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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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4.쇼샤-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결말을 알고 책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요? 뻔히 결말을 아는데 책이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요? <쇼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배경이고 20세기 초반이 무대라면 그러면 결말이 정해진 거 아닌가. 여기 나오는 유대인들은 모두 다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거나 그전에 비참하게 죽거나 아니면 운좋게 여기를 빠져나가겠지. 읽기도 전에 저런 생각을 하니 책을 읽는 흥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읽었습니다. 제가 읽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쇼샤>는 예상밖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우선 이 소설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료나 통계자로에 나오는 단순한 희생자로서의 유대인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희생자이기 이전에,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사진 속 시체이거나 참사나 폭력의 희생자로서 물화되기 이전의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모습으로서. 이들은 울고, 웃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즐거워하고, 어떤 때는 악하고, 어떤 때는 순수하고, 서로를 위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 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유대인이라는 틈바구니 안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패거리를 이루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증명하려 하고, 삶을 살아나가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이들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이후에 겪는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희생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 얼마나 처참하게 죽는지 알기에, 이들의 삶을 이후에 다가오는 참사의 예비과정으로서 인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에 무슨 일을 겪었든, 이들에게 중요한 건 현재의 삶입니다. 현재를 사는 것, 현재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는 것, 이것이 아직 나치가 다가오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겁니다. <쇼샤>가 보여주는 게 그겁니다. 나치 이전의 바르샤바 유대인 사회를 살았던 작가인 나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여인 쇼샤의 사랑 이야기와 그 주변 유대인들의 삶을 그려낸 <쇼샤>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게.

 

작가가 나치가 다가오기 이전에 소설을 끝내고, 에필로그에 전쟁 이후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는 건, 참사 이전에 유대인들이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의 어딘가 경쾌하고 아이러니하며 풍자적이며 지적이며 신비하며 어딘가 슬픈 분위기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학살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역사의 무게감을 부각시키는 대신에 인간 삶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유대인들도 유대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인간의 삶을 그리는 데 집중하면서 형상화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를 예고하는 혐오의 만연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위협은 이들의 삶이 역사와 어쩔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마저 뺄 수는 없었겠죠. 그 모든 것들도 삶과 이어져 있으니까요. , 분명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들도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그 속삭임 속에서 저는 명심 또 명심합니다. 역사 속 희생자들 이전에 그들의 삶이 먼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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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3-1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짜라투스트라 2023-03-13 17: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뤼시스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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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3.뤼시스-플라톤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니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왜 이 책은 읽기 어려운가.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읽기 어렵습니다. 필연적으로 이 글은 이 책이 왜 읽기 어려운지 고찰하는 방식으로 쓸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나에게 왜 이 책은 읽기 어려운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겠죠. , 먼저 그 전에 책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우정이라고 번역되는 필리아에 대해 논의한 서양 최초의 책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에서 시작해서 필리아로 옮겨가는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어떤 걸 주장하고, 주장한 그걸 자신이 반박하고, 반박한 것 자체를 다시 반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어놓고 보니 어렵네.^^;; 책의 내용을 대충 말했으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이 책의 형식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A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소크라테스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A라는 명제가 맞는지 대화를 나눕니다. 소크라테스는 A를 분석하며 A가 맞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다른 두 사람도 동의하죠. 이제 셋은 A가 아닌, B라는 명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소크라테스는 B라는 명제를 파고들며 B라는 명제가 틀렸음을 알아냅니다. 다음에는 C가 등장하죠. 소크라테스는 C도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뒤이어 D, E도 등장하지만 모두 소크라테스의 증명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이 작품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라는 두 소년의 보호자가 등장하며 어정쩡하게 막을 내립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냐고...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 이런 식으로 말을 계속해서 논박하다가 특정한 결론 없이 파장인 아포리아로 끝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읽을 때마다 찾아오는 저 허무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계속해서 읽을 생각이라면, 허무함을 넘어서서 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저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질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두 번째로 이 책의 문장, 아니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 이해력, 독해력이 부족한 걸까요? 분명히 한글로 적혀 있는데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문장은 이해되는 것 같은데 늘여서 파악해보면 전체적으로 이해가 안 되요.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한 주장을 반박했다가 다시 옳다고 하고, 옳다고 한 이야기를 뒤에는 다시 부정하죠. 이걸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뒤집히고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글을 읽다가 결론도 없이 막을 내리는데 이게 어떻게 이해가 되나요?

 

어쩌면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 불리는 논증의 방법을 초기 대화편을 통해서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죠. 자기 몸으로 스승의 대화술을 익힌 뒤에 그걸 바탕으로 중기 이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해나는 것이죠. 어찌 되었든 초기 대화편인 <뤼시스>는 읽기가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요. 읽기로 했으니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뤼시스> 읽기도 이번 한 번이 끝이 아닙니다. 꾸준히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한 번 시작했으니 포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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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4-30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하고 담백한 글에 막 웃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서재를 만들어 운영하시네요.

소크라테스의 우정은 크리톤에게 했던 마지막 부탁이 정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뤼시스론을 좀더 기대하고 있을게요.

짜라투스트라 2023-05-01 14:30   좋아요 0 | URL
감시합니다^^
 
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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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

 

처음에는 화자인 나의 모습에 답답함이 치밀었습니다. 아니 똑똑한 것처럼 말하던 사람이 왜 온통 당하기만 하는거야. 범인을 모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 추리소설의 관행상 초반부, 중반부에는 화자인 나가 범인을 알 수야 없지. 그런데... 범인을 모르고 제대로된 추리를 못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구. 그렇다고 왜 바보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거야. 누군가의 협박을 당했으면 그 협박에 조금 더 괜찮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협박범을 잡겠다고 혼자서 난리치다 돈만 뺐기고 위험에 처하냐구. 혼자서 무언가 하는 거 보다 다른 이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더 괜찮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지속되는 추리의 헛발질은 알고는 있었지만 보다보니 너무 답답함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지막에 진상이 드러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습니다. 홈즈 같은 명탐정이 없는 대신, 다수의 왓슨들과 레스트레이드 경감 같은 무능력한 경찰들이 있죠. 홈즈가 없고 왓슨과 레스트레이드들만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누군가 나서서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걸 기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대신에 무수한 추리의 헛발질과 사람들의 오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의심과 모두를 의심하는 경찰의 눈초리만 있죠. 하지만 무수한 오류들이 더해지며, 사람들의 헛발질과 노력이 더해지고, 거기에 우연들이 합해지며 리슐리외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은 진실이라는 햇빛으로 다가갑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로서 해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들이 맺어나가는 관계의 힘과 그 관계의 힘에서 인간들 다수의 의견이 더해지며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 비범한 한 사림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가 합쳐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 아무래도 저는 변태인가 봅니다.^^;; 이런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 평법한 이들의 연대, 함께 하면 더욱 더 강해지는 관계의 힘 같은 이상한 관념들을 보니까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저를 이런 관념쪽으로 몰아가나봐요, 어쨌든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는 비범한 엘리트가 주도하는 엘리트주의가 정통이고, 이런 평범한 이들의 연대로서 해결되는 구조는 이단이니까, 이 소설은 이단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재미있는 추리로설 정도로만 결론 내리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왜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거죠.^^;;;


*진짜 <손에 손잡고> 노래 듣고 있습니다. 노래 참 좋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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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2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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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정치신학-칼 슈미트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라는 글을 썼다 지웁니다. , 다시 써야지. 이번에는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저는 <정치신학>을 세 번째로 읽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감정을 가진 채 다 읽었습니다. 이해 못했지만 일단 다 읽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두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읽으면 되잖아. 두 번째 독서를 시작하기 전, 저는 이미 칼 슈미트의 책들을 어느 정도 읽은 상태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는 두 번째 독서 전에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정신현상학>,<존재와 시간>,<에티카>,<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같은 서양철학의 고전들을 읽어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쉽게 읽겠지. , 맞습니다. 두 번째 독서는 첫 번째 독서보다 쉬웠습니다. 뭐야,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었잖아. 이건 철학서라기 보다는 논적을 격파하기 위한 정치 팸플릿 같은데. 하지만 이건 오만이었습니다. 첫 번째 독서보다 이해를 더 하긴 했지만 제가 <정치신학>을 이해하는 건 아직 멀고 먼 길이었죠.

 

세 번째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앞의 두 번과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고 몇 번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될 때까지 들여다보고, 앞으로 갔다가 다시 앞 부분을 확인하고 뒤로 돌아오는 걸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여러번 생각을 하고, 그러고서 다시 책을 펼치고. 다시 앞부분을 읽고 또 읽고. 100페이지가 조금 넘은 얇은 책인데 책을 다 읽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독서가 섣부른 도전이었고, 두 번째 독서가 자신감으로 읽은 독서였다면, 세 번째 독서는 꼭꼭 씹어 읽기였습니다. , 저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꼭꼭 씹으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려고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와 정치가들의 행동에. 그들은 의회에서 투표하고, 토론하고, 논의하고, 이야기하면서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처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앞에서 독일의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초인플레이션에, 실업률에, 적자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이들이 만든 정부가 위기를 넘기기는커녕 허둥지둥, 혼란스러워 하다 다시 선거를 해서 뽑히면 다시 허둥대고 혼란스러워 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아니 이런 식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건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무능한 정치가 이런 위기 상황 앞에서 왜 필요하단 말인가? 앞으로도 쭈욱 이런 식이라면 민주주의는 필요가 없지.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아니 더 나아야만 해. 왜냐하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더 나쁠 이유가 없잖아. 그래, 맞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통치가 필요해. 강력한 힘을 가진 결단으로 이루어진 결단주의적 정치. 그게 독재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칼 슈미트는 위기 앞에서 무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가 보기엔 토론하고, 논의만 하며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지도 못하는 지금의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강한 결단력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부가 더 좋은 정부였다. 지금의 정부보다 그 정부가 더 못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칼 슈미트는 저런 생각에서 자신의 논적들을 논파해나가는 책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법실증주의 같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념들을 논파해나가는 책을 쓰며 그의 정치 이념인 결단주의는 점점 공고해진다. <정치신학>은 그 책들 중 하나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을 실증을 통해 만들어진 법규범으로만 파악하는 법실증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를 논파해나간다. ...

 

책의 초반부는 법을 법규범으로 파악하며 과학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법실증주의를 비판합니다. 칼 슈미트는 법실증주의가 형식만 강조하며 실제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법이 현실을 반영하려면 주권자의 결단이 들어가는 법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는 말로서 시작하며 현대 국가론의 개념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말합니다. 중세 때 신 중심의 국가론에서 중세가 지나가며 왕 같은 지도자들이 신에게서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 같은 이론이 이어졌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인민이 주권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론이 나온다는 식으로. 정확하게 도식화하면 신에서 왕으로, 왕에서 인민으로 주권자의 개념 변화를 이야기하며 그걸 정당화하는 신학적인 논의가 정치이론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드 메스트르,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 같은 반혁명주의자들을 언급하며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고 말하면, 반혁명주의자들은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는 식으로.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도 두 입장은 상이합니다. 무정부의자들에게 인간이란 선한 존재이며 모든 악은 신학적 사고와 그 파생물의 결과라도 말합니다. 그에 비해 반혁명주의자들은...

 

그의 인간 멸시는 끝 간 데를 모른다. 인간의 맹목적 오성, 연약한 의지, 육체적 욕구의 천박한 분출 등은 코르테스가 보기에 매우 처참한 것이었고, 이 창조물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철저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언어의 모든 어휘로도 모자랐다. 신이 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면-“내가 짓밟는 도마뱀도 인간만큼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었을 텐데.” 그에게는 대중의 어리석음도 지도자들의 무식한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전방위적 죄악시는 청교도들보다 더하다.

...

그의 역사철학에서 악의 승리는 명백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단지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막는다. 인류사에 대한 그의 인상이 표현된 비유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모두 입구나 출구나 구조를 모르는 미궁 속을 마구잡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며 이를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또한 인류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배이며, 그 안에서는 뜻하지 않게 타게된 반항적이고 천박한 승무원들이 떠들고 춤춘다. 신의 분노가 이 반항적이고 난폭한 이들을 바닷속으로 처박아 침묵이 지배하는 날까지.(p.80~81)

 

국가를 사람들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의 선함 보다는 악함에 기대며,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를 중요시하는 반혁명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항하며 독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독재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 이 책은 결국 칼 슈미트의 생각도 독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결단과 독재를 강조하는 칼 슈미트가 나치의 어용법학자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나요? 학살과 독재와 폭력과 파괴로 점철된 2차대전과 폐허로 가득한 독일의 몰락이 결과죠. 그렇습니다. 독재로 끝나는 <정치신학>의 현실적 결말이 전쟁과 국가의 파괴라는 걸 생각해봤을 때, 저에게 <정치신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예고하는 예고편처럼 보입니다. 칼 슈미트의 논리가 가닿은 지점이 저기라면 저에게 칼 슈미트는 공포의 사상가이고 그의 책은 공포스러운 책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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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꾸러미 2023-02-12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어떻게
독자가 받아들이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고 백신으로 순기능할 수도 있는
책인거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23-02-12 22:14   좋아요 0 | URL
실제로 많은 후대의 사상가들이 칼 슈미트의 사상을 자기 식으로 변형시켜서 쓰기도 했죠.
 
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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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어슐러 K. 르 귄의 말-어슐러 K. 르 귄, 데이비드 네이먼

 

2018년에 어슐러 K. 르 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SF와 판타지 소설들을 쓴 작가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와닿지 않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이 쓴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도 체감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 때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저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케스는 가상의 세계인 마꼰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속 도서관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어슐러 K. 르 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우주 속 어딘가 낯선 행성에서 살면서 앤서블로 헤인 문명과 통신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죠.

 

그러나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르 귄이 이 우주의 낯선 행성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지구에서는 가능하지 않죠. 2023년의 지구를 살아가는 제가 르 귄을 만날려면 르 귄이 썼거나 르 귄이 나오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글이긴 하지만 현실의 존재감을 가진 르 귄이 존재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읽는 것도,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글에서는 살아 있는 르 귄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르 귄이 나눈 인터뷰를 담은 책이라서 더욱 더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했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서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한 이유는 르 귄이 평생동안 해온 글쓰기에 관해 인터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평생동안 했던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르 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삶에 녹아 있는 자신의 사상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살면서 익혀온 것들, 글쓰면서 경험한 것과 글로서 토해낸 자신의 생각들을. 그러면서 르 귄은 지금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인터뷰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글로서 자신의 인생의 생명력을 남긴 것처럼.

 

이제 조금 더 책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책은 르 귄이 써왔던 글 중에서 세 장르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과 시와 논픽션.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파트마다 나누었던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파트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목소리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르 귄은 소설을 쓰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소설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내면에 누군가가 있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글을 쓰는 것처럼. 목소리에 따라 쓰다보면 소설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그것이 소설을 만들어나간다고 합니다. 목소리와 리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문법 규칙의 시대성, 문학의 정전에서 지워지기 쉬운 여성 작가들, 소설에서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사용, 소설에서 사용되는 시점들의 차이, 소설에서 갈등에만 집착하는 것의 문제점, 장르소설이 문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의 의의, 도가와 불교 사상의 영향, 새로운 변화를 맞은 출판 시장의 모습까지.

 

다음 인터뷰는 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는데 르 귄은 꾸준히 시를 쓰고 발표해온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장르문학을 쓰면서 시를 계속해서 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장르 문학의 상상력이 시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르 귄은 시를 쓰는 건 소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시는 소설과 다른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건 확고한 무언가가 지시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력이 있는 가능성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르 귄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리듬입니다.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시의 형식이 되고, 시의 형식 속에서 박자와 소리가 빚어지면서 음악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르 귄은 그게 신비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르 귄은 자신이 사랑한 시인들에 말합니다. 낯선 언어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만났고, 자신이 직접 번역하면서 그 시들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해요. 그리고 운율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쓰다보면 역설적으로 자유시보다 더 자유를 얻게 된다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재자들은 시인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며 시에 대한 인터뷰는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인 세 번째 인터뷰는 논픽션에 관한 것입니다. 르 귄은 긴 작가 생활에 비해 논픽션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르 귄 자신이 논픽션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서랍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서사에 익숙해졌고, 서사를 이용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글쓰를 계속 해온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논픽션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르 귄은 몇 권의 책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남겼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채롭고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문학 해석에 대한 비판, 상상력을 푸대접하는 미국 현실에 대한 고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이용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오직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 함으로서 축소된 인간의 현실 반경에 대한 안타까움, 문학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에 대한 아쉬움, 주제 사라마구와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이야기까지. 마이클 셰이본이라는 작가의 행동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마감됩니다.

 

인터뷰를 다 보면서 든 생각인데, 르 귄의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현실에서 힘을 얻어 상상력을 꽃피우는 거죠. 리얼리즘 작가들이 현실에서 힘을 얻은 현실같은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르 귄 같은 이들은 현실에서 힘을 얻어 가상 세계의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장르문학을 만든 겁니다. 그녀가 써온 글들, 그녀가 행항 인터뷰가 그걸 증명하죠. 끝없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글을 개척해온 르 귄. 이제 그녀는 현실의 지구에 없습니다. 하지만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남아있죠. 어쩌면 르 귄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글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의 씨앗을, 자신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꽃피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르 귄이 했던 일들을 이어가는 상상력의 계승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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