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의식이 돌아온 뒤, 나는 내게 한번 더 기회가 생긴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적은 일생에 한번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어쩜, 그때 나를 살린 것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고 싶은 바람, 혹은 당신들과 함께 꾸는지도 모른 채 같이 궜던 꿈들이었을까....."(58p)
왜인지 글을 쓰기가 머뭇거려져서 짐짓 딴청을 피우고 딴짓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수많은 감정을 오르내리고, 숱한 상념들을 여백안에 채워넣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책장이 뒤로 넘어갈 수록 하고싶은 말도, 듣고싶은 말도 너무나 풍만해졌다.
여기저기서 느꼈던 감정과 감동이 겹쳐보였다. <혜화,동>이 내게 주었던 그 애잔함, <1리터의 눈물>이 내게 가르쳐준 생의 열망, <나비효과>의 안타까움,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준 반전된 사색,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수많은 아픈사람들이 이야기가 올망졸망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딴짓을 하다가 금새 까먹어버린 여러 영화와 소설들. 이것은 이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소설이 그것들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단 얘기가 아닌, 그 모든것들이 내게 주었던 아련한 감성들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도 예쁘장한,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파스텔톤의 풍선들이 표지에 채워져있다. 아, 이 책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 이길래 표지또한 이토록 아름다울련지 내심 기대가 일었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한권의 이야기들의 시작과 끝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크게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아름다움'. 그렁그렁 흐려지는 시선속에서도 왜인지 그 단어가 맴돌았다.
한아름, 마치 여성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 이름, 여느 소녀, 그리고 여느 소년 모두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내제되어 있을법한 그이름. 아름이는 미혼의 십대부부에게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이미 조로증이라는 병을 안고있던 아름이는, 훌쩍 자라버린 바깥의 나이만큼이나 성숙해 있었다. 극심한 고통도, 절망과 원망도 그가 가진 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둬가진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하루하루, 다가오지 않은 내일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기대를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득담아 오늘을 살아간다.
이미 신체의 나이로는 부모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아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티없이 아름답고, 따뜻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선입견을 통해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름이의 눈에서는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차있다. 아마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두근거리게끔 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자신을 탄생시킨 부모에 대한 어떤 원망도 미움도 없이, 사랑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는 아름이의 떨리는 심장고동소리는, 내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을 읽을 그 누구의 심장또한 두근거리게 할 것임이 분명할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로 말이다.
"당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였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식으로, 나중에야 도착하듯 말이다. 시인들과의 테니스, 극작가들과의 바둑, 과학자들과의 배구도 마찬가지 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52p)
아름이는 자신을 탄생시키고, 둘러싼 그 모든 세계를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시선으로 이해하고 바라봤다. 혹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어른들보다 그 이해의 한쪽 귀퉁이에라도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몸이 받는 고통과 마음이 받는 절망이 그가 세상의 온갖 것들을, 모든 감각과 모든 관심을 동원해 조금 더 이해에 가까워지라고 채찍질 했으리라 느껴진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그만큼 살아갈 수 있게,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준 부모들을 사랑할 뿐이다. 그런 마음의 아름이가, 부모들의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내고자 함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게 자신앞에 놓여진 짧은 삶, 늙어버린 육신, 그로인해 남들처럼 갖지못한 수많은 기쁨, 그리고 그보다 더 갖고 싶었던 무념과 방탕들을 간직한 채로.
아름이를 통해, 십대부모 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들을 다시금 돌아본다. 그들이 책임지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것보다 귀한 것이었음을. 부모가 됨으로써 (혹 부족할지라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한 생명이 한 생명을 절망으로 빠뜨릴 수 있는만큼, 반대로 얼마만큼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지 느꼈다.
자신을 속인 허상 앞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했던 아름이의 따스함이 대견하고 안타깝다. 비록 거기에 있는 그것들이 '진짜'는 아니었음에도 그것이 아름이의 인생을 잠시나마 더 빛내 주었다면, 어쩌면 그것으로도 괜찮았던 것일까. 아름에게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품은, 이성을 향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숭고한 사랑이었을 테니깐. 자신을 낳은 부모들의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던 그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예전에 난, 십대부부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습을 보며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철없다, 자기가 벌려놓은 일이다. 그리고 한창 마음껏 이것저것 하고싶은 나이임에도 측은하다. 하지만 제가 뿌린 씨앗이지'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시간속에서 변화했다. 자신이 하고싶은 다른 많은 것들, 이루고 싶은 많은 것들 미뤄두고, 한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고 대견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만로도, 자신의 생을 위해, 자신이 만든 생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존경에 가깝게 지켜보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그저 좀 더 자란 아이들이 한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응당 가졌을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바라보던 비웃음, 비난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생명에 대한 책임이 보여주는 용기를 바라볼 수 있게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서로를 당기는 마음이, 몸이 규정짓는 경계를 넘으려 할 때,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취할 수 밖에 없는 남녀간의 성적관계가, 세상이 으레 바라보듯 비난의 범주에 머물러 있음은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거예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143)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그런 소식에서, 멸시와 힐난의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생을, (비록 한 생을 감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짓 예상도 못했음에도) 탄생시킬 것이고, 키울 것임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며 경외심이 일었다. 그들이 탄생시키는 생명은, 한낱 혈기왕성하게 뿜어내는 성에 대한 탐미의 부산물이 아닌, 두 사람이 서로를 끊임없이 끌어당긴 이후의, 사랑의 결정체 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오로지) 육체에 대한 탐미로 인한 '결정적 실수'에 대해 면죄부를 늘어놓고자 함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행위를 '실수'로 명명짓더라도 생명 그 자체를 '실수'로 명명 지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그리고 홀로 한 생명을 짊어진 모든 이들이 갖는 비애, 혹은 포기해버린 이들을 이미 세상이 규정한 잣대로 판단하는것이 과연 옳기만 한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물론 그들 모두를 이해한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십대든 이십대든 어느 나이든, 처음부터 부모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이 그것들을 채 생각도 해보지 못했음에도, 그것들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않고 무던히 애쓰는 '우리 주변, 옆의' 부모들을 너무나 간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련지...
학창시절의 언젠가 내게, 한 친구가 곤란한 표정으로 툭 던진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아빠도 그걸 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남들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행위' 라는 관점이 우리를 있게하고, 보살핀 부모들을 향했을 때 나또한 난감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래 그랬을테지' 하며 속으로 생각했고, 나는 아마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이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깐 말이다. 그 왠지 모를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내가 아름이처럼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겨우 전형적인, 호기심 왕성한 남학생이었으니깐. 내가 생각하는 그 행위는, 포르노에서 나오는 그런 말초적인 행위의 의미 외에는 없었으니깐. 그런데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한 생명이 갖는 가치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 모든 아기가 아름답고, 소중하듯, 우리 또한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친 한 인간이다. 우리가 자랐다고 해서 우리의 가치가 하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있게한 부모들의 사랑은 당연히 아름답고 고귀하게 여겨져야 되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단순한 진리를 찾기가 이토록 힘들었을까? 이제와서라도 아름이에게 한수 배우려고 그랬던 것일까?
세상의 강에 흩뿌려진 모든 슬픔, 두손 가지런히 모아 아름다움으로 길어올린 <두근두근 내 인생>
산재한 어떠한 절망, 고통, 아픔... 그리고 슬픔, 도저히 아름다움 이란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을 것 처럼 어둠속에 방치된 그것들을 이토록 눈부신 파스텔의 컬러로 그려낸 작가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껴진다. 자신을, 그리고 그 부모들을 몰아붙였던 슬픔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준 아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우주를 유영하는 모든 존재는, 아니 어쩌면, 우주 그 자체도 누군가의 두근거림으로 탄생된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새삼 나를 있게한 나의 사랑하는 부모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두근거림을 그려본다.
하고싶은 말들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엉킨 실타래 처럼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풀어놓는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텐데. 아직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모자란 능력이 안타깝다. 이렇게 하고싶은 말들이 입에 고이게하는, 내가 그 복받친 감정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지는 책을 읽은게 얼마만인가. 그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기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나를 몰아세운다... 어른, 그리고 철듬... 내가 의문시했던 것들이 다시금 새로운 시선,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아름이는 분명, 그 부모인 대수 와 미라 에게 더 깊어질 수 없는 슬픔과, 더 높아질 수 없는 기쁨을 '한아름' 선사했던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생명이, 그 생명을 있게한 근원적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아, 그렇지. 그래. 나는 이제라도,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아름'이 스럽게. "'아름' 답게".
언젠가 더러, 이 글을 조금씩 덧붙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바라본 것들이 너무나 많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으니깐.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 너무나 벅차서 누군가에게, 아니 무엇보다 나에게 다시한번 꼭 이야기해주고 싶으니깐. 잊지 않게끔. 이 책을 꼭 안아주고 싶었던, 꼭 안아주었던 그날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