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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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는 세계의 탄생-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이 원자폭탄 때문에 내게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p. 221.


 

<셈을 잘하는 까막눈이 여자>의 스토리는 '그럴 수도 있죠'를 기반으로 한다물론 다섯 살 때부터 분뇨통을 나르던 놈베코의 인생은 '그럴 수도 있죠'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서 영양 육포와 바뀐 핵폭탄과 스웨덴에 도착하는 것이 과연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인가두어 번 살게 되면 그때나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 아닐까쌍둥이로 태어나 하나의 이름으로 사는 홀예르 1,2의 삶은 어떤가물어보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본멘 소리이게 말이 돼기가 차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며 페이지를 넘긴다. 시도 때도 없는 코미디다신음하는 홀예르2의 삶에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수밖에.

 

핵폭탄이라면서실은 수조의 거북이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돌보지 않는다거북이라면 밥도 주고 똥도 치우고 일광욕도 시키고... 거북이 어떻게 될까봐 노심초사 그밖에 것을 더 생각하겠지만폭탄을 집에 두고는 독자만 전전긍긍하게 해놓고뾰족한 대책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그리고는 그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라는 대답을 이 먼 곳의 독자에게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의뭉스런 스토리에 걱정이 되는지, 이렇게 극중 인물을 빌어 묻는다. '이 (원자폭탄)소설 때문에 내게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라고놈베코는 능청스럽게 '뭐...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라며 넘기지만 간단히 말해 내 대답은 가차 없다당연히 화나지 이 양반아어떻게든 전해지길요나손의 진지한 답변을 듣고 싶다.

성석제가 떠올랐다. 군더더기 없는 간단한 문장만으로 논리적인 세계를 쥐락펴락한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상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인데, 우울이나 슬픔이라고는 없는 비극을 살아내느라 고통조차 희화화 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열심이다한편으로는 우울과 슬픔이 허락된 이 세계에서 고통을 고통으로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곳에 있는 '유머'만큼 끔찍한 것도 없을 테니까. 여기까지 미치자 비로소 유머가 어떤 마음에서 존재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유머는 슬픔을 온전히 슬퍼하는 마음에 실은 후에야 존재할 수 있는 형식이라고.  

 

그래서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유머 감각을 지닌 광신도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아모스 오즈> 오호라. 이 소설을 특히 추천하고 싶은 분들이 떠올랐다.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 않은 채 굳건하게 지켜야할 '믿음'만 있는 광신도처럼,근엄하게 유병언 일가의 수사(?)결과(?)를 발표하지만 말을 맞추지도 협력하지도 끝내는 무엇조차 믿을 수도 없게 하는 그분들과, 뭐 발표만 나면 릴레이 경주 바톤터치 하듯 기사를 까는 그들에게.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진상을 밝히는 노력이지 우스꽝스러운 '믿음'의 간증이 아니다. 여기 그들에게 심각하게 부족한 '유머'라는 덕목이 가득하니, 진지 좀 그만먹고 책을 좀 보세요, 놈베코의 생각을 보낸다. 

 

놈베코는 이 휘발유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공동변소에서 분뇨통을 두어 개 비워 보면 시야가 좀 더 넓어질 텐데.....p. 242. 


이렇게 능청스러운 말들이라니그러면서 굳이 꺼내지 않는 아픈 말줄임표라니. '셈까말'에는 원자폭탄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존재하지 못하는 삶을 조금은 아쉬워 하면서도 현재에 살기를 멈추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다. 삶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자꾸 삶에 닿고 싶게 하는 유머의 힘을 들여다 보길. 나는 창문 밖으로 도망쳤다는 백세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것도 상쾌하다면 그분들께 또 추천할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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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sky1004 2014-07-2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있는 책이에요. 봄밤님처럼 리뷰를 감질나게 잘쓰시는 분들을 보면 항상 놀래요^^ 봄밤님의 평에 백퍼! 공감합니다!
진짜 유머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책! 정치얘기만 몇페이지에 걸쳐 나올때는 간혹 패스하기도했지만;
'꼬리에 꼬리는 무는 이야기'는 바로 이책을 보고 하는 말인듯해요.
봄밤님을 관심서재에 일단 모셔두고ㅎ 연일 너무 더운데 지치지마시고 즐거운 독서하면서 여름 잘보내세요^^

봄밤 2014-07-28 17:0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lakesky1004님, 먼 곳까지 걸음 고맙습니다.
리뷰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정말 재미있지요!ㅎㅎ
저는 요나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보고 전작까지 궁금해졌어요.
더위에도, 냉방에도 지치지 마세요+_+. 건강한 독서 하시길 바랍니다.

lakesky1004 2014-07-2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추리소설,장르소설은 별로 안좋아하시나요? 전 독서하면 열에 아홉은 추리소설이거든요. 마이클 코넬리 무진장 좋아하구요. 봄밤님이 추리소설도 좋아하시면 추천해주시는 책이라면 읽어보고싶네요^^

봄밤 2014-07-28 17:08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장르소설은 잘 알지 못하는데요, 마이클 코넬리! 찾아보겠습니다.+_+. 추리소설은 고전으로 불리는 것만 접해보았습니다. 편식이네요 으앗. 하늘호수님 서재에서 전해듣겠습니다.^^!
 
허영만 식객 Ⅱ 1 : 그리움을 맛보다 허영만 식객 Ⅱ 1
허영만 지음 / 시루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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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기억을 푸는 얼레-식객2_그리움을 맛보다


 

내게 주방은 머물기 약간 불편한 장소다. '요리앞에서 서툰 마음재료와 도구를 가져오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다공들여서 무엇을 만들거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어린 싹이다불 꺼진 곳으로 퇴근그리고 한잠 자면 다시 맞을 아침이 사이에 요리로 번잡스럽게 시간을 볶을 만한 여유가 없다그렇다고 특별히 맛있는 집을 찾는 눈이 밝아진 것도 아니다입맛이 변하거나 잊은 것은 아닐텐데밥 한 공기와 찬 몇 개를 꺼내는 것에 만족하는 저녁이다배고픔을 가시게 하는 그저 섭취로서의 음식내게 '요리'는 너무나 멀다.

 

먹는 것만큼 세상은 넓어진다고 했던가한 번의 식사로 견문을 확장했다고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 한 번이 다시없을 만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횟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태국의 길거리에서 먹었던 팟타야설명할 수 없는 향신료 냄새와 약간 짠 듯한 간은 더웠던 그날을 곧바로 데려가는 걸 보면 말이다땀을 뻘뻘 흘리며 다 날아가는 가쓰오부시에 웃고 오꼬노미야끼를 볶던 일본의 작은 밥집이 이렇게 선하다어떤 견고한 기억이라도 시간에 무력하게 사라지지만 그날의 맛은 한 치의 상함도 없이 나를 부른다.

 

그러나 들켜버렸네자리가 몇 개 없는 소박한 가게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수수께끼 주인에게 그냥 밥집이라는 수수한 간판에 나의 허름한 저녁을 혼났다나는 기억할 만한 저녁을 차리고 있는지나중에 떠올릴 것은 허기와허기가 가셨다는 건조한 사실만 남는 건 아닐지잘 채려 먹어라라는 고향의 당부와 함께 몰려와 한참을 혼났다.

 

<그냥가게>에는 그 가게 이름만큼이나 덧붙일 것 없는 이름 그대로의 요리를 만날 수 있다대구내장젓은 '대구'부터 시작이다그의 몸통과 아가미와 내장을 손질하고 턱턱 두들기는 장면이 지나가는데. 식객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음식으로 어떤 모양을 갖기 전 원형을 생각해 보게 하는데 있다. 바다 속대구꼬리를 흔들며 바다를 지났을 큰 입 같은 것을 말이다.

 

오늘 손님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 아내와 가족이다늙은 남편은 대구 내장젓을 함께 먹으며 그것을 직접 담그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온전한 아내를 만나게 된다맛이 기억을 붙드는 힘은 유달리 세서 그날과 똑같은 맛을 보게 되면 순식간에 그 시절로 데려간다. 온 가족이 놀라는 순간……. 그래서 그리움을 맛보다라는 제목은 전혀 감상적이거나 허황된 것이 아니다집을 생각할 때 내 마음 한켠이 편해지는 것은 내가 아주 어릴 때내 안에 살고 있는 어린 나의 기억이 그때를 여전히 호출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것보다 황홀하고 정교하게 새겨지는 각인일 것이다. 식객은 그것을 가장 잘 푸는 얼레다. 만났던 기억과 몰랐던 기억에 줄을 당긴다. 만난김에 저녁은 찌개를 한소끔 끌여야겠다. 저 안쪽부터 뜨듯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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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07-2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서 밥 냄새가 나네. 봄밤님이 지으셨나 봄밥님이 지으셨나.

봄밤 2014-07-27 11:01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봄밥집입니다. 보통은 죽을 많이 쑵니다.
 
[미국의 목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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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인지만 말해봐-미국의 목가 


스위드’.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의 딸과 그의 동생과 그의 아내, 그러니까 스위드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스위드는 스위드의 일을 스스로 말할 수 없다. [스위드는 "달리 내가 어디 있겠어?"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 234]던 것처럼. 소설은 나의 일을 누군가가 재현하는 것으로 볼 때의 무력함을 전한다. 당신이라면 괜찮을까? 누군가에게 의해 말해질 수밖에 없다면. <미국의 목가>는 주커드라는 소설가가 스위드의 삶을 반추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필 가장 마지막에 던짐으로써 이제까지 서술과 감정과 사실이 대체 무슨 소용이었냐며 원점으로 되돌린다.

 미국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한 유대인의 번영과 황폐를 1인칭으로 쓰지 않은 '형식의 문제'를 짚고가자.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나라 밖으로도(베트남 전)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전하다’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환청인가. 어떤 것이 진짜인가? 우리는 소설 밖에서 얼마든지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잘생기고, 품위 있고, 예의바른 '이미지'. 이 사람을 당시 미국과 환원할 수 있을까? 둘을 환원할 수 있다면, 소설이 중요한 줄기인 메리의 산 같은 분노만큼 이것은 중요하다. 문제 하나. 내면화된 자기 고백과 반성이 아니라 조롱으로 그때를 들어낸다는 점. 


그때의 그곳은 더럽고 문란하고 문드러졌다. 스위드의 사람들은 스위드와 다른 온전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써갈 줄 알기 때문이다폭탄을 만들어 살인을 하며 미국의 형식에 완전히 반하는 그의 딸 메리와, 형에 대한 분노와 함께 역시 주류의 삶에 반동하는 그의 동생, 그리고 스위드의 아름다운 아내까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한다.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스위드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스위드의 거의 모든 사람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고, 스위드의 거의 모든 이들에게는 장갑을 낀 채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안전한 모습을'를 구하려 했던 그의 삶이 우스운 것이다. 이 혼돈 속에서 스위드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두 권의 책에서 스위드의 거의 모든 삶이 나오지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던 장은 아무곳에도 없었다. 그러나, 네가 누구인지만 말해봐, 나는 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떻게 나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인 위신이 파괴되어 그것을 애써 붙들고 있는 이에게 가차 없는 조롱을 할 수 있는 이와 순진한 외피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사람, 어떤 것이 더 삶을 '살아내는' 것인가. 사진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도 콜라를 함께 먹는 '평범한 한 때'라니. 물론 사진 속 그들은 바깥을 영영 알 수 없다. 비극. 사진이 재가 되어 자신들의 사라진대도 말이다. 때문에 스위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스위드의 역할'로 등장 할 수 밖에 없었다. 눈이 밝은 주커드는 이 사진이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바야흐로 <미국의 목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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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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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구를 '연재'하는 것이 가능한가이것은 연구의 연재가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전체적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완성인 연구를 공개 할 수 있는 '결백한 믿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연구자가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 사이를 얼마나 상세하게 눈금 해야 가능한 일인지 짐작이 어렵다연재를 올리는 부분은 완성된 연구여야 하며 이후의 연구와 맞물려야 한다하여발간된 책은 715쪽이다일반 소설이 200페이지 내외인 것을 떠올리면 세 권 분량의 소설의 완성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두 손으로도 쉽지 않다.


연재란 책이 되기 전의 상태를 미리 보는 점이 제일 장점이었지만 챙겨 보지 않았다만질 수 없는 글씨와 눈 맞추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그래도 몇 개 에피소드는 기억에 남았는데대체 책과 무슨 상관인지 묻고 싶은 대목뿐이었다이 책은18세기 한중 지식인엄성과 홍대용부터 박제가와 기윤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이 언어와 거리의 불가능성을 뛰어넘어 했던 소통의 재현이다이들의 대화는 죽음 이후에도 대를 잇고친구의 친구를 소개하며 진실하고 절절하다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기도 전에 이미 저자의 '자료를 대하는 태도'에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그러니까 연재를 보고 남는 몇 개의 장면정민 선생이 대여한 자료를 복사하고 딱풀로 붙여 제본집을 만드는 풍경만드는 게 즐겁고 나중에는 요령도 생겨서 한 권 만드는 것이 금방이었다는 말씀딱풀을 곽 째로 사서 놓고 써도 금새 닳았다는 이야기가 책을 보기 전에 있었다.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가공하는 일은 길고 무료하다그것은 길고 성과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기초 작업을 진지하고 기쁘게 대하는 얼굴이 보였다프린트 물이 탑으로 쌓였던 지저분한 책상모으기는 쉬워도 흐트러지기 쉬웠던자료 정리를 낮게 여기고 힘겨워 했던 언젠가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2단으로 인쇄해 더 많이더 작게 박힌 글씨들이 우르르 쏟아지면서 부끄러웠다그것은 왜 어려운가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어떤 그림도 그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염려와 고통에 지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조학을 연구하던 후지쓰카는 조선이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적인 공간적 위치로 여겼다고 한다그는 경성대학 재직시 평생을 걸쳐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 정년퇴임 후 일본으로 떠날 때 기차 몇 량에 청대 원간본과 수만 권과 조선 전적 수천 권을 실었다고 한다그리고 후에 그 대부분 미국의 도쿄 폭격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자신 이후 다른 세대의 연구로 밝혀질 수 있는 일에 일생을 놓은 셈이고 그 대부분이 먼지가 되었다나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문예공화국을 너무 쉽게 무릎 위에서 넘겼고그마저도 무거워서 잠시 덮고 있었다부제가 들어왔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그 밑에 저자 이름 '정민'미국에 있는 중국저서를 보관한 도서관에서 일본인의 컬렉션을 발굴한 한국인의 학자가 한중 지식인의 교류의 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후지쓰카가 어떤 말씀이라도 남겼는가지속해 연구해 달라고. 그런 전언은 '없었다'. 다만 어떤 이가 묵묵히 했던 일을 후대의 사람이 밝은 눈으로 발견한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18세기, 이국의 사람들이 서신에 기대 고된 거리를 걸어가 서로를 알아보며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문드러져도, 오늘을 잊지는 말자"던 일은 과연 뭉클했거니와세대와 국적을 건너 이룩될 어떤 연구의 한 장을 보았다는 기쁨에 또 뭉클해졌다. “옛날엔 내 눈앞에/오늘은 꿈속에만.”588p 시를 읊어 서로를 그린 아득함을 한 입도 떼지 못했으나그러나 이것으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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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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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간다'와 '온다'를 한 번씩 떠올려봤다. 처음 읽은 날 책 옆에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셌다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읽었고 그때는 옆으로 누워 표지의 안개꽃을 살폈다책은 덮어도 덮히지 않았다. 비명과 개머리판과비스듬히 꺾인 팔과반쯤 썪어 가는 얼굴과흙더미와 마르지 않는 시취가 있었다나는 어쩔 수 없이 책을 포장지로 쌌다

 

소년이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기억이 옛것으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소년이 옴으로써 우리는 소년을 기다리는… 모양이 되버렸다소년은 과연 이쪽으로 올 수 있는가소년의 걸음은 원통한 흙이 되지 않았나바람이라도 불어온다는 것인가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움직인다고 발화하는 사이한곳에 붙박여 기다리는 딱딱하게 살아있는 우리가 보인다. ‘간다 온다의 극명한 차이소년은 자신을 말할 수 있는가, '가는 것'이라고우리는 그 발화에 귀만 기울이면 되는가형체가 없는 이름이 말을 하게 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은움직일 수 있는 '우리'가 가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밀려나온 내장을 밀어 넣듯 책 밖으로 흘러나온 조각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무용한 내 손이 책 틈에 머물러서 햇빛이 길게 책과 손을 하나의 선으로 지났다연속되지 않은 것을 분명히 하나로 지난다. 해가 지나지 않았던 곳은 없어서 그날도 분명히 아침이, 저녁이 눈에 익을 만치 캄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메칠 전에는 해 질 녙에 까무룩이 그 집 처녀 얼굴이 떠오르더라이. 참 고왔는디… 고운 사람이 없어져버렸어야, 생각함스로 어둑어둑한 마당을 보고 있었다이. 그 고운 처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빨래 바구니를 보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하고 칫솔을 들고 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일이 우신 전생의 꿈 같아야. 187p

 

전생의 꿈 같은 무서운 햇살이 아름답게 쏟아진다. 이 빛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죄 받아라. 죄, 죄, 하고 내리는 눈, 아니라 볕 속에 오월은 한 번도 오기를 멈춘 적 없었다. 내일 아침에도 내리는 빛, 눈을 감아도 어른거리는 빛 속에는 쏠 수 없는 총을 갖고 자신이 부서지는 것으로만 양심을 확인할 수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양심을 건드리기는 커녕 사실을 사실로서 알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이 책을 읽고 생각난 구절이 있어서 옮겨본다.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고 부드런,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경식, 『소년이 온다』, 돌베개, 146p



나는 덮히지 않는 책을 그대로 둔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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