2015-04-1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팟방이 있었군요 감사

봄밤 2015-04-11 17:20   좋아요 0 | URL
읽어주시는 시가, 목소리가 시 이야기가 참말로 좋아요. : ) 추천합니다!
 



불청객




민구



가로등 불빛이

작은방 창으로 들어온다

밥상을 타넘고

안방으로 걸어와서 어머니 가슴에

발을 올려놓는다

괘씸하지만

꽁꽁 언 발을 끄집어낼 수도 없어

그대로 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도

잠을 깨시는 어머니

늘 걷어차던 이불을 웬일로

한 번 안 차고 주무신다


네가 붙잡았나 싶어서

불빛이 시작한 자리를 가만히

오래오래 본다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





민구, 『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2014.11.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 간단한 시인의 소개에 '태어났다'라는 말을 좋아서 자꾸 읽는다. 태어났군요. 1983년에 태어나셨군요. 그러니까 인천에서요 태어났군요. 음. 지금 어디 있다는 거지요. 이걸 읽는 나 역시 '있음'을 함께 생각한다. 혼잣말을 잇는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다. 가로등, 어머니. 낡고 낡은 이야기를 하려나 읽어가면. 달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오줌발을 갈기던 시「움직이는 달」이 떠오른다. 시집 앞쪽에서 읽었던 패기와 확연히 대비되는 관조다. 한 시집에 들어 있다. 단정은 이르이,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라는 말을 마지막에 놓는 시인의 손을 생각한다. '시가 뭐 별건가' 가볍게 놓을 줄 아는 얼굴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기대가 산을 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명관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창비, 2014.


'술과 햇볕에 목덜미가 벌겋게 익은 쉰일곱의 육체노동자경구는 자신에게 없는 여자를 생각한다개 같은 년 매정한 년 육시랄 년그리고 불쌍한 년까지그녀들의 이름을 잊은 걸까. 아니다. 그가 부르고자 하는 마음이 소화 되지 못하고 년놈으로 '육화'되어 나온 까닭이다. 그는 그년들에게 말도 못하고 씹어 넘기는 밥 새로 들릴 듯 말듯 욕지거리를 웅얼거린다. 자신이 욕한 걸 자신이 듣는다그가 말하는 방식이다속으로 이렇게이런 식으로울화가 가득 차 있는 그에게 평화는 술밖에 없다일 끝나면 다음 일 걱정에 마시고 일 하면 일의 고됨에 마신다술로 절은 몸을 끌고 들어오면 불 꺼진 집아비를 아는 척 하지 않는 딸년이 있어서 경구도 마찬가지로 제 딸에게 아는 척 하지 않는다대신 불쌍하다고 욕을 좀 하며딸년의 매정함에 이혼한 아내를 생각한다.


처음엔 사장님이더니 결국 씨발 놈이 되었다이 바닥에서 돈 내면 사장님이고 개털이면 개새끼였다. p. 125


단편 어디에도 '몇 차례'라는 말은 없지만 경구가 술값 외상값을 갚지 않아서 욕 먹고 어깨를 들이키는 일이 하루 이틀이었을 것 같지 않다. 해서 그날의 부딪힘을 유독 확대 분석할 이유 역시 없어 보인다그러니까 그가 살아온 시간 모두가 축이 되어 그날 칠면조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시마이 하고 오는 길 윤가가 경구에게 쥐어준 꽁꽁 언 칠면조이걸 어디에 쓸까 고민했지만 이렇게 쓸 줄 그는 알았을까외상값으로 시비를 걸던 쌍놈의 새끼상판을 오함마로 내리치듯 칠면조로 찧었을때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경구는 알았을 것이나 한편으론 그 잘못이 어디 나에게서만 있는건가라는 물음도 스물스물 올라와 더 힘껏 패대기 칠 수 있었으리. 57그의 등에 매어진 하나로 짜부 된 시간그 틈을 들추어 잘못된 시작점 '어디서'를 찾을 수 없고 설사 그걸 안대도 생을 거꾸로 살 수도 없다이쯤되니 경구가 달고 다니는 욕에서 그년들에 대한 울화와 함게 '나도 내 인생의 피해자라'는 분노가 보이는 것 같다.


지금 여기, 나는 경구 인생의 분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엿보고 있는데도 비장함이나 엄숙함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다예예 굽신거리던 저 밑바닥 노가다꾼이 사람 하나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데 우스꽝스럽다칠면조 모가지를 잡고 사람 면상에 패대기치는 모습이라그의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장면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그렸다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칠면조 어디 흔하게 손에 쥐어지는것이던가경구 손에 오함마를 들리지 않고 칠면조를 쥐어줌으로써 소설은 '환상'의 가능성을 가진다아무래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쥐어주고 작가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처럼 경구가 갖고 싶은 현실(꿈이었으면 싶은)을 그려주는 것이다그러니까 칠면조는 경구의 분노를 해갈하면서도 소설 속 현실에서 그에게 닥쳐올 위험을 좀 덜어주는데나는 칠면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면서 그냥 칠면조라는 이름에 조금 고마웠다.


인생 뭐 있나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 p. 110


소설의 처음 경구가 다짐처럼 했던 말을 끝에 와서 부르는 것은 그에게 '그뿐'이 아주 어려운 일 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그저 저 두가지만 할 수 있어도 '인생'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지만 어디 쉬운가경구는 마음으로 차린 백반 하나 제대로 챙긴 적이 없고 빠구리라니 역시 마음이 채웠던 일 없다싸구려 돼지부속집에서 일하는 찬모의 뭣 같은 냉대에 이를 갈뿐이다그가 대책 없는 인생이 되 버린 것은 끝 없는 가난 때문이다가난뱅이로 만든 사회다라는 말은 그러니까 해서 뭐하나 싶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다만그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희망'에 대해서 좀 말하고 싶다그는 자신이 있는 곳을 탈출하고 있다탈옥이나 탈출은 더 나은 곳을 향해 가는 여정이어야 하는데그의 탈출은 비참하다사람을 패대기치고 트럭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도착할 곳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희망경구가 오래전에 버린 이 말의 뜻은 '마음이 바란다'는 것인데 너덜한 육체에는 그 마음이 도저히 자라질 않는다질주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행복했던 날의 아내를 찾는 일뿐이다시간여행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는 죽어버린 희망옆에선 얼었던 칠면조가 서서히 녹는다그걸 또 선물이라고 아내에게 주겠다고게다가 그걸 받고 좀 웃어주었으면 하는 경구의 마음을 생각한다. 자신안에서 싹틀 수 없는 희망을 뭐라고 해야할까. 이곳을 떠나면 무엇이 있을 거라고 믿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봐야할까.


이 이판사판에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큰일이다나는 ''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를 잃은 사람이다."라는 다산의 고백을 적는다. 이 말은 다산이 40세, 앞으로 시작될 18년의 유배생활을 앞두고 한 말이다. 외견상 그의 인생은 끝났다*. 그러나 다산은 이제껏 자신의 삶이 나를 잃었던 삶이라고 깨달으면서 '수오'(守吾)라는 말을 되새긴다. 모든 것을을 잃어도 '나'를 지키는 희망까지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나는, 아직도 자신의 외부에서 무엇을 더 찾으려는 경구의 위험한 탈출이 멈추길, 트럭이 온전히 세워지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트럭이 어쨌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사이 소설은 끝나 버렸으므로. 내게는 걱정만이 남는다. 그래서 뒤를 좀 이어서 써본다. 속 시원하게 두들겨 패던 환상은 끝났다. 칠면조를 들고가던 경구는 처치곤란한 그것을 어느 곳에 줘 버린다. 대신 양념치킨 한 마리를 산다. 말 없는 딸과 아들이 한 조각씩 먹는 것을 구경하다가 들어간다. 술을 하루 이틀 거른다. 외상값을 갚고 하루 걸러 하루 있을지언정 일판에 초연하게 나간다. 인생 60부터 시작이라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 혹시 모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경구가 자신이 쓴 줄 모르는 경구(警句)를 좀 받아 적는다. 소설의 끝이 걱정되어 그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 '교훈'이란 말을 딱 질색할 것 같은 천명관이지만 어쩌랴.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경구 덕분에 수오라는 말을 알아간다. 빌어먹을 세상은 예전부터 틀려먹었고, 그런걸 딱지치듯 엎어보겠다는 젠장맞을 포부도 없으나 다만.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만은 온 천지도 어쩌지 못할 일이다. 



*정약용, 박혜숙 편역, 『정약용 산문 선집 다산의 마음』, 돌베개. p. 2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