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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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너'라고 쉽게 칭할 수 없는 것은, 그 '너'라는 것이 정말로 그때의 나에게 '너'였던 그 사람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이 비누거품에 담갔다 나온 듯 뿌연 표지의 이 책을 말하는 건지 나도 좀처럼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병률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때 처음 들었다. 그저 좋았다. 열정에 관한, 청춘에 관한, 사랑에 관한, 이별에 관한, 여행에 관한, 삶에 관한, 결국... 사람에 관해서 셀수없는 별만큼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영원히 풀어낼 것만 같은 이 책이 좋았다. 이미 이성적 사고란 어딘가로 귀향보내고 바닥에 있던 감성들이 박박 긁어져 먼지처럼 날리던 그때, 그래서 쉴틈없이 재채기를 쏟아붓던 그때, 나는 그토록 나를 간지럽히던 감성입자들을 어딘가에 쏟아부을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시를 멀리했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과 같았다. 언어가 이렇게 빛날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때 처음 느낀 황홀은 내게 깊게 배어있는 상처를 잠시나마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균이 침투하고, 딱지가 생기거나 혹은 덧나거나 최악이라면 흉터가 남을 수 있는 그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가 한 인간을 안으로 훌쩍 더 자랄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도 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잠시였을 것이다. 초침에 한발씩 밀려 생이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해야할 일이 지난 몽상을 휩쓸어가면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터.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밤의 무게가 느껴지던 그 수많은 밤들 중에 분명 몇날 몇일을 나는 이 책으로 버텼으리라.

 

나는 아프면서도, 이 책이 나를 즐겁게 해줄 때 피식하며 웃었고, 행복한 이들을 봐도 질투내지 않았다. 글이 아파하면, 내 등뒤로 나를 받쳐줄, 나와 똑같은 각도로 서로의 등을 마주대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고마워했다. 한 단어로 곤궁하게 표현되던 것들이 이토록 간절하고 견고한 수식어로 포장되어 각양각색의 사유로 변신하는 것이 놀라웠고, 세계 어디에서든 인간의 감정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음에 놀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좋았던 것은, 그 우연성이 아닌가 싶다. 방심하던 내게 던져주던 질문들, 사유들, 혹은 단상들, 혹은 편린들. 전 우주적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저 하늘꼭대기 위에 걸려있을 것만 같았던 범 우주적 주제들이 중력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왔고, 영혼을 부여받아 그 어디라도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엇다. 그뿐인가, 마치 제각각 흐려지는 기억처럼 페이지 하나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 불친절함은 어떤가, 페이지를 뒤져보며 어디까지 읽었나 세어보던 (얼마되지 않던)나의 습관이 무력화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로 나눠두긴 했지만, 사실 페이지가 없는 마당에 그것으로 굳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래서 이책은, 아주 우연히, 우연한 순간에 우연한 이야기와 만나게 해준다. 그저 무언가, 그의 이야기가 다시금 궁금해질때, 우리는 어느곳을 펴기만 해도 좋았다. 그가 정해준 곳도 없고, 우리가 정한 곳도 없다. 그저 우리는 우연에 기댈뿐이었다. 우연에 기대어 때로는 죽인다는 표현을 쓰고싶은 이야기를 만났고, 어떤때는 별 특별한거 없는 날이네 하고 이야기 하고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이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났을때는 왜인지 예전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대부분 꽤 멋지고, 아주 가끔 평범했던 이 책이 바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누구나 화장실을 가고 방귀를 끼듯, 이 책도 내겐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특별함과 평범함을 모두 간직한 오래된 벗 처럼. 어쩌다, 책을 펼쳤을 때 시시한 이야기라 해서 조금이라도 시큰둥 해지기만 한다면야 페이지 표시하지 않은 이를 향해 구시렁 거리고 싶건만, 그 평범함에서 그의 사람 내음이 더 진하게 풍기기도 하더라. 거기에서조차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발자욱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켠이 쓸쓸하기도 하며 말이다. 때론 일상이 더 큰 존재감으로 밀려오듯 그랬다.

 

다시 한번,너를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수 많은 삶 중, 나의 삶, 그중에서도 폭풍과 같은 시기, 그 중에서도 그 여러 서점에서,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이 내 손에 쥐어지게 됬었음을 알게된다. 어딘가에 갈무리 하지 않고, 어딘가를 펼쳐봐도 그의 일기같은 독백도 좋고, 가을밤 같은 사색도 좋다. 그저 우연의 어딘가에 그 문장들이 있어서 좋다. 나처럼 모호해서 다행이고, 나만큼 짠해서 반가우며, 나보다 순수해서 좋고, 나보다 앞서 그 아픔과 불안을 쓸어담았기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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