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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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어슐러 K. 르 귄의 말-어슐러 K. 르 귄, 데이비드 네이먼

 

2018년에 어슐러 K. 르 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SF와 판타지 소설들을 쓴 작가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와닿지 않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이 쓴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도 체감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 때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저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케스는 가상의 세계인 마꼰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속 도서관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어슐러 K. 르 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우주 속 어딘가 낯선 행성에서 살면서 앤서블로 헤인 문명과 통신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죠.

 

그러나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르 귄이 이 우주의 낯선 행성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지구에서는 가능하지 않죠. 2023년의 지구를 살아가는 제가 르 귄을 만날려면 르 귄이 썼거나 르 귄이 나오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글이긴 하지만 현실의 존재감을 가진 르 귄이 존재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읽는 것도,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글에서는 살아 있는 르 귄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르 귄이 나눈 인터뷰를 담은 책이라서 더욱 더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했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서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한 이유는 르 귄이 평생동안 해온 글쓰기에 관해 인터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평생동안 했던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르 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삶에 녹아 있는 자신의 사상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살면서 익혀온 것들, 글쓰면서 경험한 것과 글로서 토해낸 자신의 생각들을. 그러면서 르 귄은 지금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인터뷰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글로서 자신의 인생의 생명력을 남긴 것처럼.

 

이제 조금 더 책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책은 르 귄이 써왔던 글 중에서 세 장르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과 시와 논픽션.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파트마다 나누었던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파트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목소리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르 귄은 소설을 쓰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소설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내면에 누군가가 있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글을 쓰는 것처럼. 목소리에 따라 쓰다보면 소설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그것이 소설을 만들어나간다고 합니다. 목소리와 리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문법 규칙의 시대성, 문학의 정전에서 지워지기 쉬운 여성 작가들, 소설에서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사용, 소설에서 사용되는 시점들의 차이, 소설에서 갈등에만 집착하는 것의 문제점, 장르소설이 문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의 의의, 도가와 불교 사상의 영향, 새로운 변화를 맞은 출판 시장의 모습까지.

 

다음 인터뷰는 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는데 르 귄은 꾸준히 시를 쓰고 발표해온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장르문학을 쓰면서 시를 계속해서 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장르 문학의 상상력이 시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르 귄은 시를 쓰는 건 소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시는 소설과 다른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건 확고한 무언가가 지시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력이 있는 가능성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르 귄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리듬입니다.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시의 형식이 되고, 시의 형식 속에서 박자와 소리가 빚어지면서 음악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르 귄은 그게 신비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르 귄은 자신이 사랑한 시인들에 말합니다. 낯선 언어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만났고, 자신이 직접 번역하면서 그 시들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해요. 그리고 운율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쓰다보면 역설적으로 자유시보다 더 자유를 얻게 된다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재자들은 시인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며 시에 대한 인터뷰는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인 세 번째 인터뷰는 논픽션에 관한 것입니다. 르 귄은 긴 작가 생활에 비해 논픽션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르 귄 자신이 논픽션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서랍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서사에 익숙해졌고, 서사를 이용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글쓰를 계속 해온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논픽션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르 귄은 몇 권의 책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남겼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채롭고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문학 해석에 대한 비판, 상상력을 푸대접하는 미국 현실에 대한 고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이용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오직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 함으로서 축소된 인간의 현실 반경에 대한 안타까움, 문학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에 대한 아쉬움, 주제 사라마구와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이야기까지. 마이클 셰이본이라는 작가의 행동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마감됩니다.

 

인터뷰를 다 보면서 든 생각인데, 르 귄의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현실에서 힘을 얻어 상상력을 꽃피우는 거죠. 리얼리즘 작가들이 현실에서 힘을 얻은 현실같은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르 귄 같은 이들은 현실에서 힘을 얻어 가상 세계의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장르문학을 만든 겁니다. 그녀가 써온 글들, 그녀가 행항 인터뷰가 그걸 증명하죠. 끝없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글을 개척해온 르 귄. 이제 그녀는 현실의 지구에 없습니다. 하지만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남아있죠. 어쩌면 르 귄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글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의 씨앗을, 자신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꽃피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르 귄이 했던 일들을 이어가는 상상력의 계승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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