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ㅣ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2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년 10월
평점 :
2023-11.정치신학-칼 슈미트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라는 글을 썼다 지웁니다. 아, 다시 써야지. 이번에는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저는 <정치신학>을 세 번째로 읽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감정을 가진 채 다 읽었습니다. 이해 못했지만 일단 다 읽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두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읽으면 되잖아. 두 번째 독서를 시작하기 전, 저는 이미 칼 슈미트의 책들을 어느 정도 읽은 상태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는 두 번째 독서 전에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정신현상학>,<존재와 시간>,<에티카>,<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같은 서양철학의 고전들을 읽어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쉽게 읽겠지. 네, 맞습니다. 두 번째 독서는 첫 번째 독서보다 쉬웠습니다. 뭐야,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었잖아. 이건 철학서라기 보다는 논적을 격파하기 위한 정치 팸플릿 같은데. 하지만 이건 오만이었습니다. 첫 번째 독서보다 이해를 더 하긴 했지만 제가 <정치신학>을 이해하는 건 아직 멀고 먼 길이었죠.
세 번째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앞의 두 번과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고 몇 번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될 때까지 들여다보고, 앞으로 갔다가 다시 앞 부분을 확인하고 뒤로 돌아오는 걸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여러번 생각을 하고, 그러고서 다시 책을 펼치고. 다시 앞부분을 읽고 또 읽고. 100페이지가 조금 넘은 얇은 책인데 책을 다 읽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독서가 섣부른 도전이었고, 두 번째 독서가 자신감으로 읽은 독서였다면, 세 번째 독서는 꼭꼭 씹어 읽기였습니다. 네, 저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꼭꼭 씹으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려고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와 정치가들의 행동에. 그들은 의회에서 투표하고, 토론하고, 논의하고, 이야기하면서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처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앞에서 독일의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초인플레이션에, 실업률에, 적자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이들이 만든 정부가 위기를 넘기기는커녕 허둥지둥, 혼란스러워 하다 다시 선거를 해서 뽑히면 다시 허둥대고 혼란스러워 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아니 이런 식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건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무능한 정치가 이런 위기 상황 앞에서 왜 필요하단 말인가? 앞으로도 쭈욱 이런 식이라면 민주주의는 필요가 없지.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아니 더 나아야만 해. 왜냐하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더 나쁠 이유가 없잖아. 그래, 맞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통치가 필요해. 강력한 힘을 가진 결단으로 이루어진 결단주의적 정치. 그게 독재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칼 슈미트는 위기 앞에서 무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가 보기엔 토론하고, 논의만 하며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지도 못하는 지금의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강한 결단력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부가 더 좋은 정부였다. 지금의 정부보다 그 정부가 더 못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칼 슈미트는 저런 생각에서 자신의 논적들을 논파해나가는 책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법실증주의 같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념들을 논파해나가는 책을 쓰며 그의 정치 이념인 ‘결단주의’는 점점 공고해진다. <정치신학>은 그 책들 중 하나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을 실증을 통해 만들어진 법규범으로만 파악하는 법실증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를 논파해나간다. ...
책의 초반부는 법을 법규범으로 파악하며 과학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법실증주의를 비판합니다. 칼 슈미트는 법실증주의가 형식만 강조하며 실제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법이 현실을 반영하려면 주권자의 결단이 들어가는 법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는 말로서 시작하며 현대 국가론의 개념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말합니다. 중세 때 신 중심의 국가론에서 중세가 지나가며 왕 같은 지도자들이 신에게서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 같은 이론이 이어졌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인민이 주권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론이 나온다는 식으로. 정확하게 도식화하면 신에서 왕으로, 왕에서 인민으로 주권자의 개념 변화를 이야기하며 그걸 정당화하는 신학적인 논의가 정치이론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드 메스트르,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 같은 반혁명주의자들을 언급하며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고 말하면, 반혁명주의자들은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는 식으로.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도 두 입장은 상이합니다. 무정부의자들에게 인간이란 선한 존재이며 모든 악은 신학적 사고와 그 파생물의 결과라도 말합니다. 그에 비해 반혁명주의자들은...
그의 인간 멸시는 끝 간 데를 모른다. 인간의 맹목적 오성, 연약한 의지, 육체적 욕구의 천박한 분출 등은 코르테스가 보기에 매우 처참한 것이었고, 이 창조물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철저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언어의 모든 어휘로도 모자랐다. 신이 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면-“내가 짓밟는 도마뱀도 인간만큼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었을 텐데.” 그에게는 대중의 어리석음도 지도자들의 무식한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전방위적 죄악시는 청교도들보다 더하다.
...
그의 역사철학에서 악의 승리는 명백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단지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막는다. 인류사에 대한 그의 인상이 표현된 비유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모두 입구나 출구나 구조를 모르는 미궁 속을 마구잡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며 이를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또한 인류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배이며, 그 안에서는 뜻하지 않게 타게된 반항적이고 천박한 승무원들이 떠들고 춤춘다. 신의 분노가 이 반항적이고 난폭한 이들을 바닷속으로 처박아 침묵이 지배하는 날까지.(p.80~81)
국가를 사람들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의 선함 보다는 악함에 기대며,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를 중요시하는 반혁명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항하며 독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독재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 이 책은 결국 칼 슈미트의 생각도 독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결단과 독재를 강조하는 칼 슈미트가 나치의 어용법학자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나요? 학살과 독재와 폭력과 파괴로 점철된 2차대전과 폐허로 가득한 독일의 몰락이 결과죠. 그렇습니다. 독재로 끝나는 <정치신학>의 현실적 결말이 전쟁과 국가의 파괴라는 걸 생각해봤을 때, 저에게 <정치신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예고하는 예고편처럼 보입니다. 칼 슈미트의 논리가 가닿은 지점이 저기라면 저에게 칼 슈미트는 공포의 사상가이고 그의 책은 공포스러운 책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