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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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녹색의 장원-윌리엄 허드슨

 

이 소설은 <정글 북>, <타잔> 등으로 대변되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인 남성 주인공, 이상적이고 신비한 여인,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자연, 어딘가 열등해보이는 원주민, 제국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 우월주의, 식민주의,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 여기까지보면 <녹색의 장원>은 더 이상 읽을 필요도 없는 그 시대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자세히 살피보면 어딘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이 균열점이 소설에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이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은 백인 남성의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타잔>, <솔로몬 왕의 금광>, <잃어버린 세계> 같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은 백인 남성의 성공 서사기 기본적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벨의 삶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아벨은 베네주엘라의 정치적 전복을 꿈꾸다 들켜서 도주합니다. 첫 번째 실패죠. 두 번째로 아벨은 야생으로 가서 황금을 찾는 엘도라도식의 꿈을 꿉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벨은 황금을 찾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아벨은 야생의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네 번째로, 아벨은 숲에서 만난 원주민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리마를 죽인 원주민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원주민들끼리 싸움으로 살육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일체감으로 육식을 금하던 리마 때문에 하지 못하던 육식을, 리마가 죽고 나서 숲에서 자기 파괴적으로 지내다 무기력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행하게 됩니다. 아벨은 죽은 원주민의 눈을 보면서, 육식을 행하면서 생각하는 자조와 자괴의 생각하면서,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자각합니다. 정확하게 보면, 아벨은 원주민들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한 것이죠. 이건 아벨이 가지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실패라고 할 수 있죠.

 

위에 적은 것만 보면, 이 소설은 백인 남성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백인 남성 성공 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의 공식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일까요? 추측이긴한데, 그건 작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윌리엄 허드슨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국적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영국으로 가서 문인 생활을 하게 되죠. 문명에서 살며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체성만 보면 아르헨티나인이자 영국인이자 미국인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완전한 아르헨티나인도,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세 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 나라 사람이 아닌거죠.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백인 남성이지만 백인 남성 중에서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그는 백인 남성 중심주의에 완벽하게 젖어 있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작가로서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 이 소설에 반영된 탓인지, 백인 남성 중심주의와 동시에 그 이념의 실패와 균열이 소설을 맴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영국이라는 문명 속에 살며 남미의 자연을 그리워한 작가 윌리엄 허드슨은 남미에서 식민주의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가난한 삶도 경험했고, 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습니다. 문명과 자연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그는, 백인 남성의 식민주의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미의 자연에서 아벨의 지속적인 실패는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살육으로 몰아가는 건, 남미 식민지 역사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의 실패 또한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와도 이어집니다. 이렇듯 가득한 실패는 작가의 삶을 반영한,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과 다른 소설의 등장으로 형상화됩니다.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하고 나니, 제가 무언가 이 소설의 포장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소설이 다른 빅토리아 대중 문학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백인 남성의 실패로 점철된 소설, 자조와 자학, 망상을 거쳐 자기 정당화로 이어지는 백인 남성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은 백인의 승리, 백인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다른 빅토리아 대중문학과 다를 수밖에 없죠. 마지막의 아벨의 자기 정당화는 동시대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위선과 허구와도 이어지죠. 죽은 리마를 다시 만날거라는 환상을 품고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아벨의 모습은, 폭력과 학살, 착취로 가득한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 시대 백인 남성들의 모습과 겹치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당화 속에서도 윌리엄 허드슨은 백인 남성들의 현실을 맴도는 실패와 위선, 폭력과 착취,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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