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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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자는 그녀와는 무척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여자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도 않았고 만나달라고 조르지도않았다. 거짓말을 안 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무엇을 얻겠는가.
믹스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언제나같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결코 매혹되지 않을 것들에 둘러싸여 살기. 이제 그만, 다 고아 먹은 사골 같은, 여생(生)이라 불리는 가볍고 다공한 삶을 살기. 이게 요즘 그녀가 거짓되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꿈꾸는 데에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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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병으로 선잠이 들었던가 보다. 이상한 술렁거림에깨어난 나는 공포에 젖었다. 주위는 완벽하게 어두웠다. 불을켜놓고 잤는데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잠기운을 떨어내려 애썼다. 악머구리 끓듯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속에서 길잃은 환자처럼 나는 현재의 주소를 알아내지 못해 당혹했다.
기차가 서울역에서 고향 역까지 날 실어 온 것처럼, 악몽이 막삶의 차안에서 피안으로 나를 날라 온 건 아닐까. 시간이 딱멈춰버려 이제 종이로 만든 관처럼 좁고 허술한 이 방에서 낯선 소음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건 아닐까. 서울역과 고향 역 사이에 한 줄 철로밖에 없듯 나와 세상 사이에 사랑도 빛도 없는서른다섯 번의 봄, 서른다섯 번의 여름, 서른다섯 개의 역만오롯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어서 그가 내 악몽에 간단한 대답이라도 해주었으면.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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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위생 - 인간의 출현과 자본 - 식민주의 비판 저강도 총서 1
김항 지음 / yeondoo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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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되기 위해서는 이론적 계급투쟁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과 교환 가치로서의 노동이 분리하고 배제하고 말소하려 한 사물의 물신성과 음성의 주술성을 탈환하는 일이다. 새로운비판 기획이 제시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유의미한 것은 인간이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육체를 가지고 발화 아닌 발화를 반복하는 사람의 흔적을 추적할 때뿐이다. 이때 사람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사물과 자연이 언제나 공속하는 세계에 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내전과 위생을 키워드로 투명한 텅 빈 자리를 차지한 인간이 어떤 정치적 폭력을 행사해왔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인간이 저 특권적 자리를 차지한 사태는 지식 지층에 흔적을 남긴이론 혹은 담론 차원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태가 인간의 출현과 실존 자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삼라만상에 대한정치적 폭력의 행사였다. 이 폭력은 내전과 위생을 통해 행사된다. 내전은 사람들에게 "너는 누구냐"고 다그치는 심문의 영원한 반복을 통해 ‘적‘을 색출하는 정치적 폭력이다. 그렇게 색출된 온갖 특정 형상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위생 장치의 제거 대상이 된다. 내전과 위생의 이 결합은 인간이 저 특권적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유지해온폭력의 수행이다. 아니 이 폭력의 수행성을 제쳐두고 인간의 출현과 실존을 설명할 수는 없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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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온종일 끔찍한 우수와 무료함에 젖어 있었다. 친척이나 가까운 알음알이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안나 표도로브나와 사이가 나빴다.(아버지는 그녀에게 얼마간 빚이 있었다.) 사람들이 일 때문에 우리 집에 꽤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대개 다투고 떠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 사람들이 돌아간 뒤 아버지는 무척 언짢아하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몇 시간이나 방 안을 구석구석 거닐었고,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감히 아버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가만히 계셨다. 나는 얌전하게 방구석 아무 데나 책을 펴 놓고 조용히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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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란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어. 그게 정상이야. 의도적인 모호함이기도 하지. ‘퓌러프린치프(지도자 원리)‘의 논리에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건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야 할 몫이야. 명확한 명령을 내려달라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나 법적인 조치를 원하는 사람은 중요한 게 명령이 아니라 지도자의의지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는 거지. 그 의지를 판독하고 심지어 예상까지해야 할 줄 아는 게 명령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그렇게 행동할 줄 아는 자가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야.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의 과도한 열정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네. 설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말일세. 총통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은 ‘그 자신의 그림자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것‘이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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