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수립된다. 이것들은 소설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확한 교조적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누군가는 옳다고 주장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부도덕한 여인의 피해자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억눌리거나, 그 법정 뒤에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 - 또는’에는 인간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담겨 있다.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다.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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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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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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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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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다. 친절로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갑작스러운 능력으로도.
-139p

나중에, 앞으로 다가올 세월 동안 패티는 그들이 계단에 앉아있던 것과, 그것이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듯 느껴졌던 것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길 건너 철물점이 있었고, 더 멀리로는 오후햇살을 받아 건물 측면이 환히 빛나는 파란 집이 있었다. 패티의마음에 키 큰 하얀 풍차들이 떠올랐다. 그 길고 가는 팔들은 일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이따금 풍차 두 개의 팔이 동시에돌며 하늘을 배경으로 같은 위치에 놓일 때를 빼고는 결코 똑같이 돌지 않았다.
-84p, <풍차>

그는 침묵과 함께 방안에 홀로 남아, 앞서 중단된 그것, 지금 그에게 다시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 고요였다. 오래전 그는 그것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였다. 엄지 치기 이론, 어린 시절 어느 여름에, 할아버지 집 지붕 위에서 망치로 타일을 세게 내려치다 알아낸 사실이었다. 실수로 엄지를 내려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 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 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전쟁에서도 이런 일이 수시로, 여러 형태로 일어났기에 그는 이따금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그의 이론은 그만큼 잘 들어맞았다 생각하곤 했다.
-137p, <엄지 치기 이론>

그는 오래전 자기 자신을 극심히 더럽힌 찰리였기에, 그는 찰리이고 다른 누군가가 아니었기에, 그는 아들에게 이 말을 할 수없었다. 너는 품위 있고 강하지만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단다. 네 어린 시절이 온통 장밋빛은 아니었는데도 너는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어. 나는 네가 자랑스럽고 네가 놀라워.
찰리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건 그 감정을 희석시킨 말조차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 어서 오라고 하면서, 혹은 잘 가라그 하면서 아들의 등을 툭툭 칠 수조차 없었다.
-1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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