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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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첫 데이트를 하던 날, 그녀는 내가 미스터리 소설과 톨스토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는 사실이 좋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아널드 슈워제네거 영화를 보러 가고 축구 경기를 시청하고, 누가 “페리퍼테틱peripatetic”이라는 단어를 잘못 발음했을때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다고 했다. ˝당신은 자연스러워.˝ 그날 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진짜야.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인가?˝
˝비현실적이기도 해, 좋은 의미로.”
-54p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너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1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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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육체적인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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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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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와 붉은 물웅덩이와 기를 쓰고 나아가는 애벌레를 떠나 따라갔다. ‘불쌍한 아들‘이 나를 불러 달라고 했으니 아주머니가 절대 나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전만 해도 아주머니는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온갖 짓을 다 했었다. 아주머니는 나 때문에 아들이 나쁜 물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의 성적 욕구가 고조되어 있을 때 그가 그럴싸한 여자를 만나는 걸 나 같은 사람이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286p, <두 번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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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정은과 현수는 내가 언젠가 막연히 나에게도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삶, 진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그랬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한 독립체로 대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고 그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아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결합으로 보였다. 그건 내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을 완벽한 형태의 관계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을 뿐이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마치 나보다 한 세대는 위의 사람들인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행에 뒤처졌다거나 고리타분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내가 그래왔고, 그러고 있는 것보다 이 세상을 훨씬 더 많이, 잘, 속속들이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47p, 정영수, <우리들>

˝다시는 할 수 없는 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이란 말은 뭘까?˝
나는 때로 사랑이라는 건 그 자체로 의미를 품고 있지 않은, 그저 질량이 있고 푹신거리는 단어일 뿐이라고 느끼곤 했다. 나와 연경이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을 세어보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서로가 그 말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을 때조차 마치 우리 사이빈 공간을 메우려는 것처럼 그 말을 쏟아냈다. 구멍이 뚫린 튜브에 계속해서 호흡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의 말들이 완전히 무의미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라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더이상 아무 뜻도 남지 않은 언어라도 멈추지 않고 채워넣는 것 외에 무엇을, 형체를 잃어가는 우리가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일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261p, 정영수,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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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흘러간다. 오월에도 강물은 그렇게 흘러갔다. 오월의 실개천을 흐르던 물은 큰 강으로 합쳐지고, 강에서 다시 바다로 합쳐진 다음, 증발하고 그래서 다시 비가 되어 내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의 강물이 지금 랴보비치의 눈앞에서 다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 왜?
랴보비치에게는 이 세상이 그리고 모든 삶이 불가해하고 목적없는 농담처럼 여겨졌다…… 강물에서 눈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본 그는, 운명이 낯선 여인의 모습으로 무심하게 그를 어루만졌던 일을, 여름날의 꿈과 이미지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의 삶이 그에게는 말할 수 없이 빈궁하고 초라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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