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검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엄마한테는 좀 크고 갑옷처럼 무거워 보이는 옷이었다. 여자는 그날 처음 엄마가 어떤 모습으로 공장에서 일하는지 알았다. 노동환경이 그리 좋은 공장이 아니란 사실도, 일이 많이 어렵고 힘들었겠다는 것도, 엄마의 손톱 밑에도 더러운 기름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 또한 여자는 처음 봤다. 그 검은 손으로 엄마는 쌀을 씻고 열무를 다듬고 나물을 무쳤다. 여자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냉장고 속을 감돌던 냉기처럼 차갑고 싸늘한 손이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잘 살라는 말이었겠지. 이것저것을 다 합해도 삶은 사는 것밖에는 아니고, 거기서 ‘잘‘ 살면 성공한 거니까.
-56p

선물 교환을 끝낸 여자는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온다. 마침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는 울어야 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참 서서 가만히 소리를 듣고 있던 여자가 냉장고 문을 연다. 가로등을 닮은 노란 불이 켜지고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온다. 여자는 냉장고 속 깊숙이 상체를 숙여 자신을 집어넣는다. 그러고 소리 내 울어본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제 일을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번에는 냉장고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눈물을 허용한다. 울자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여자의 몸은 따뜻해진다.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차가운 게 필요하고 차가워지기 위해서는 따뜻한 게 필요하다. 오늘 밤 여자는 잠이 안 오고, 허기는 가시지 않으며, 외로움이 괴로움으로 바뀌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눈 오는 새해니까. 살아가는 날들 중에는 부끄러운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냉장고 문을 닫기 위해 허리를 편다. 그때 냉장고가 좀 더 크게 소리 내 물어본다. 잘 살고 있느냐고.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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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수립된다. 이것들은 소설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확한 교조적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누군가는 옳다고 주장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부도덕한 여인의 피해자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억눌리거나, 그 법정 뒤에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 - 또는’에는 인간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담겨 있다.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다.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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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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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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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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