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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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이고 뭐고 숨 쉬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무턱대고 고시원을 나갔다. 주택가의 담을 따라 그늘이 지는 곳을 골라 다녀도 정수리가 따가웠다. 화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계절의 한복판에서 내 몸은 흐물흐물 녹아내릴 듯했다. 그냥 걸었다. 앞에서 끌어줄 희망도 뒤에서 밀어줄 바람도 없었다. 멈춰버리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를 아무 데나 쏟아버리지 않으려면 멈추지 말아야 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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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착하고 분별있어 보이는 표정에,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행복하고 선량한 모습이었다. 아들 삐에르의 표현에 따르면, 롤랑 씨 부인은 돈의 가치를 알지만 그렇다고 몽상의 매력을맛보는 데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소설과 시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 예술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들이 일깨워주는 우수 어린 부드러운 몽상 때문이었다. 시 한편, 종종 진부하고, 종종 형편없는 시 한편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듯 그녀의 여린 심금을 울리며, 은밀한 욕망이 거의 실현된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 그리고 회계장부처럼 정리가 말끔하게 되어 있는 그녀의 영혼을 살그머니 흔들어놓는 이 가벼운 감정들을 즐겼다. - P43

르까뉘 씨는 공증인이고, 사업상 인연으로 롤랑 영감과 약간 친분이 있었다. 저녁때 방문하겠다고 알려온 걸 보면 뭔가 위급하고중요한 용건임이 틀림없었다. 롤랑네 네 식구는, 계약, 유산, 소송, 바람직하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일들과 연관된 오만가지 생각을 일깨우는 공증인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보잘것없는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러듯이, 이 소식에 불안을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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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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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독점해 왔다고 자부하는 그 역할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만큼 파괴된다는 속담도 있듯이 그것은 담배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재앙이다.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근동 지방에서 염주가 담배나 수연통을 대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상인들은 장사가 한가해지거나 카페에 앉아 있을 때 진주모, 백단, 회양목, 상아, 호박 등으로 만들어진 염주를 굴리는데, 신에게 경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한다.


큰 염주들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신의 아흔아홉 가지 속성에 맞추어 아흔아홉 개의 알로 되어 있는데 그 백번째 속성은 인간이 모르는 것이다. 이 뚜렷한 경계선에서 계시가 끝나고 비의(秘儀)가 시작되는 것이다. 작은 염주들은 서른세 개의 낱알로 되어 있어 손에 쥐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훨씬 편하다. 그리고 그 알들을 세 번 돌리면서 〈낭송)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굳이 그렇게 낭송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염주는 그저 손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또 정신을 쉽게 세계에 동화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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