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 다 지나간다.

한 해를 떠나보내며 뭘 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무언가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 해를 살았다 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해 전체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한 해동안 했던 내 독서생활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말 할 수 있겠다.

2019년은 고전독서모임 때문에 인문학 고전에 손을 대면서,

소설보다는 인문학 쪽으로 본격적인 독서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특히 동양고전 읽기 모임을 하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본격적인 읽기를 시도한 건,

2019년 독서의 특징이다.

2019년 이전에는 거의 읽지 않던, 동양고전들을 내 나름의 열정을 가지고 읽으면서,

동양철학과 동양고전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된 건 2019년 독서가 내게 준 선물이다.

동양철학과 동양고전의 세계의 깊이와 힘을 생생히 느끼면서.

동시에 나는 그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서양고전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칸트와 헤겔을 함께 읽으면서 머리와 마음에 과부하가 걸려

한달동안 독서를 휴식하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달의 휴식 뒤에 인문학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소설만 다시 집중적으로 읽게 된 건, 2019년 후반기 독서의 특징이다.

그렇게 소설만 읽다가 올 한 해가 다 지나갔다.

2020년에는 내 독서생활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2020년은 2020년만의 무언가가 일어나리라.

그 무언가를 기대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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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은 열심히 리뷰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치의 고질병인 '게으름병'이 도지며

좀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써야지 하면서 쉬다보니 오늘까지 쉬고 있네요.

이제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저번처럼 열심히 리뷰를 쓰는 시기가 오겠죠. ㅋㅋㅋ

 

 

그래도 여전히 책은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눈앞을 보니 제 평생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라온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가 있네요.

소리와 분노 (양장)

 

분명히 다 읽었는데, 다 읽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30,40%프로 이해했다면 많이 이해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읽은 걸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진짜 이 책은 책장 넘기는 소리와 책을 이해 못하는 분노로만

기억될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책을 읽은 것 자체에 의의를 두겠습니다.

제가 '읽은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걸 요새는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재능

 

<소리와 분노>를 넘어가니 나보코프의 <재능>이 나오네요.

산 넘어 산이라고 해야하나...

이 소설도 <소리와 분노> 못지않게 어렵습니다.

아니,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대한 상당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기 힘들게 만든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리와 분노>보다 더 낯선 것은 사실입니다.

나보코프가 결코 소설을 쉽게 쓰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견된 결과입니다.

다양한 패러디,지적인 언어 유희,비유,풍자등을 뒤섞어서 쓰며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작가답게

<재능>은 패러디와 비유와 풍자의 보고입니다.

당연하게도 읽는 독자는 그것 때문에 소설이 쉽지 않구요.

읽다보니 '이것도 '읽는 재능'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 읽었습니다.

무손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음 읽은 책은 <닥터 지바고>네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소리와 분노><재능>을 읽은 힘으로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ㅋㅋㅋㅋ

닥터 지바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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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9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19 12:26   좋아요 0 | URL
알겠습니다^^

프레이야 2019-12-2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터지바고 소설을 읽지 않았는데 읽어봐야겠어요. 한 해 동안 열심히 독서인으로 살아오신 거 대단해요. 새해에도 주욱 이어가실거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짜라투스트라 2019-12-29 12: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도 새해에도 좋은 독서생활 이어가시기를...
 
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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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8.백년보다 긴 하루-친기즈 아이뜨마또프

여기서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철길 양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펼쳐진 광대한 불모지- 중앙아시아의 노란 스텝 지대, 사리-오제끼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으로부터 경도가 정해지듯...

그리고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12)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언제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18)

관측창 밖으로 우주의 검은 바다에서 휘황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지구가 보입니다. 지구는 아름답습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푸름과 어린이아의 머리처럼 섬세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서는 지구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우리의 형제자매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감히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69)

우리는 공연히 기도문을 웅얼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평온해지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 말들은,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금괴처럼 갈고 닦인 기도문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 대해 해주어야 할 마지막 말이었다. 그것이 관습이었다.(108)

그 자신의 견해? 그 자신의 특별한 견해? 그런 건 허용될 수 없소. 일단 어떤 생각이 종이에 적히면 그건 벌써 개인을 떠난 거요. 펜으로 쓰인 건 도끼로도 잘라 낼 수 없어. 누구든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건 사치라고.(205)

우주의 무한한 영원 속에서 지구는 마치 한 알의 모래와도 같았다. 온 우주에는 그런 모래알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인간은 오직 행성 지구에서만 존재하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았고 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알았다. 그리고 때로 호기심이 크게 발동할 때면 어딘가 다른 행성에 자기들과 같은 종족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보려고 했다. ... 실로, 태양계 내에는 다른 생명의 흔적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그 의문을 망각해 버렸다. ...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는 자기네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생가했다. 그리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계속 돌았다.(224~225)

만일 사람들이, 각자가 신처럼 여겨지도록 생각을 불러일으킬 방법이 없다면, 이들이 어떻게 자기네들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인간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378)

예술에서의 환상에는 그 한계와 법칙이 있다. 즉, 환상은 독자들이 그것을 거의 사실로 믿을 수 있을 만큼 현실에 끼어들어야 한다.(393)

작가란 자신의 영혼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 자신이 사회의 영혼의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408)

영화로도 제작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읽기가 어려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왜 읽기가 어려운 소설일까요? 그건 시간관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입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 시간관은 과거에서 미래라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미래에서 과거로의 역행적인 흐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온 외계인의 시간관은 인간의 시간관과 다릅니다. 외계인은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는 일직선으로 체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구요? 저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릅니다. 소설가의 설정이니까요. 단지 제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신'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정도입니다. 신? 네, 신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말할 때 신이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 연관된 여러가지 추측을 내놓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이 시간에 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그 인식.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온 외계인의 시간관이 앞에 말한 신의 시간관과 일치합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읽기 힘든 건,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관과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총체적인 시간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소설가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 시간관을 넘어서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간관을 이해하는 건 힘듭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도 페이지를 넘기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것인데, 소설에 담긴 내용은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를 넘어서서 초월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아이러니, 내 삶의 시간과 내가 읽는 책에 담긴 시간 사이의 아이러니. 이 겹겹의 아이러니와 갭이 소설 속에 담긴 시간관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 초월적인 시간관을 인식하려는 노력이 불러 일으키는 가능성 때문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운 소설이 됩니다.

자 저는 무엇 때문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외계인의 시간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냥 하고 싶어서? 아니면 글 쓰다가 할말이 없어서? 아닙니다. 제가 외계인의 시간관 이야기를 하는 건, <백년보다 긴 하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를, 앞에서 말한 '총체적인 시간관'을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담아내려는 하나의 시도로 봅니다. 도대체 내용이 어떻기에? 그 내용을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소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위치한 간이역의 철도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온 예지게이가 겪은 하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예지게이는 평생의 벗이자 직장 동료인 까잔깝이 죽자 그를 중앙 아시아의 신성한 묘지 '아나-베이뜨'에 묻기 위해 떠납니다. 그는 아나-베이뜨로 향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소설은 그의 과거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그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충격받아 생긴 신경증, 신경증으로 전쟁 후에 제대해서 힘겹게 지내다 까잔갑을 우연히 만나서 중앙아시아의 간이역에 정착하며 열심히 살아온 일, 까잔갑에게 선물받은 낙타 까라나르를 키우며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일, 전쟁 때 독일 포로로 잡힌 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을 못하고 떠돌아다니다 이 역에 온 아부딸리브 가족과의 조우, 아부딸리브가 자신의 전쟁 경험을 수기로 쓰다 들켜서 스탈린 시대의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잡혀 죽은 일, 그 가족을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다 아부딸리브의 아내 자리빠를 사랑하게 된 일, 그녀가 그걸 알고 도주한 일, 스탈린이 죽고 자유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아부딸리브의 누명을 벗긴 일까지.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소설은 예지게이의 삶을 통해서 한 시대와 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걸 넘어서서 예지게이와 까잔갑의 핏줄이 속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과거도 이야기합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을 실제 과거에 있었던 일처럼 그리면서. 한 사람의 삶과 한 민족의 과거와의 결합. 하지만 이 소설의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넓디넓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설치된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우주선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우주 이야기는 인류의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미소가 공동으로 행하던 우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우주 정거장에 머물던 우주 비행사 둘은 우연히 고도로 발달된 외계문명과 소통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행성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우주 비행사들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한 외계인의 선진 문명에 감명 받아 그 문명의 기술과 가치관을 지구로 전파하려 합니다. 당연하게도 미국과 소련 당국은 혼란을 겪고, 격론을 거쳐 외계인이 위험하니 문명 전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두 우주비행사를 추방하고, 외계인이 다가올 시에는 미사일을 쏘겠다고 선전포고를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틀 속에 갇히는 셈이죠. 이 모든 일과 서술은 소설 속에서 예지게이가 겪은 하루 속에서 벌어집니다. 한 인간의 삶과 한 민족의 전설로서의 과거, 인류의 미래를 향한 몸부림과 그 결과까지, 모두 담아낸 이 소설을 보며 어떻게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파악하는 총체적인 시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총체적인 시각을 형상화하려는 소설가의 의지가 소설이 발표된 시기와도 일치한다고 봅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81년은 구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흐름이 몰아치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던 시절입니다. 이 소설의 저자도 그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세상에 관한 이상적인 마음을 품었겠죠. 사회주의의 이상이 그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실현되리라 믿었던 낙관적인 전망이 소설에 담긴 느낌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하루의 이야기 속에서 결합시키는 시도를 통해. 10년 뒤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할 줄은 꿈에도 모른채로. 지금 읽어도 그 시절의 낙관이 몸에 전해집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이상을 향한 노력이라고 봅니다. 이상은 이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실현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상을 향해 노력하다 보먼 어떤 성취와 발전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그 성취와 발전의 산물로서 이 작품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가 그 노력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죠. <백년보다 긴 하루>가 전해주는 이상을 향한 노력과 시도의 품안에서 저는 잊혀져가는 이상과 몽상의 꿈을 꿉니다. 비록 그것이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해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행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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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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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7.노름꾼-도스토에프스키

내가 보기에는 도박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고 고루하다는 생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생각이 더 우스운 것 같다. 도박이 다른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돈을 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25)

이문을 남기고 내기로 돈을 따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룰렛판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고 따내고 하는 셈이다.(26~27)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이겨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입니다.(54)

쾌락이나 희열은 언제나 유익하고, 야생적인 끝에는 권력조차 역시 일종의 독특한 향락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폭군이며 박해자가 되는 것을 좋아했어요.(61)

프랑스 인이 천성적으로 다정한 경우는 보기 드물다. 언제나 명령에 따르듯이, 그리고 계산 속에서 다정하게 구는 것이다.(80)

우리들 집에, 모스끄바에 없는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정원도 있고 꽃도 있고. 여긴 그런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향기가 가득하고 사과들이 익어가는 넓디넓은 그곳, 그런 것들이 이곳에는 없단 말입니다. 정말 꼭 외국으로 왔어야만 했을까요!(175)

당신의 말씀 속에서 전 과거의 현명하고 열광적이고 또 냉소적인 친구를 발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인 뿐이지요.(251~252)

프랑스 인은 완성된 형식이고 아름다운 형식입니다. ... 파리 사람들의 민족적 형식은 아직 우리가 곰처럼 미련했을 때에 이미 우아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이 귀족 정신을 계승했고, 그래서 이제는 아주 저속한 프랑스 인들까지도 매너와 태도와 표현들 그리고 생각에 아주 우아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형식에 관여하는 데에는 아무런 창의력도 없고 또 정신이나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유산에 의해서 손에 넣은 것뿐이지요. ... 러시아 아가씨는 그 형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포장물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 본래의 영혼이라고 인정하며, 또 그의 정신과 마음의 자연스러운 형식이라고 받아들입니다. ... 러시아 인들은 아름다움을 꽤 민감하게 구별할 줄 알고 또 그것을 갈망하지요.(256~257)

루이도어와 프리드흐스도어 그리고 탈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도박대, 타오르듯 번쩍이면서 심판의 삽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금화의 기둥들, 그리고 회전판 주위에 쌓여 있는, 길이가 1아르신이나 되는 은화의 기둥들, 나는 그것들을 너무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것이다. 방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남겨 놓고 도박장 가까이에 다가가기만 하면 나는 벌써부터 돈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거의 경련을 일으킬 지경까지 되고 만다.(287)

러시아 인들은 그 재능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자신에게 알맞는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는 바로 형식에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 인들은 대부분 풍부한 재능을 갖추고 있기 대문에 적절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290)

예전에 고전 읽기 모임을 하면서, 모임을 리드하던 분이 소크라테스를 두고 '소선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소선생'이라는 표현의 어감이 좋았습니다. 저 멀리 이국에 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마치 우리 곁에서 우리한테 직접 말을 걸어 무언가 가르치는 친근감이 들어서요. 이번에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작정하고 읽으려고 그의 책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준비하면서 저도 모르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도선생'이라고 불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도선생',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성향에 대한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노름꾼>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도박장이 있는 외국의 도시 룰레텐베르크를 배경으로 두 개의 지옥에 빠진 남자 '나'와 그 주변인물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두 개의 지옥?'이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도박과 지옥이라는 두 개의 지옥에 빠져 헤매고 있습니다. 근데 도박은 이해하겠는데 사랑도 지옥이라고? 나에게는 두 개의 애착의 대상이 있습니다. 도박과 사랑. 도박은 그 자체로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지옥이겠죠.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소설을 통해 도박이라는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했고요. 그런데 또다른 애착의 대상인 사랑도 나에게 괴롭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의 대상인 뽈리나는 나의 사랑을 무시하는 듯 행동하며 프랑스 귀족인 드 그리외와 영국인 신사 에이즐리 사이를 맴돕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뽈리나를 증오하며,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 관심을 보이면 그녀의 어떤 말이라도 들을 노예가 되며 기뻐합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사랑이 지옥이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지막까지 두 지옥 사이에서 헤매던 나는 뽈리나의 감정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도박이라는 지옥을 선택합니다.

사랑이 아닌, 도박이라는 지옥을 선택하며 수렁에 빠진 채로 소설의 결말이 나는 걸 보며, 저는 이 소설이 지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감정의 격동, 격렬한 열정을 선호하고, 서양의 가치관과 성향보다는 러시아적인 사고와 문화를 좋게 보는 작가다운 결말이라서. 서구화에 반대화며 러시아적인 것의 부활을 꿈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갑자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변화하는 결말을 제시하지는 않겠죠? 그러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는 것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이고 극단적인 그 무엇의 인간 성향이 만들어나가는 극단과 열정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도박을 하며 '도박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저는 앞으로 제가 읽을 '도선생'의 소설들이 더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무엇을 펼쳐보일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어쩌면 그걸 알면서도 계속 읽어나가는 저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빠진 도스토예프스키적 인간이겠죠. 그래서 '도선생'적 인간인 저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소설들을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흡사 도박이라는 지옥에 빠진 사람처럼, 저도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인간 심연의 세계를, 그 지옥을 탐사하는 기분으로. 이렇게 적고 보니 진짜 <노름꾼>의 '노름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와 제가 비슷하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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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프로파일링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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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6.심리죄:프로파일링-레이미

어젯밤 그들이 또 나를 찾아왔다.

늘 그랬듯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내 침대 앞에 섰다. 늘 그랬듯 나도 몸이 굳은 채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까맣게 타버린, 머리 없는 몸뚱이들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이번에도 그는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도 나와 같아.(9)

범인은 여성을 성폭행한 게 아니라 이 도시를 성폭행하고 있었던 겁니다!(18)

범인의 눈에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범행을 저지르는 그 순간, 범인은 이 도시를 정복했다는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21)

고개를 들어 보니 짙은 남색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있지. 그렇게 별이 되어 하늘에서 가족을 비추고 원수도 비추고 있겠지.(84)

공포는 끊임없이 비웃은 구렁이처럼 그들 사이를 오갔다. 그 구렁이는 혀를 날름거리고 독니를 드러내면서 두 사람의 공포와 무력감을 거만하게 감상하는 듯했다.(229)

넌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진 만큼 더 큰 책임도 있어. 피해도 소용없다고. 놈을 잡는 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266)

팡무와 괴물 사이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개 속에서 놈이 자신을 훔쳐보며 몰래 웃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놈이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었지만, 놈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 같았다.(486)

마지막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보다가 이 책의 주인공이자 '심리죄' 시리즈의 주인공인 팡무가 '중국 독자들에게 영웅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에 눈길이 갑니다. 영웅이라. 팡무가 영웅적인 인물인 건 맞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프로파일링 실력을 가지고서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들을 힘겨운 여정 끝에 잡아냅니다. 아직 발매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의 다음 작품들을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심리죄' 시리즈의 첫 작품인 이 책만 읽어도 분명 영웅적인 면모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책에서 팡무는 영웅이라고 불리기에는 미흡한 존재입니다. 이 책에서의 팡무는 영웅이 아닌, 영웅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영웅이 되기 위한 길을 닦고 있는 듯한. 아니, 오히려 이 책의 팡무만 놓고 보면 어딘가 꺼려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꺼려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 먼저 꺼려지는 부분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께요. 이 소설은 재밌습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마. 과거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미스테리한 탐정격의 인물. 그 인물이 보이는 천재성. 예측이 안 되는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과 그 살인의 진실을 밝혀 더 이상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려는 탐정의 지적인 혈투. 예상 밖의 트릭과 서스펜스가 있는 액션. 마지막의 숨막히는 범인과의 승부까지. 이 책은 재미로 가득합니다. 추리소설을 읽어온 독자라면, 재미를 찾아 헤매는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괜히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영화와 웹드라마로 제작된 시리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책의 재미보다는 팡무의 꺼려지는 부분에 더 꽂혀 있네요. 그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해보도록 할께요. 이 책의 팡무는 일본의 긴다이치 코스케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그게 누구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본 추리 소설을 대표하는 명탐정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손에서 창조되어 지금까지 일본 탐정소설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또다른 악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범인이 노리고 있는 인물이 대부분 다 죽고나서야 사건을 해결한다는 악명. 희생자가 다 죽고 나서야 사건을 해결하는 걸로 긴다이치 코스케가 유명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 책의 팡무도? 네, 맞습니다. 이 책에서 팡무는 범인이 자기가 노린 사람들을 대부분 다 죽일 때까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두명 정도만 겨우 구합니다. 아마도 그건 작가의 의도이겠죠. 긴장감과 재미와 스릴을 주기 위한 이야기의 구성.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희생자가 대부분 다 죽고 나서야 해결하는 탐정 근처에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안 좋은 행동입니다. 그는 우리가 죽고 나서야 범인을 잡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팡무가 현실에 있다면 일단 피하고 봅시다.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다행이 팡무는 현실에 없고 이야기의 공간에 갇혀 있네요. 휴, 다행입니다. 이야기에 있으니 이야기를 즐기면 되겠네요. 이게 뭔가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저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영웅이 되지 않는 팡무가 현실에 있다면 그를 꺼려해야 합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가 영웅이 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럼 팡무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네, 그럴 겁니다. 기다리다 보면 영웅이 될 것이고 그러면 다가가면 됩니다. 물론 영웅이 되어 다가간다고 해도 죽을 확률이 줄어드는 것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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