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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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어슐러 K. 르 귄의 말-어슐러 K. 르 귄, 데이비드 네이먼

 

2018년에 어슐러 K. 르 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SF와 판타지 소설들을 쓴 작가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와닿지 않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이 쓴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도 체감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 때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저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케스는 가상의 세계인 마꼰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속 도서관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어슐러 K. 르 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우주 속 어딘가 낯선 행성에서 살면서 앤서블로 헤인 문명과 통신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죠.

 

그러나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르 귄이 이 우주의 낯선 행성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지구에서는 가능하지 않죠. 2023년의 지구를 살아가는 제가 르 귄을 만날려면 르 귄이 썼거나 르 귄이 나오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글이긴 하지만 현실의 존재감을 가진 르 귄이 존재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읽는 것도,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글에서는 살아 있는 르 귄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르 귄이 나눈 인터뷰를 담은 책이라서 더욱 더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했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서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한 이유는 르 귄이 평생동안 해온 글쓰기에 관해 인터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평생동안 했던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르 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삶에 녹아 있는 자신의 사상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살면서 익혀온 것들, 글쓰면서 경험한 것과 글로서 토해낸 자신의 생각들을. 그러면서 르 귄은 지금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인터뷰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글로서 자신의 인생의 생명력을 남긴 것처럼.

 

이제 조금 더 책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책은 르 귄이 써왔던 글 중에서 세 장르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과 시와 논픽션.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파트마다 나누었던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파트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목소리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르 귄은 소설을 쓰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소설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내면에 누군가가 있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글을 쓰는 것처럼. 목소리에 따라 쓰다보면 소설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그것이 소설을 만들어나간다고 합니다. 목소리와 리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문법 규칙의 시대성, 문학의 정전에서 지워지기 쉬운 여성 작가들, 소설에서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사용, 소설에서 사용되는 시점들의 차이, 소설에서 갈등에만 집착하는 것의 문제점, 장르소설이 문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의 의의, 도가와 불교 사상의 영향, 새로운 변화를 맞은 출판 시장의 모습까지.

 

다음 인터뷰는 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는데 르 귄은 꾸준히 시를 쓰고 발표해온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장르문학을 쓰면서 시를 계속해서 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장르 문학의 상상력이 시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르 귄은 시를 쓰는 건 소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시는 소설과 다른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건 확고한 무언가가 지시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력이 있는 가능성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르 귄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리듬입니다.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시의 형식이 되고, 시의 형식 속에서 박자와 소리가 빚어지면서 음악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르 귄은 그게 신비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르 귄은 자신이 사랑한 시인들에 말합니다. 낯선 언어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만났고, 자신이 직접 번역하면서 그 시들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해요. 그리고 운율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쓰다보면 역설적으로 자유시보다 더 자유를 얻게 된다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재자들은 시인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며 시에 대한 인터뷰는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인 세 번째 인터뷰는 논픽션에 관한 것입니다. 르 귄은 긴 작가 생활에 비해 논픽션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르 귄 자신이 논픽션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서랍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서사에 익숙해졌고, 서사를 이용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글쓰를 계속 해온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논픽션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르 귄은 몇 권의 책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남겼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채롭고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문학 해석에 대한 비판, 상상력을 푸대접하는 미국 현실에 대한 고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이용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오직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 함으로서 축소된 인간의 현실 반경에 대한 안타까움, 문학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에 대한 아쉬움, 주제 사라마구와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이야기까지. 마이클 셰이본이라는 작가의 행동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마감됩니다.

 

인터뷰를 다 보면서 든 생각인데, 르 귄의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현실에서 힘을 얻어 상상력을 꽃피우는 거죠. 리얼리즘 작가들이 현실에서 힘을 얻은 현실같은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르 귄 같은 이들은 현실에서 힘을 얻어 가상 세계의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장르문학을 만든 겁니다. 그녀가 써온 글들, 그녀가 행항 인터뷰가 그걸 증명하죠. 끝없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글을 개척해온 르 귄. 이제 그녀는 현실의 지구에 없습니다. 하지만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남아있죠. 어쩌면 르 귄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글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의 씨앗을, 자신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꽃피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르 귄이 했던 일들을 이어가는 상상력의 계승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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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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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녹색의 장원-윌리엄 허드슨

 

이 소설은 <정글 북>, <타잔> 등으로 대변되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인 남성 주인공, 이상적이고 신비한 여인,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자연, 어딘가 열등해보이는 원주민, 제국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 우월주의, 식민주의,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 여기까지보면 <녹색의 장원>은 더 이상 읽을 필요도 없는 그 시대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자세히 살피보면 어딘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이 균열점이 소설에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이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은 백인 남성의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타잔>, <솔로몬 왕의 금광>, <잃어버린 세계> 같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은 백인 남성의 성공 서사기 기본적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벨의 삶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아벨은 베네주엘라의 정치적 전복을 꿈꾸다 들켜서 도주합니다. 첫 번째 실패죠. 두 번째로 아벨은 야생으로 가서 황금을 찾는 엘도라도식의 꿈을 꿉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벨은 황금을 찾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아벨은 야생의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네 번째로, 아벨은 숲에서 만난 원주민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리마를 죽인 원주민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원주민들끼리 싸움으로 살육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일체감으로 육식을 금하던 리마 때문에 하지 못하던 육식을, 리마가 죽고 나서 숲에서 자기 파괴적으로 지내다 무기력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행하게 됩니다. 아벨은 죽은 원주민의 눈을 보면서, 육식을 행하면서 생각하는 자조와 자괴의 생각하면서,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자각합니다. 정확하게 보면, 아벨은 원주민들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한 것이죠. 이건 아벨이 가지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실패라고 할 수 있죠.

 

위에 적은 것만 보면, 이 소설은 백인 남성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백인 남성 성공 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의 공식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일까요? 추측이긴한데, 그건 작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윌리엄 허드슨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국적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영국으로 가서 문인 생활을 하게 되죠. 문명에서 살며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체성만 보면 아르헨티나인이자 영국인이자 미국인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완전한 아르헨티나인도,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세 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 나라 사람이 아닌거죠.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백인 남성이지만 백인 남성 중에서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그는 백인 남성 중심주의에 완벽하게 젖어 있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작가로서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 이 소설에 반영된 탓인지, 백인 남성 중심주의와 동시에 그 이념의 실패와 균열이 소설을 맴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영국이라는 문명 속에 살며 남미의 자연을 그리워한 작가 윌리엄 허드슨은 남미에서 식민주의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가난한 삶도 경험했고, 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습니다. 문명과 자연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그는, 백인 남성의 식민주의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미의 자연에서 아벨의 지속적인 실패는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살육으로 몰아가는 건, 남미 식민지 역사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의 실패 또한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와도 이어집니다. 이렇듯 가득한 실패는 작가의 삶을 반영한,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과 다른 소설의 등장으로 형상화됩니다.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하고 나니, 제가 무언가 이 소설의 포장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소설이 다른 빅토리아 대중 문학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백인 남성의 실패로 점철된 소설, 자조와 자학, 망상을 거쳐 자기 정당화로 이어지는 백인 남성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은 백인의 승리, 백인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다른 빅토리아 대중문학과 다를 수밖에 없죠. 마지막의 아벨의 자기 정당화는 동시대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위선과 허구와도 이어지죠. 죽은 리마를 다시 만날거라는 환상을 품고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아벨의 모습은, 폭력과 학살, 착취로 가득한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 시대 백인 남성들의 모습과 겹치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당화 속에서도 윌리엄 허드슨은 백인 남성들의 현실을 맴도는 실패와 위선, 폭력과 착취,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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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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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쇳밥일지-천현우

 

1.

<쇳밥일지>의 마지막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저자인 천현우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나는 걸로 끝납니다.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고마운 어른들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돈을 벌러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들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 오고야 말리라.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나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리라.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쇳밥꾼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주머니에 실패한 연인처럼 구겨져 있던 천원짜리 석장을 꺼냈다.

고향을 떠나기 전, 풀빵이 먹고 싶었다.(p.287)

 

2.

고향을 떠나는 천현우 씨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면서, 저는 책을 덮습니다. , 좋았다.. 이 말이 떠오르네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저는 좋았던 걸까요? 책이 좋은 이유는 책마다 다를 겁니다. 어떤 책은 서사의 힘으로, 어떤 책은 논리적 정합성으로, 어떤 책은 아름다운 문장의 힘으로, 어떤 책은 사유의 기발함으로, 또 어떤 책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비판의 유효성으로. 이렇듯 책이 좋은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 중에서 <쇳밥일지>가 좋았던 이유는 뭘까요? 제가 보기에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에 넘쳐 흐르는 삶의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쇳밥일지>는 삶과 밀착한 책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공장에 다니며 쇳밥을 먹으면서 살아왔고, 그 과정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기록한 책답게, 이 책은 저자인 천현우 씨의 삶의 모습과 양상이 가득합니다. 공장 나가서 용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산재사고도 겪고, 눈앞에서 다치는 사람들을 보고,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마주치고, 빚덩이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사랑도 떠나보내고, 독서도 하고, 세상을 더 알아가고, 운동도 하고, 친구 만나고, 어떤 때는 눈앞의 일에 안주하고, 어떤 때는 우울해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깨달음도 얻고, 운좋게 자신이 쓴 글이 알려져 글쓰는 일도 하는 등의. 읽다보면 책 속에 가득한 삶의 힘이 독자에게 전해져옵니다. 삶의 힘을 건네받은 독자는 저자의 삶에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의 삶 그 자체가 독자에게 설득력으로 다가오니까요.

 

4.

때로는 삶이 더 영화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서평을 쓰니까 영화보다는 문학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때로는 삶이 더 문학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쇳밥일지>의 천현우 씨의 삶이 그랬습니다. 바람기 가득한 아버지, 친모 같은 애정을 준 양어머니, 생모와 지내면서 받았던 가정폭력과 학대, 크게 다쳐서 찾아온 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양어머니와 다시 살던 일, 가난했던 나날들, 서울 말씨 때문에 괴롭힘받다 게임 잘해서 괴롭힘을 극복한 일.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나가면서 공장 일을 하면서 겪은 일들, 사랑과 좋은 이들과의 만남, 부조리한 일들과 힘겨움과 고통, 글쓰기를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까지의 과정도 마찬가지처럼 만만치 않습니다. 본인에게는 평범한 삶의 과정이었겠지만, 그 삶을 글로서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며 생생하게 체험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이 글이 되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문학적인 효과를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것에 독자가 참여해서 그 합일의 과정을 체험하는 것. 이 과정이 좋았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걸 혼자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요.^^;; 아무튼 저자인 천현우 씨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저 또한 천현우 씨 삶과의 만남을 끝내고 저의 삶이라는 세계로 다시 떠나가겠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이었다. 그때의 시간들. 고와 낙이 있었고, 땀과 눈물이 있었으며,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고, 꿈이 짓이겨졌다가 다시금 피어났던 과거를 문자로 남겨보고자 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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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썼다 지웠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글이라 적고 보니 뭔가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좋았던 건,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느낌을 글로서 털어내고 보니

내 마음 속 부정적인 감정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역시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나봐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경험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저 자신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서도 좋은 경험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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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31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성복 시인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된 짜라투스트라님의 부정적 감정이 물러간 빈 자리에 긍정적인 감정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31 23:55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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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메데이아-에우리피데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봤습니다. 송혜교가 연기한 문동윤이라는 인물이 잔혹한 학교폭력을 당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의 평생의 삶을 바치는 이야기로서. 드라마를 보다보니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문동윤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그 사람의 복수를 응원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게 흡입력 있는 드라마의 힘이겠죠? 그런데 <더 글로리>를 보다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떠올랐습니다. 똑같은 복수극이지만 <더 글로리>와는 어딘가 다른 복수극으로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더 글로리>의 복수는 어떤 점이 다른 걸까요? 저는 이걸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복수. <더 글로리>도 그렇지만 <메데이아>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무언가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일을 당하거나 큰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 이후에 각성한 주인공은 사력을 다해 복수를 하며 자신이 당한 걸 상대방에게 되돌려줍니다.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응익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고대 합무라비 법전부터 고조선의 8조법까지 뿌리 깊은 이 응익주의는 복수극의 사고방식의 원형을 이룹니다. 응익주의에 기반한 복수극은 몬테크리스토 백작부터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이야기까지 무수한 이야기를 변주해냅니다. <메데이아>도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나선 메데이아. 시간이 지나 성공을 위해 메데이아를 버리는 이아손. 그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아손을 파멸시키려 나선 메데이아의 복수극. 이아손과 결혼하는 여인을 죽이고, 죽인 것도 모자라 여인의 아버지까지 죽이면서 이아손을 파멸로 몰고가는 메데이아의 행동. 여기까지 보면 <메데이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다릅니다. 왜냐구요?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복수. <메데이아> 속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갑니다.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서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메데이아는 또다른 행동을 합니다. 바로 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물론 메데이아가 이아손과 결혼할 공주를 죽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독 묻은 예쁜 옷과 황금 머리띠를 공주에게 주는 도구로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후 상황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손수 죽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주의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저는 이 상황을 나름의 오독으로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행위는 완벽한 복수에 가깝다고. 복수가 뭡니까? 당한만큼 돌려주는 겁니다. 당한만큼 돌려주는 행위에 숨겨진 복수자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요? 어쩌면 복수자는 복수라는 행위를 하며 자신이 당하기 전의 삶을 갈구하거나 그때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죠. 이미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복수자의 복수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메데이아는 당한만큼 갚아주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이들마저 죽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쩌면 메데이아에게 아이는 자기 삶에 미친 이아손의 흔적이자 그림자였겠죠. 위의 글을 떠올려보세요. 복수자에게 복수라는 행위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벌이는 어떤 몸부림에 가까운 것입니다. 메데이아에게 복수의 완성은 자기 삶에 남은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죽이면서 자기 삶에서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으니 이것이 완벽한 복수가 아닌가요? 물론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메데이아가 이아손을 만나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자신의 삶의 상황을 만든 것도 맞습니다. 이 정도면 저에게 메데이아의 복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로 여겨집니다.

 

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죽이면서까지 복수를 행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를 하는 복수극을 본적이 없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이야기도 그렇고,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극에서도 그렇고, 메데이아의 단계까지 복수를 밀어넣는 복수극은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메데이아>는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달성한 유일무이한 복수극처럼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행한 복수자이자 완벽하게 주체적인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으로. 아마도 저에게 <메데이아>속 메데이아는 복수의 극에 도달한 복수자의 표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또다른 완벽한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을 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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