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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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8.백년보다 긴 하루-친기즈 아이뜨마또프

여기서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철길 양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펼쳐진 광대한 불모지- 중앙아시아의 노란 스텝 지대, 사리-오제끼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으로부터 경도가 정해지듯...

그리고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12)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언제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18)

관측창 밖으로 우주의 검은 바다에서 휘황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지구가 보입니다. 지구는 아름답습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푸름과 어린이아의 머리처럼 섬세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서는 지구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우리의 형제자매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감히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69)

우리는 공연히 기도문을 웅얼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평온해지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 말들은,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금괴처럼 갈고 닦인 기도문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 대해 해주어야 할 마지막 말이었다. 그것이 관습이었다.(108)

그 자신의 견해? 그 자신의 특별한 견해? 그런 건 허용될 수 없소. 일단 어떤 생각이 종이에 적히면 그건 벌써 개인을 떠난 거요. 펜으로 쓰인 건 도끼로도 잘라 낼 수 없어. 누구든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건 사치라고.(205)

우주의 무한한 영원 속에서 지구는 마치 한 알의 모래와도 같았다. 온 우주에는 그런 모래알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인간은 오직 행성 지구에서만 존재하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았고 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알았다. 그리고 때로 호기심이 크게 발동할 때면 어딘가 다른 행성에 자기들과 같은 종족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보려고 했다. ... 실로, 태양계 내에는 다른 생명의 흔적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그 의문을 망각해 버렸다. ...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는 자기네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생가했다. 그리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계속 돌았다.(224~225)

만일 사람들이, 각자가 신처럼 여겨지도록 생각을 불러일으킬 방법이 없다면, 이들이 어떻게 자기네들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인간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378)

예술에서의 환상에는 그 한계와 법칙이 있다. 즉, 환상은 독자들이 그것을 거의 사실로 믿을 수 있을 만큼 현실에 끼어들어야 한다.(393)

작가란 자신의 영혼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 자신이 사회의 영혼의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408)

영화로도 제작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읽기가 어려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왜 읽기가 어려운 소설일까요? 그건 시간관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입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 시간관은 과거에서 미래라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미래에서 과거로의 역행적인 흐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온 외계인의 시간관은 인간의 시간관과 다릅니다. 외계인은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는 일직선으로 체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구요? 저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릅니다. 소설가의 설정이니까요. 단지 제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신'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정도입니다. 신? 네, 신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말할 때 신이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 연관된 여러가지 추측을 내놓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이 시간에 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그 인식.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온 외계인의 시간관이 앞에 말한 신의 시간관과 일치합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읽기 힘든 건,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관과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총체적인 시간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소설가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 시간관을 넘어서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간관을 이해하는 건 힘듭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도 페이지를 넘기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것인데, 소설에 담긴 내용은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를 넘어서서 초월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아이러니, 내 삶의 시간과 내가 읽는 책에 담긴 시간 사이의 아이러니. 이 겹겹의 아이러니와 갭이 소설 속에 담긴 시간관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 초월적인 시간관을 인식하려는 노력이 불러 일으키는 가능성 때문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운 소설이 됩니다.

자 저는 무엇 때문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외계인의 시간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냥 하고 싶어서? 아니면 글 쓰다가 할말이 없어서? 아닙니다. 제가 외계인의 시간관 이야기를 하는 건, <백년보다 긴 하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를, 앞에서 말한 '총체적인 시간관'을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담아내려는 하나의 시도로 봅니다. 도대체 내용이 어떻기에? 그 내용을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소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위치한 간이역의 철도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온 예지게이가 겪은 하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예지게이는 평생의 벗이자 직장 동료인 까잔깝이 죽자 그를 중앙 아시아의 신성한 묘지 '아나-베이뜨'에 묻기 위해 떠납니다. 그는 아나-베이뜨로 향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소설은 그의 과거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그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충격받아 생긴 신경증, 신경증으로 전쟁 후에 제대해서 힘겹게 지내다 까잔갑을 우연히 만나서 중앙아시아의 간이역에 정착하며 열심히 살아온 일, 까잔갑에게 선물받은 낙타 까라나르를 키우며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일, 전쟁 때 독일 포로로 잡힌 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을 못하고 떠돌아다니다 이 역에 온 아부딸리브 가족과의 조우, 아부딸리브가 자신의 전쟁 경험을 수기로 쓰다 들켜서 스탈린 시대의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잡혀 죽은 일, 그 가족을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다 아부딸리브의 아내 자리빠를 사랑하게 된 일, 그녀가 그걸 알고 도주한 일, 스탈린이 죽고 자유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아부딸리브의 누명을 벗긴 일까지.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소설은 예지게이의 삶을 통해서 한 시대와 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걸 넘어서서 예지게이와 까잔갑의 핏줄이 속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과거도 이야기합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을 실제 과거에 있었던 일처럼 그리면서. 한 사람의 삶과 한 민족의 과거와의 결합. 하지만 이 소설의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넓디넓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설치된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우주선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우주 이야기는 인류의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미소가 공동으로 행하던 우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우주 정거장에 머물던 우주 비행사 둘은 우연히 고도로 발달된 외계문명과 소통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행성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우주 비행사들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한 외계인의 선진 문명에 감명 받아 그 문명의 기술과 가치관을 지구로 전파하려 합니다. 당연하게도 미국과 소련 당국은 혼란을 겪고, 격론을 거쳐 외계인이 위험하니 문명 전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두 우주비행사를 추방하고, 외계인이 다가올 시에는 미사일을 쏘겠다고 선전포고를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틀 속에 갇히는 셈이죠. 이 모든 일과 서술은 소설 속에서 예지게이가 겪은 하루 속에서 벌어집니다. 한 인간의 삶과 한 민족의 전설로서의 과거, 인류의 미래를 향한 몸부림과 그 결과까지, 모두 담아낸 이 소설을 보며 어떻게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파악하는 총체적인 시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총체적인 시각을 형상화하려는 소설가의 의지가 소설이 발표된 시기와도 일치한다고 봅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81년은 구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흐름이 몰아치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던 시절입니다. 이 소설의 저자도 그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세상에 관한 이상적인 마음을 품었겠죠. 사회주의의 이상이 그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실현되리라 믿었던 낙관적인 전망이 소설에 담긴 느낌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하루의 이야기 속에서 결합시키는 시도를 통해. 10년 뒤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할 줄은 꿈에도 모른채로. 지금 읽어도 그 시절의 낙관이 몸에 전해집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이상을 향한 노력이라고 봅니다. 이상은 이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실현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상을 향해 노력하다 보먼 어떤 성취와 발전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그 성취와 발전의 산물로서 이 작품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가 그 노력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죠. <백년보다 긴 하루>가 전해주는 이상을 향한 노력과 시도의 품안에서 저는 잊혀져가는 이상과 몽상의 꿈을 꿉니다. 비록 그것이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해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행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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