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아마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던 책, 중에 이 책 또한 포함되었으리라 싶다. 평소 책좀 읽는분들을 보면, 대략 다 학창시절에 접했던 듯 싶은데, 난 도통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학창시절에 그토록 책하고 친하지 않았던 나날들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들은 이전에 다 접했고, 이제 또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읽는 책을 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었다. 하지만 아마, 내가 중고등학교때 이 책을 읽었던듯 무슨 감흥을 받았을까 싶다. 학창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친구에게 선물 받아서 겨우겨우 '읽어내고서' 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걸 읽고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대학다닐 땐?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좋은 고전들 다 미뤄두고 뭐 읽었나 싶다. 물론 독서량이 바닥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에서야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건 고작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었었던게 전부겠다. 어쨌든, 이런 책들을 접할때마다, 진작에 책좀 읽고 정서를 함양할껄 싶지만, 이제와서 후회해서 뭣하리. 더 안늦게 만나기를 다행으로 여길뿐이다. 그리고 지금이 딱,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말이다.

 

테스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특별난 것은 아니었다. 요즘같은 시대엔 워낙 고전 이야기들이 여러 형태로 각색되고 짜집기 되다보니 그리 느껴지는 듯 싶다.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여러 담론거리들과 동일한 질량의 정서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었고,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느 농촌마을의 더버벌가(家)의 맏딸 테스에 관한 이야기다. 과음해서 못일어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을 나간다는 것이, 사고로 수레를 끄는 말을 잃게 되고, 그렇잖아도 그 아버지가 마을의 한 성직자에게 자신 가문의 뿌리를 들은터라, 밥벌이의 핵심수단인 말을 잃게됨으로써 겪는 여러 재정적인 문제들을, 부유한 더버빌가문을 테스가 방문함으로써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의 시초였고, 아직 바깥의 여러 위험들에 대해 교육받지못하고, 배우지못한 테스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종교적 관점의 순수를 뺏겨버린다. 하지만 후에 진정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만, 그때의 사고가 계속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위대한 많은 고전들이 그렇듯, 한세기가 넘게 지났음에도 이 책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들은 여전하다. 물론 그때와 동일한 만큼은 아닐지언정, 여전히 의식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들 말이다. 대표적으로 그것은 종교와 계급, 순결에 집착들 일 것이다.

 

더버빌가는 몰락한 가문의 향수를 안고있다. 그는 그것을 복원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덕을 입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헛된, 아니 심각한 오판이었다. 자신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 마을의 성직자에게 들은 후, 그 테스의 아버지가 보이는 미묘한 태도의 변화는,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은 허황된 계급의식에 겉멋든 인물을 상징시켜 보여준다. 정작 본질은 빼놓은, 이름과 허례의식에만 집착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고, 또 그것으로 덕을 입으려 하는 모습 말이다. 또한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어떤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교리에 따라서 서로를 경계한다. 사실 서양 종교의 역사에선 기독교가 갖는 위치는 매우 견고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이의 기준에 부합된것은 아니었으며, 그만큼 열린 사고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비극을 가져온 가장 큰 사회적 편견은, 남성이 여성에게 기대하는 순결에 관한 것이다. 테스의 경우 자의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강제적으로 순결을 빼앗긴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후에만난, 사랑하는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위로는 커녕 살을 베는 듯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실은, 맏딸로 인해 덕을 보겠다는 부모들의 어긋난 기대, 그리고 험악한 현실에 대해 미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그 테스의 사랑인 클레어가 진작 그 마을을 들렀을때 그녀에게 춤을 제의하지 않은 것 등.. 여러 많은 요소들이 그 결과를 만들어 냈음에도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순결은 점차 감소하는듯 보여진다.(하지만 그것이 그렇게나 시대를 탈까? 현대의 발빠른 매체로 인해 더 눈에 띄는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은 날로 저연령에게 개방되고 노출되고 있다.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그것을 벗어날 루트가 다양해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런 의식마저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순결을 희망하는 입장에서의 남성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크건작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시대에 따른 의식변화에 따라서, 그만큼 강요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한 인물의 내면과 진정성을 바라보지 않고 육체로 드러나는 흔적에 집착하는 사고는 여성만을 비극으로 몰아넣는것은 아니란 점이다. 감히 남이 흉내내지 못할만큼의 사랑과 진심을 바치는 상대방을, 과거의 이력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 상대방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비극이란 것이다.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잃는다면 그것이 비극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의 질량이 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판단하는 이와 판단받는 이의 처지가 같을수는 없으니깐.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가 되건간에, 과거에 존재했던 상흔의 의미가 현재를 뒤덮어 어떤 관계를 전복시킨다면, 그것이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란 점은 자명하다.

 

한 가족구성원으로 시작해서, 한 남성으로 인해 몰락할 뻔 했던 한 여인의 삶이, 또 다른 남성으로 인해 구원될 것 같았던 이 처량한 아름다움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관념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담론거리들을 얘기하고, (나만 몰랐던) 걸출한 명성에 어울릴만한 아름다운 문장들을 보여준다. 그 수려한 문장들로 인해 마치 테스의 비극적인 삶이 빛을 담아내서 반짝이는 듯 말이다. 인물의 간헐적인 희망과 지속적인 비극을 표현하는 수많은 문장들은, 때론 모든 희망을 걸만큼 아름다웠지만, 때론 모든 절망을 담아낸 것 만큼 무거웠다. 마치 작가가, 문장들을 빗어내느라, 테스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 정도로 말이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그 어떤것이든 미리 이야기의 전말을 아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부류의 사람이 더 많겠지만, 보면 이야기의 전말을 알아도 개의치 않는 대인배들이 있는데, 나로써는 이야기의 전말을 알면 그 감흥이 꽤 떨어지는 편이란 얘기다. 주변의 쏟아지는 극찬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더버빌가의 테스>가 더 좋았을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이책을 읽기까지 앞으로 몇년이더 걸렸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토머스하디는 충분히 독자가 테스의 비극에 집중할 수 있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끔 빼어난 문장들을 보여줬다. 책을 읽는동안 황홀감에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를 읽는듯한 순간들을 빠져나왔다. 좋은 책들은, 그 치밀한 계산과 완숙한 감정, 빼어난 문장들 덕분에 한번에 읽기가 쉽지가 않다. 앞의 정보가 지워지고 덧씌워지는것이 싫을정도로 좋은 순간순간을 느끼게끔 해주니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길 요구할 정도의 흡입력을 보여준다. 이 <더버빌가의 테스>도 몇안되는 그런작품들 중에 하나였다. 누군가가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었을 당시의 회고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여졌다. 좋은 책을 만나느냐 아니냐 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그 책을 언제만나느냐 하는 것 이다. 사람이나 책이나 매한가지 인듯 싶다. 지금에서야 처음 읽는 이 <더버빌가의 테스>를 통해서, 난 채 다 자라지 못한 감성이 겪을만한 풋풋한 열병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재는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을것이다. (소싯적에 이 이야기를 읽었다고한들 내가 온전히 이해했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 얼마나 부족하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테스'의 비극을 충분하게 느꼈고, 무엇이 여전히 얼마나 잘못 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모두에게 어떤 커다란 비극을 만들 수 있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가로지르는 지혜를 읽었다. 작품전반에 깔린 문장들은 더이상 언급하기도 입아플정도로 빼어남은 말할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만족하려고 한다. 지금, 현재에 <더버빌가의 테스>를 읽은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 읽었으면 된것이다. 어쩌면 지금이기 때문에 이만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 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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