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소리 마마 밀리언셀러 클럽 4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등장인물 모두가 어딘가 묘하게 보통사람들처럼은 보이지 않는 생활을 하고있다. 보육원에서 길러준 이와 길러진 이의 모자관계같은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주변머리없는 나는 이들이 주인공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길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다. 그 살인자는 어떤 목적으로... 그것이 어떤 목적이었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큰 틀이다. 추리를 해가면서 읽는것보단, 주인공의 심리와 그녀 주변을 이루는 인간들의 허영과 이기를 좇는게 묘미지만, 어쨌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면과 외면의 진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하나하나 드러나기때문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고, 덮어야 할지 머뭇거려진다. 역시 '추리해가면서 읽게되는 책'의 서평을 쓰는 일은 더 어려운듯 싶다.

 
살인자. 그녀의 정신은 뒤틀려있다. 자신의 엄마를 알지 못한다. 엄마의 유품이라고 누군가 알려준 낡은 구두 한켤레만이 그녀의 정신적 엄마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의 연줄을 이용하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면 아주 깨끗한 노트로 살 수 있으니까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의 인간관계를 이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번거로운 일이 생기거나 귀찮아지면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 그래, 그런 거야 하고 아이코는 간단하게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아이코가 살면서 깨달은 지혜였다."
(p142-143)


마츠시마 아이코, 그녀는 태어나서 여덟살까지 창녀촌에서 길러졌다. 누구도 그녀를 따뜻하게 길러주지 않았다. 후에 그녀는 보육원에서 자라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평범한 소녀같은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험하게 길러졌었다. 자신과 이어진 것은 오직, 엄마의 유품이라 들었던 낡은구두 한켤레. 때때로 그녀는 구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가시덤불 숲에서 길러진 그녀는 살육과 성, 그 어느것에도 어떤 분별력을 갖지 못한다. 자신이 필요한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존재들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혹은 자신의 정신적 쾌감을 덧붙여 수단을 선택하기도 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어느시점에서, 그녀가 더이상 그럴 수 없을만큼의 위기가 다가온다..

 
그녀에게 결핍된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 응당 받아야할 권리가 있는 따뜻한 사랑, 관심... 그것을 온전히 남들만큼 받지못한 한 인간이 닿을수 있는 극한지점을 '마츠시마 아이코'를 통해서 보여준다. 사랑받지 못한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싶은 한 인물. 그 과거의 상처와, 그로인해 지울 수 없었던 뒤틀린 정신세계를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영혼이 살아가는 잔혹하고 슬픈 이야기. 맑은 방법으로 과거를 끌어안지 못한 채, 어두운 방법을 통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었을 그녀의 슬픈 이야기.


자신이 의도하지않게 세워져버린 과거. 그것이 아무리 억울하고 분에 넘친다 한들..
한번 세워진 시간은, 한번 올라가버린 시간이라는 계단은 다시는 내려올 수 없다..
그것은 다음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전 층계가 사라져버리는 계단이기에.

 
"인간이라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토대로 지금의 정신 작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거에 얽매여서는 발전이 없죠." (p231)


우리는 그저 앞에 남아있는 허들을 넘을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걸려넘어졌던 허들까지 다시 세워놓을 순 없으니깐...그 누구도... 어쨌든 누군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아이코와 같은 미련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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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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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시간에 걸쳐 길들여진 인간은 길이 열려도 머뭇거린다. 동물은 오래도록 자신을 돌봐준 인간을 제 아비처럼 따른다. 특히나 집단에서는, 자신의 곁에있던 동종(同種)이 그 아비라는 것에게 통해 어떤 참극을 당하더라도 그 화가 자신의 피부에 닿지 않는다면, 그 참극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안락함이 보장되어있다고 '착각' 한다면 그것은 더 심할것이고, 설령 참극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항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지금에 머무르는 것보다 위험을 수반한다고 판단한다면 대부분은 그 현재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택한다. 인류는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 해를 박멸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두려움때문에 역사상 지금껏 많은 독재와 불합리한 통치를 허용해왔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의 진심을 발견하기위해 어디까지 까봐야할지 모르고, 설령 모든것을 발랑 까버린다 해도 그 속을 확단할 수 없는 불투명한 인간의 특성이 만들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독재'가 결국 개인의 어느 바닥에서 발현되는지부터, 인류의 어디까지 침몰시킬 수 있는지 <염소의 축제>는 매우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소설기법으로 펼쳐낸다.   

 

세개이면서 하나인 이야기의 시작 - 세 출발점에서 한 트랙으로 향하기

상처를 봉인한 붕대를 풀어내기위한 단 하루 - 소설의 시작은 우라니아가 모국 도미니카로 잠시 돌아오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일인것임을 독자는 어느정도 지각 할 수 있지만, 대체 무슨영문으로 수십년에 걸친 가족의 연락들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는지는 이제 막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14세에 고국을 떠났던 한 소녀가 평생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상처는 대체 무엇인것인가. 죽어가다 시피하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그에게, 잔인한 과거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일을 우라니아는 왜 할 수 밖에 없는지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우라니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우라니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부지런한 바보가 가장 두려운 존재 - 바보란, 바보천치가 아니다. 악을 악인지 모르고(혹은 간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트루히요이다. 우라니아가 떠난 도미니카. 우라니아의 현재에서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 독재자 트루히요는 잠에서 깨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의 움직임은 딱 필요한만큼 움직이고, 절제되어있다. 부하를 판단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으며, 대중앞의 독재자들이 그렇듯 외향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견고해 보이는 독재체제가 서서히 무너질 조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육신또한 그가 사랑해마다않는 근본부터 무너져 내려가고 있으며, 그는 그 두가지 모두를 애써 부정하려고 한다.

목줄을 끊어버린 신념이 발산하는 거사 - 트루히요를 중심으로 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 그날 밤. 독재자를 처단하고 기꺼이 자신들은 죽음을 무릎쓸 준비가 돼있는 세명의 도미니카인과 한명의 터키인은 시보레 비스케인 안에서 자신들의 무장을 재정비하며, 과거를 상기하며, 그 백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풀어내는 과거는, 독재자가 회상하는 과거와 극명하게 대립되는 어둠속에 뭍혀야만 했던 일들을 드러낸다.

몇 읽어본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은 읽기가 쉽지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한심하겠지만,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것은.. 1권의 초중반까지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인물들의 행적을 그리느라, 머리가 과도하게 분주했기 때문이다.(어찌보면 이후에도 더러 헷갈려했을지 모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독자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얼마나 사시나무 떨듯 떨 수 밖에 없는지는 조금 이해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코 <염소의 축제>가 <백년동안의 고독>만큼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름의 복잡성으로 따지자면 새발의 피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동일인물에 대하여 애칭을 부르거나, 줄여부르거나, 조롱섞인 별명을 뒤섞어 부를때가 종종 있기때문에 (이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닌 독자라면 한번쯤, 독재자 트루히요 를 중심으로 그 계보도를 그려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누군가는 이것을 다소 귀찮아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그렇게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아니, 그렇게라도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당신이 이땅에서 독재를 경험했건, 교과서로 배웠건. 그 과거들은 아직도 현재에 걸처져 있으니깐.   

-대략적 주요 인물들 구성도. 대충 그려봤던것을 정리해 봤는데, 책을 한번 완독했다면 쓸모없을 듯 하다-

이름을 따라가느라 책장을 앞으로 다시 넘겨야 했던 초중반부의 시간을 벗어나더니 서서히 책장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회상을 통해 군데군데서 드러났던 독재의 어두운 배경은, 그들이 트루히요의 차량을 발견하면서부터 모든것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그 개조된 시보레 비스케인을 따라서 책페이지도 빠르게 달리게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모든것을 따라가는 것은 큰 기쁨이었고 희열이었다. 그 지난한 독재의 끝을 향해 달리는 시보레 비스케인 속에 나또한 탑승해 있던 것이다. 가자, 가자, 축제를 열기 위해! 

 

'독재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갖는 입체성 - 퍼즐로 구성된 트루히요 독재의 역사

해설에서도 자세히 설명돼듯이, 후반부에 가서는 그 순서가 조금 바뀌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염소의 축제>는 세개의 시간축에서 각각 다른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우라니아가 이끄는 장은 독재가 한참전에 끝난 시점에서, 트루히요가 이끄는 장은 그의 견고한 독재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살아남은 자로 내세우자면) 안토니오 임베르트가 그 영광의 거사를 열게되는 그날부터의 시점. 그 거리는 존재하되 모든 시간축은 각각의 회상을 필연적으로 등장시키며, 세개의 시간축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가는 길의 부족한 설명들을 채워준다.    

문득문득, 상대적으로 묘사의 비중이 적은 인물들도 적잖이 등장하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우라니아와 그의 아버지, 트루히요와 그의 첩보부대장을 비롯한 중심인물들, 안토니오 임베르트를 비롯해서 같은 자동차안에서 매복해있던 세명의 인물들에 집중한다. 물론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구조는 아마도,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하는 자들'의 특성을 낱낱히 묘사하려는 그의 시도였을 것이고, 크고 다양한 사건들에 집착하는 것 보다는 중심인물들의 심리를 바닥부터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수십년이 지난 도미니카 염소의 축제를 드러내는 가장 적절하고 흥미로운 방법이라 판단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인물의 행동과 심리묘사가 긴것에 대하여 부담을 갖는 독자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것이, 각 인물들이 묘사하는 현재는 적절한 시기에 과거의 사건들을 차용해서 연결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이야기의 주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적인 특성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점은, 이런 인물들이 이야기를 진행해나갈때, 마치 거울에 비친 또 하나의 실체없는 존재가 말을 걸듯, 내면의 존재하는 이중적인 자아의 모습을 인칭을 바꿔가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점이다. 이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바라보며 그 이중성을 해석해주는 것보다 인물안에서의 더 큰 충돌을 부각시키며, 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강조했다. 한 인물을 줄여부르거나, 우스꽝스러운 별명만으로 부름으로써 그 인물의 특성과 다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들은, 독재자를 증오하면서도 찬양하는, 시민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상징이라도 하듯.   

 

하루를 통해 드러나는 축제의 모든 것 - 수십대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축제의 준비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은 한 여성의 삶을 단 하루로 표현하는 것이 그 기원이었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델러웨이 부인>을 기가막히게 사용했다. 결국 추구하는 방향과, 어긋남은 분명 존재하지만, <염소의 축제>와 앞서 언급한 소설들은 비슷한 점을 갖기도 한다. '오래도록 세월의 먼지에 뒤덮힌 인간을 표현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의 묘사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이들은 결국, 인간의 모습은 겹겹히 쌓여지고 흩날리는 시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 '하루'를 통해, 낯설면서도 파급력있게 보여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 수많은 과거의 회상은, 지금까지의 인물을 파악하고, 하루를 통해서는 누수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채워주며, '바르가스 요사'는 각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루에 초점을 두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간결한 글에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 압축을 사용자가 손실없이 풀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역사적 지식이 덧붙여지면 좋을 것이다.) 독자는 그 압축된 독재의 세월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풀어가며 분노하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35년만에 고향땅을 밟는 우라니아의 시간도, 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트루히요의 시간도, 영원같은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축제의 주최자들도, 모두 하루라는 시간에 압축되어 표현된다. 물론 그들 각자의 현재의 시간속에서 수많은 과거가 드러나고 상기되며, 그 과거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의 회상은 그들의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는것과 동시에 그들각자가 나아갈 길의 지도를 독자가 그려볼 수 있게해준다.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그들이 갖는, 표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단 하루이다. 이것들, 즉 과거와 어우러진 현재의 하루는 그들 한명 한명을 밀도있게 그려내는데 아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인간은 천리안을 갖지 못했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면 뒤를 보지 못한다. 세개의 시간축과 그로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앵글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들이 갖는 현재성의 하루는 결국 축제를 향하기 위해 내달리는 고속도로이고, (회상으로써든, 이어지는 시간이든) 교차점이 되어야만 했다. 다양한 인물에서 바라보는 축제는 곧, 독자에게 다층적인 이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충분한 형식을 갖추게 되고, 보다 균형잡힌 시각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개인을 벗어난 완벽함에 대한 열망이 만드는 비극 - 완벽한 독재자의 이중성과 한계 

트루히요는 자신의 해병대 시절, 교관에게서 '분명 성공할 것' 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교관의 말대로 그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공아닌 성공을 거머쥐었다. 자신이 갖고있는 완벽히 숙달된 철저함과 예리함, 냉정함은 그의 그런 한계적인 성공을 완성하는데 지대한 밑받침이 되었다. 한장, 한장 이어지는 그의 기계와 같은 하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극명히 보여주는데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갖는 특성은, 그 자신에게 병적으로 완벽함과 철저함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부터 그 휘하의 부하들까지 모두 군인다운 체격과 복장을 갖추길 원한다. 그리고 길가의 오물에 대하여 히스테리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이것은 곧, 누군가를 통제하려하는 자들이 외모에서부터 압박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선망하는 개인의 모습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꼴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속에 감쳐둔(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오물섞인 뜨거운 피를 뒤집어보이는데 필요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각잡힌 군복안에 감쳐둔 그의 본능은 어떠한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 경제적 재건과 일자리를 보장하고, 아이티의 약탈을 막는 것을 구실로 그는 그에 대항하거나 그런 낌새라도 있는 인물들을 잡아 처형하고, 무수한 죄없는 여성들을 범한다. 이는 바로, 그 스스로 그가 시민들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더러운 욕망을 가진 의붓아버지임을 제 스스로 상징하는 꼴이다. 태앙이 비추는 곳에서의 그는 그의 추종세력들과 눈가려진채 목줄에 걸린 시민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는 명민한 모습이지만, 그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짙게깔리면 그의 억눌렀던 본성은 어딘가로 무분별하게 배출할 곳을 찾는다. 하수도에서 넘쳐나온 오물에 그가 그렇게도 신경이 곤두섰던 것은, 안으로 흘러야만 하는 더러움이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하수도의 모습이 제 모습과 하등 다를게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제외하곤 모든 게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권 20p)

세월은 그의 견고한 '독재'라는 강철벽의 틈에서 이끼가 자라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의 육신의 내부(전립선에서 비롯되는)에서 바래지는 그의 쇄락을 막지 못한다.  또 그가 아무리 샤워를 하고 군복을 갈아입는다해도, 그는 결국 군데군데 망가진 옷걸이에 비할 바 없는 것이다. 그 어떤것에도 영원이란 없을진데, 그는 타자를 영원히 구속시키고 자신의 발 아래 두기를 원하며, 제 육신또한 영원히 제 본능적인 욕구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삶을 따스하게 하고, 인류를 번영시키는 시간들 또한 바람같이 지나갈 수 밖에 없을지인데 하물며 도리에 어긋나는 상징의 육신또한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차라리 그가 악마와의 계약을 했다고 믿고있었던것은 아닐지 의심될 정도이다.  

"한 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2권 47p,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 인용)

그 자신을 감싸는 육신의 쇄락이, 그 육신이 통제하는 많은것들의 이탈과 맞닿아 있는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 도미니카라는 국가에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자신의 고장난 육신을 부정하기 위해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그런 독재를 고속으로 순식간에 끝내버렸으니 말이다.   

염소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속성, 즉 자유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1권 251p)   

 

 

비뚤어진 '아버지 상' 으로 바라본 트루히요 - '새로운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최고 지도자'

아직 부모로서의 입장은 되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종종 비뚤어진 (안타까운) 부모의 상을 쉽지않게 발견한다.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세상에 내놓은 한 인간에 대한 보호와 걱정이고,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이루지못한 삶에 대한 대리만족인가. 그래서 어디까지 그들의 인생을 보완하고, 어디까지 그들의 통제에 따르기를 바라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의 부모들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내면의 목적을 띄고,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모든 부모를 존경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이를 먹은 어른들을 모두 존경할 수 없는것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라니아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양심의 가책, 트루히요의 자식 람피스에게서 지키려던 옛 모습을 잊고(상황이 바뀌었으니) 결국, 그것이 딸과 가족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라 스스로를 애써 포장하며 우라니아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친다. 이것은 한 부모가 개인으로써 갖는 '소유된 자식' 이라는 인식을 통한 비극의 극치이다. 그것은 결국 한 인간의 성장을 영원히 멈추게 했으며, 영원한 상처를 짊어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트루히요가 생각한 '국가의 아버지 상'은 한 개인에 국한되었어야만 했던 '아버지 상'의 비뚤어짐의 최극단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파멸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에 대항하는 많은 무고한 이들과, 한 나라 국민들의 절망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인류는 집단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지도자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지도자에게 자신들을 통제할 권한을 쥐어준다. 언제부턴가, (아마도 그 처음부터) 힘을 가진 자들은, 그가 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을, 한 집단을 소유하고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모든 독재정권 아래에 있는 비극은,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소수의 '능력자'들을 그들의 대표자로 방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독재정권이 만들어지는 '폭력성'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그런 착각을 범하고, 실행한다. 트루히요는 그 많은 이들중에 하나일 뿐이다.  

트루히요의 가장 큰 오류와 잘못은, 자신이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임을 자신한 것이다. 그것은 곧 비뚤어진 아버지 상이고, 모든것을 소유하려 든다. 그 철저하고 날카로운 하루를 만들 수 있는 독재자또한 덜어내지 못하는 성적욕망까지도 말이다. 트루히요 휘하의 많은 인물들은 트루히요를 마치 아버지처럼 받든다. 가부장적인 체제에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그들은 자신의 모든것이 담긴것들을 내어주고, 감히 거기에 대항하지 못한다. 언젠가 그 벅찬 통제가 극에 다랐을 때, 누군가는 거기에 반기를 들지만, 누군가는 그 반기를 조용히 내린다. 아구스틴 카브랄은 그런 불쌍한 영혼의 한 일면이고, 그의 딸은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최대의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로만 장군은 불쌍하고 가련한 그 영혼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잠식당한 인물이며, 가장 큰 해를 만든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보이는 것들이 있었겠지만, 읽고 듣고 조사하고 생각한 후에 너는 정부의 선전과 정보 부족으로 짓밟혔고, 교리와 고립으로 짐승처럼 되었으며, 공포와 비굴과 아부가 습관이 되어 자유의지나 심지어 호기심마저 상실한 나머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했다는 걸 알게되었지.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1권 99p)   

 

 

 

타인의 통제에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사태 

이 부분은 이 소설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군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대중들이 독재를 바꿀 수 없고, 불합리한 시대를 쉽게 뒤엎을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무기가 주어지지 않아서뿐만이 아니라, 그 감히 개인이 맞설 수 없는 독재에 길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시민들은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트루히요라는 강압적인 사공이 이끄는 방향으로 무조건 노를 저어야 했다.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안정이 보장되는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은 큰 불평없이 노를 젓는다. 옆집의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죄목으로 끌려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면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히 직접적인 손해가 자신에게 오지않고(설령 오는자는 이미 그 어떤 조치를 취할수 없을테니 무의미하겠다),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침묵하기만 한다면 어느정도의 안전은 보장된다. 그 안전만 보장된다면 독재든 아니든 세상은 살만하게 보이고, 한 권력자의 독재는 당연히 체제와 정책을 안정시켜준다. 그리고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언론은 곧, 그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굴절된 안경을 이식해주기에 이른다.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로만 장군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오랜시간에 걸쳐 세포하나하나까지 트루히요의 지배하에 들어가있던 로만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길들여진 개가 목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있는 모습과 똑 닮아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회가 지나갈 때 까지도 그를 지배했던 한 인물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아래서 터지는 폭발물을 맞듯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곧 그것은 트루히요를 처단함에 있어 직/간접적 관련된 인물들과 또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을 헤어나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고, 도미니카라는 국가 전체의 민주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목할점은, 결국 트루히요의 죽음을 예찬할 시민들조차 바로 뛰쳐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필연적인 이유들 가진다. 먼저 트루히요가 없음에도 군부세력을 그의 아들 람피스가 거머쥐고 있는 점, 또한 트루히요의 갑작스런 죽음에 어안이벙벙해져서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전자는 물론 수긍이 가거니와, 후자는 실제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에서도 엿볼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책에서 언급하기를, 일본이 2차대전서 항복을 하고 한국을 떠남에도, 국민들은, 그 예고없던 독립과, 아직 확실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불확실성 때문에 익히 알고있듯이, 독립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지만, 비극은 다른곳에 있다. 아마 시민들은 로만 장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목에 채워져있던 목줄에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 자신이 내다을 수 있는 최대의 거리, 최대의 행동, 딱 거기까지, 시민들은 몸에 깊숙이 베어있었을 것이란 점. 결과적으론, 트루히요가 어차피 암살된 후에 이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은 특별히 당장 큰 문제를 야기하거나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골수 트루히요 추종자들을 제외한) 시민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들은 결국 영웅들과 그 관계자들을 더 빨리, 혹은 영원히 지켜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이유들을 구성하진 않았을까?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독재정권체제'가 주는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이 그린 테두리 안에 자신들의 힘을 한정하며,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방송을 받아들이며 결국, 독재에 저항하기를 머뭇거리고, 포기했을 모습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들의 비극을 방관한 셈이며, 도미니카의 독재체제를 연장시켰다고 말하면 무리가 있을까? 굳이 독재가 아니더라도, 이런식으로 정치에 넌덜머리를 내며 지레 저항을 포기하는 일은 부패한 수많은(이제는 그 경중으로 판단하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한다. 현시대에서 국가는 분명 존재하며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그런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모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기에 누군가를 대표로 뽑을 수 밖에 없는 그 자리를, '목소리의 대표'가 아니라 그것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지당한 사실이 되어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세태에서, 시민들은 결코 불의에 길들여저서는 안된다. 저항하지 않는 것과 길들여지는것은 아주 중대한 차이를 지닌다. 매번 뒤통수를 맞는 투표자들은, 지난한 싸움에서 결코 길들여져서는 안된다.    

그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비록 총통이 몸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이 계속해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2권 226p) 

 

어디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앞서 말한것과 거의 흡사하면서 약간 다른 이 질문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동침을 하기도했지만, 가톨릭교는 결국 트루히요의 발목을 잡는다. 시보레 비스케인에 타고있던 네명의 인물중 하나인 살바도르는 가톨릭의 충실한 신자이다. 살육을 저지르는 자를 살해해도 되는지 그는 종교로써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결국은 해답을 찾아, 신념을 갖고 종교를 등에 업은채로 전진하는데, 트루히요는 소위 나신교가 갖는 부정적인 결과의 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것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종교가 됐든 잘못된 극단의 길로 간다면 어떤것이든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트루히요라는 신의 모습을 띈 잘못된 인간을 떠받들던 이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그들중 누군가는 트루히요가 제거된 후에도 호위호식하며 살지언정) 진정 대의를 위한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지만 대의라고 포장한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동일(죽음)할지라도, 그 가치가 정반대를 향하는 것이다.  

결국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길들여져야 하는것은,(나 자신이든 종교든, 전혀 길들여지지 않든) 개인이 판단할 몫이지만, 그것은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함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깊이 새겨진 상처는 흉터가 된다. - 파괴된 모든 시민의 처녀성 

트루히요 휘하에 있던 나약한 인물들은, 보편적인 체격/체력조건으로 보았을때 남성보다 열세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다를 바 없다. 침대에서 여성을 넘어뜨리는것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체제의 굳건함의 상징이며, 그로인해 통제된 모든것을 소유물로 생각하지만, 결국 제 전립선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트루히요는 그가 추잡하게 실현했던 인간본성의 욕구를 해소하기위해가는 길목에서 처단되는 것은 우습고도 통렬한 묘사이다. 우라니아가 언제까지 간직할 지 모르는, 유년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그 개인에 국한된다고만은 할 수 없다. 트루히요의 추종자들은 결국 그의 휘하에서 그의 아우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쓸때부터, 인류가 그 본성을 지배하기 위해 지금껏 발전시켜오고 감춰뒀던 악의 한 귀퉁이에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처녀막이 상실되는 순간, 많은 군인들과 추종자들은 그들이 갖고있던, '타인의 힘을 억눌러서 자신의 힘을 찾고, 그 억눌러진 것까지 자신이 가져가버리는 것이 아닌, 타인의 힘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힘을 존중받는' 그 이치를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추앙했던 '위대한 독재자'도 결국 침대에서 한 여성을 쓰러뜨릴 수 없음에 절규해야만 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로만이 알았다면, 많은 이들의 운명은 조금, 아니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자유를 자신이 통제해야 하는 단순하고 확고한 이치를 상실했던 시민들은 독재자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을 것이다. 

 

호들갑 떨지않기에 더욱 진한 비극 - 우라니아의 입을 빌린 작가의 고발 

2권의 해설에서도 분명 서술돼있듯이 '바르가스 요사' 는 이런 도미니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나아가 세계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독재에 대하여 단연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기에는, (대개의 위대한 소설들이 그럴테지만) 바르가스 요사의 그런 입장이 소설의 전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어디에서도 강요하지 않고, 소설가로써 차분히 써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우라니아가 지었을 법한 표정이 글에서 느껴졌다. 그는 전반에 걸쳐 트루히요의 악행을 좀더 드러내고, 신랄하게 파헤쳐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트루히요의 내면으로 침투한 세포처럼, 독재자부터 낱낱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순덩어리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보다,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더 쉬운 이치일까? 물론 그의 여성을 향한 다방면의 성적횡포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등을 돌린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모습, 모든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은 이미 완벽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묘사엔 딱히 어떤 비난적인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 대해 어디까지 비난의 마음을 갖을것인지, 독자에게 넘긴걸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지런히 잘못가고 있는 최고권력자'의 모습을 독자가 조롱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트루히요는, 개인적인 인간으로 보기엔 그 자기관리에서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그 개인적인 우수함은 결국 국가를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는 원동력이었고, 그런 개인의 통제력을, 한 거대한 집단에까지 통용하려 든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우라니아가 무표정으로 고백한 옛 진실이 그 사촌들을 무너뜨렷듯, 바르가스 요가의 (예상보다) 중립적이이고 과정되지 않은, 끊임없이 제시되는 근거와 묘사에서 독재의 지독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길들여졌을지 모를 자신 돌아보기 - 소설의 역할

독재자가 정적을 제거하고, 그의 가족들이 독재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호위호식하며, 아무 노력없이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읽어내려갔다. 물론 트루히요가 제거됐을 때,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행하는 입에담지못할 고문들과 그의 주변인들이 (특히 자식들)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강간하고 무너뜨리는 것 또한 충분히 치를떨만큼 비극적인 것임을 안다. 헌데, 마치 중립적인 입장인듯 보여지는 소설의 모습때문일까 (아니 이것은 결국 독자의 판단에 따라 나뉘겠다) 2권에 걸쳐 끊임없이 읽어야만 하고, 독재자란 인물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모습이기 때문일까. 내 예상보다 독재자에 대한 큰 분노의 감흥이 없었다.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놀라며,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많은 비극에 어느새 길들여져 있었다. 이 모든 통제를 나는 당연했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며, 폐단인가. 그럼에도 내가 믿는 한가지는, 이것이야 말로 독재의 본질을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란 것. 그것을 위해서 '요사'는 크게 강요하지 않고 그저 소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이것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작가는 우라니아에 대해, 독재로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에게 한줄기 빛을 남겨둔다. 비록 30여년도 더 흘렀지만, 우라니아가 제 가슴속에 꼭꼭 감춰둬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사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대답없는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녀는 이제 사촌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상실의 땅에서 소생을 희망한다. 그녀는 결국 상처의 시작점에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재는 진화한다. 세련되게

이 나라에는 짧은 시간동안 남부럽지 않은 독재자들을 배출했다. 애써 저 이북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사실 그쪽얘기를 하자면 너무 할말이 많을테니깐)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적 부흥기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의 업적과 폐해 중에서 어떤것을 우선으로 쳐야할지 판단할 깜냥을 아직 갖고있지 않다. 다만 '독재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것들이 비판거리가 됨은 확실하다. 우선 그 시대에는 누가 대통령이 됐던 그런 경제정책을 취해야만 했을 것이며, 정상적인 연임이라는 것과 종이한장 차이일지도 모를 독재로 인해서, 그런 일관된 경제부흥정책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생활이 윤택하기때문에 그의 독재를 비판한다고 한다. 틀린말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그런 어려운 시기에 처했던 세대들이었기에, 그의 독재도 그렇게 미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대기업위주로 키워낸 정책들은, 지금에서야 보면 한국경제에 이바지하는것으로 보이지만, 그 대기업이 크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혹독한 조건에서 일을하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금도 휘청거리고 있는가. 전 세대들은 그 시대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배은망덕'이라 표현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그런 전 세대들보다 더 혹독한 여건에서, 오로지 경제부흥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개인을 제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차이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트루히요와 박정희가 무엇이 닮았는지 가늠할 기준을 갖춰야 한다. 트루히요를 진심으로 찬양했던 수많은 도미니카 시민들 또한 그의 경제정책만을 바라보고, 30년이 지났음에도 그때가 살기는 더 좋았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트루히요의, 박정희의 독재가 아니었더라도 우수한 지도자가 경제를 이끌었을수도 있었음을 무슨 근거로 부정할 수 있는가? 

위의 주장들은 분명 오류가 존재할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저것들을 판단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박정희 이후에도 많은 대통령들이 크게 바꿔놓지 못했고,(아니 오히려 굳건하고), 그들이 경제부흥의 적임자가 아니었었음을 주장할 어느 근거도 갖고있진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것은, 어떤 경제부흥이든 뭐가됐든 그것은 독재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먹고살만하면 모든것이 충족되는 것인가?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이 <염소의 축제>를 읽고 독재자와 독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만 하는가. 밥을 굶기지 않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행복한가? 경제적 부흥을 찬양한다면, 거기까지만 해야한다. 그것이 독재를 아주 조금이라도 포함해서는 안된다. 그렇게되면, 언제라도 또 다른 독재자가 어디에서 탄생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라고 우라니아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그 당시의 것들이 아직도 공중에 떠다니고 있어.' (2권 366p)

그 경제, 경제, 경제 만을 강조해서, 지금 우리가 어느 세상속에 살고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고있지않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고. 개인에게 총기가 허락되며, 그 위에서 더 많은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되는 나라에서처럼 통제받아야 그것이 독재라고 느낄것인가? 자유를 쫓는 시민들의 모습이 웹을 통해서 진화했 듯, 권력자들의 독재도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체감하고 있지않은가? 언론의 방송이 사전심의를 받기도 하고, 정책이 정책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닌, 혈세로 만들어진 광고로 시민들을 설득하고, 웹공간에서조차 그 누군가를 비난할때 그 표현의 수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것이 과연 독재체제 아래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덮어놓고 앞뒤없는 비난은 예외로 하자) 어떻게 더 그럴듯한 연극을 연출할지 고민하는 트루히요의 모습을 우리는 먼곳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화염병과 최류탄으로 점철된 시대에 서지는 못했더라도, 나는 이 시대의 저항방식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바꾸려는 물결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를 내도, 누구 한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흔드는것은 결국 제 머리위로 숱한 돌조각을 받아내는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물결에 동의할지라도 결국 그자리에 설 수 없었던, 밥 벌어먹고 살기위해 바빴던 많은 이들처럼 나또한 내 밥그릇찾아 자연스레 뒤돌아 가는 것을 보며, 나는 나에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을 벗어난 집단생활이 지속되는 언제까지고, 유형/무형의 독재자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어떤 책임과 동시에 권리를 쥐어주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봐야한다. 그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했고 존재할 염소들에게 해야만 하는 우리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지...(중략)" (1권 142p)

자신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로 세련되게 치장된 독재의 목줄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 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 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저질러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던 우리 600년의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02년 故 노무현 대통령 대선 출정식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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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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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금이라도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서점에서 눈길 한번 안줄지도 모르는, 분위기의 책. 판타지를 많이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몇가지 이야기를 읽은 후에 느낀것은, 항상 그게 그거인 것 처럼 보이는 세계관과 쏟아져나오는 판타지소설들. 그 풍파속에서 순수문학이나, 이야기의 힘이 아닌, 언어자체의 힘을 가진 책들을 많이 접했던 독자라면, 이런 책에 흥미를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또한 예외는 아니다. 물론 기억속에서, 예전에 봤던 여러가지 판타지소설들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 줬었다. 이 '영웅의 서'도 그런 책인가? 그래. '판타지소설 같은거' 라고 누군가 말해도 그것들은 말그대로 재미있었고, 각기 나름의 깊은 울림과 사색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간될때까지 그 호기심과 기다림을 간직하지 못해 결국 내팽겨쳤던 몇몇 판타지소설들. 아마 <영웅의 서>의 2권이라는 분량이 다른 1권의 책들에 비해선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책의 사이즈 그 자체 때문인지 큰 부담까지는 없이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왈가왈부를 한다고 해도 판타지는 판타지일 터. 그저 한번 보고 상상의 끝을 달리고, 그 종착지에서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고 책을 덮기전에, 나는 잠시 현실세계를 완벽히 떠났다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가볍게 책을 들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리코가 '엉터리 사전'인 아쥬를 만나고 실제적인 이야기의 썰이 풀어지기 전 까진. 

유리코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어느날 그 평범한 나날을 깨는 비보를 듣게된다. 그의 오빠인 히로키가 동료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한명이 목숨을 잃고, 한명은 크게 다친 것. 그리고 그 히로키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상속에서 어떤 순리를 갖고 차근차근 파생되는 것이 아닌, (미스터리, 추리물등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할줄아는 작가인만큼) 격정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히로키의 돌발행동으로 유리코를 포함한 가족들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그러던 중 유리코는 어떤 검은 형체에 무릎꿇은 듯한 오빠의 형상을 보게되고, 그걸 계기로 오빠의 방에서 책 한권을 발견한다.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 책은 유리코를 많은책들이 모여있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는데 핵심이 되는 작은할아버지의 별장으로 데려간다. 여기서부터 수난은 시작된다.  

유리코는 거기에 있는 '생명을 지닌' 책들에게서 히로키에 대한 자초지종을 다소나마 들을 수 있게되고, 오빠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인 유리코보다 더 독자를 혼란스럽게, 혹은 간단한 여러가지 이론과 개념들. 

여기서부터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어찌본다면 말장난과도 같은 갖가지 혼란스러운 개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미스터리의 요소를 간직한 채 <영웅의 서> 이야기의 말미에서 보충해 주기도 한다.

일단 유리코가 사는 곳을 '테두리' 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란것은 인간세상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천체, 자연,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든 곳이다. 그에비해 유리코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테두리'란 곳은 인간이 그 '세계를 해석하려 하는 순간 태어난 것이다. 인간세상은 그 테두리 안에 속해있으며, 그 테두리는 세상보다 커지기도 했다. 

아마 나처럼 머리나쁜 독자는 초등학생인 유리코와 같은 혼란에 빠질수도 있다. 다만 한페이지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그것들의 개념이 보충설명되기도 하며, 다른예로 그려지기도 한다. 

'영웅'이란 모든 위업의 원천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이 알고있는 테두리 안의 영웅의 모습은 원천인 '영웅'이라는 이야기에서 생겨난 복사본이다. 유리코의 오빠인 히로키는 그 영웅에 홀려, '엘름의 서'라는 책을 쥐게 됨으로써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영웅'을 원하고 있어. '황의를 입은 왕'의 부정함을 알면서도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거지. 그 또한 인간의 업. 천성이라고" (2권 339p)

그리고 나아가, <영웅> 이라는 존재를 과연 '선'그 자체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애초에 태양이 비치는 곳의 반대편에는 그림자가 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빛이 강력할 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이치다. 인간은 그 영웅의 좋은 모습만을 바라보고 흉내내려 하지만, 그 방법적인 면에서 영웅의 악한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히로키는 그 영웅의 사악한 부분에 홀렸던것이다. 물론 제 스스로는 그런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선 현실을 타파하기를 바랬다. 

어쨌든, 그렇게 히로키를 찾아나선 유리코는 아슈외에도 소라, 애시 등의 동료를 만나며, 이야기와 영웅의 근원과 진실을 파헤치며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유리코는 황의를 입은 왕을 저지하고, 오빠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까?

숱한 개념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판타지 성장 드라마다. 모든것이 혼란스럽고,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나이에 어른들이 세계에 발을 하나 들여놓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근원과 배경을 탐구하고 도전한다. 

그럼에도 이 <영웅의 서>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과 그 이야기가 갖는 양날의 검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다. 아니 책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떤 이름없는 땅에서 무한대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인간세계로 들어오며, 그리고 다시 왔던곳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아내는 자' 를 통해 현실에서 어떤 형태를 띄게되고, 인간이 거기에 열광할수 있게된다. 그리고 곧 그것은 인간의 업이 되기도 한다. 자아내는 자 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러니깐 굳이 자아내는 자의 손을 빌려 이야기가 허구적으로 탄생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는 그러한 삶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걸 돌이킬 수 있다고 속이고,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이야기의 힘이야. 그것이 '테두리'의 이치야. 그것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때로는 사람 마음의 진실과도 상통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테두리'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자아내는 자'들은 죄업을진 자로 불리는 거야. (2권 260p)

살아간 흔적이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순리인데, 때때로 인간은 이야기를 앞장세우고 그 '있어야 할' 이야기 들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정의, 승리, 정복, 성공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있어야 할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은 그 방법적인 고민을 제쳐두게되고, 오로지 그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가게된다. 그런 와중에 죄를 짓고, 업을 쌓게된다. 자아내는 자 들은 그런 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만들기때문에 업을 떠안지만, 따뜻한 이야기또한 만들어 내기때문에, 그 업을 지고 살아가는것을  용서받는다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그 자체가 걸어온길이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내는 자 와 아닌 자를 구분할 필요없이 제 몫의 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은,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을 판타지라는 장르를 차용하여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얼핏 '선'으로 보이는 영웅의 모습은 그것을 따라가는 인간들이 악을 만들기도 하며, 의도치않게 악을 행한다. 어쩌면, 성인들의 문화인 폭력과, 성, 혹은 책이 아니라 영화, 게임, 만화 등으로 발전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인간이 처음에는 의도치않았던 악을 만들기도 하는 듯 싶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어디에도 존재한다. 한장의 일러스트, 한장의 사진또한 따지고보면 개별적인 이야기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일수록 인간이 요구하는 '영웅'의 모습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선망을 경계하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만물은 빛 아래서 탄생하고, 그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발생시키니깐. 공기같이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자아내느냐 에 따라 그것은 인류를 풍요롭게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쇄락으로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란 뭐지, 유리?" 하고 애시는 물어왔다.  

-중략- 

"'자아내는 자'만이 창작자는 아니야. 인간은 모두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엮어내지." 

"그러니깐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거야.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도록."  (2권 331p)

이야기는 먼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글에서 보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글자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끝없이 파생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내는 자'가 만들어내는 문장이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행동'으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느냐에 따라 셀수 없는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들었던 책을 무겁게 내려놓는다. 어쩌면 난, 유리코보다 더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시간성'을 아주 아름답고, 넘치는 상상력으로 표현해냈던 '모모'가 떠오른다.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 그리고 고정됐던, 혹은 생각조차 해보지못했던 이면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판타지로 엮어놓은 책이 어디 흔할까. 저자는, 이야기가 탄생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엄청난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녀는 펜을 통해 이야기를 짓는, 업을 지닌 '자아내는 자'이며, 우리또한 이 책을 읽는 행위에 의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자아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인류가 행동을 통해 만들었던 이야기서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지혜를 물려주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벽화들을 통해 이야기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곧 이야기의 역사라 봐도 무방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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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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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했던 헐리우드판 <렛미인>. 영화는 분명 아름다웠다. 개인이 가진 최후의 공간에 서로를 엮어놓는 오스카르와 엘라의 모습은 시리도록 아릅답고, 때로는 잔혹하기도 했다. 영화내내 많이 등장하는 하얀 눈은 공간, 계절적 배경이 되는것과 동시에 여주인공 엘리의 모습과도 대비됐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떠날 수 없는 피의 붉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색이기도 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중심적으로 엘리와 오스카르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것. 엘리와 오스카르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2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었을테니깐.)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알수도 있을테지만 렛미인의 주변인들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조연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들로 볼 수도 있을만큼. 영화속에서 호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이 택해야만 했던 이야기, 그 바깥에 있는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것이 바로, 영화를 보고나서도 소설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 부득이하게 스포일러성 이야기들을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 
 
렛미인은 80년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교외지역 블라케베리에 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마치 일상적인 소설로 보여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수많은 시간을 외롭게 견뎌내온, 피에.. 아니 그 흐르는 생명의 따스함에 굶주렸던 한 뱀파이어가.
 
오스카르. 이혼으로 인해 편모 아래서 살고있는 그는 몇몇 급우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외면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 도둑질까지 할 정도의 대범함이 있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허공에, 나무에 힘껏 칼을 휘두를 만큼의 증오심은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아직까지 껍질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는 달팽이기에, 그들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
 
호칸. '비뚤어졌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성적취향을 가진 그는 엘리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이로 인정받기 위해 살아있는 이에게서 피를 훔쳐온다. 시작점부터 다르지만, 갈수록 극명하게 그 노선이 갈리는 이 두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자별로 진행되는 서사는, 후반부에서는 그 시간대로 나눠지기도 하며 독자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들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바퀴는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들로 인해서 다소 치우칠 수 있는 이야기를, 작가는 그들을 둘러싼, 혹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함께 보여준다. 맞물린 톱니는 더 멀리까지 큰 힘을 내어주게 되는 것. 방법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했고 실제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경력도 있음에도 실상 그 마음이 뿌리까지 차갑다고는 할 수 없었던 호칸으로 부터, 부랑자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라케, 그리고 많은 인물들이 이 '렛미인' 이라는 한마디를 통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톱니들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던 만큼, 그런 사랑의 감성만을 따라가는 (뱀파이어를 차용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초반에 확인할 수 있었다. 렛미인은 굉장한 스릴러적 요소를 가지면서 고차원적인 사랑의 이야기와 상대적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뱀파이어를 끌어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라케와 비르기니아 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거의 수입은 없다시피하며 선술집에서 만나 다른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술과 농을 즐기는게 유일한 낛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 인간의 고통과 어쩔 수 없음, 실망으로 이어져온 수천 년 세월이 잠깐이나마 라케의 노구에서 출구를 찾아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2권 266p) -
 
다만 너무 늦게, 혹은 (역설적이게도) 엘리를 통해 알게된, 사랑에 대한 깊은 가르침으로 인해 비극아닌 비극을 맞게되는 이들이다. 
 
 
- 구름기둥이 날 도울 거야. 그런 새끼한테는 눈물이 쏙 빠지게 귀싸대기를 날리는게 약이야. (2권 105p) -
 
물론, 톰미. 톰미 또한 아버지가 안계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스카르와 같이 편모아래서 자라고 있고, 오스카르보다는 더 실제적으로 어긋난 생활을 하고있다. 톰미는 오스카르와 엘리, 라케와 비르기니아와는 다르게 좀 더 그 사회적인 배경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어린아이들을 결국 그런 상황으로내몬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그들의 위엄과 기득권을 강요하고, 또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어느정도는 아이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요소요소들을 갖추었음에도, 그것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려 든다. (실제로 여기서 어머니의 모습들은 그래도 대게 온화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의 위치에 놓여있는 그들의 행동들은 작가의 의도를 잘 담았는지 대부분 한심하고 허섭스럽게 그려진다) 이렇게 렛미인은 인간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적당한 거리를 갖고선 함께 끌어나가고, 종국엔 그것들을 한데 묶어버려버린다. 그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교묘히.
 

어쩌면 그런데로 평범한 아이였을지 모를 오스카르는 불안전한 가정사와, 괴롭히는 급우들로 인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요소들로 인해 꾹꾹 눌러담아진 분노와 증오. 적절히 나갈곳을 찾지 못하고 압축되어오기만 했던 그것들이 오스카르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준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독자들은 그런 오스카르의 감춰진 모습을 바라보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칼자루를 쥐고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렇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오스카르를 그려넣는다. 더불어서 불가피하게 살아움직이는 피를 강제적으로 뺏어올 수 밖에 없는 호칸의 모습과 교차적으로 이어진다. 치밀하게 짜여진 이 둘의 교차점들과 작가의 트릭을 보면서, 어쩌면 이 둘의 공통점을 이렇게 시사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살짝 틀어진 각도와 더 깊은 곳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차이들이 이들의 결과를 완전히 대립시키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빈틈없이 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상징이나 하는 듯한 큐브를 갖고 오스카르와 엘리는 만나게 된다. 그 만남으로 인해 오스카르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급우들에게 날을 세울 줄 아는 용기를 갖게되고, 엘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신에게 피를 대어주는 혹은 그것을 조달해주는 수단 이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초반에서부터 오스카르의 혼란스러운 자아에 들어갔고, 상식적인 서사를 살짝씩 벗어나는 진행에 영화에서의 차가운것 이상으로 따뜻한 눈의 모습을 잊게 된다. 이즈음 알게된 듯 싶다. 그렇게 감성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소설이 아니란것을.
 
함께 할 친구가 있다면 천국같은 따스한 곳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지옥같은 외로움이 존재하기도 하는 곳. 놀이터에서 에스카르와 엘리는 서로를 처음만나게 된다. 에스카르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고, 때마침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엘리는 씻지않은 것 같은 냄세를 풍기고, 머리는 몇일 감지않은 것처럼 기름져있다. (엘리의 경우가 에스카르와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그들은 서로가 가진 단점, 혹은 이상한 점들에 갖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냄세가 나는 것을 좋은 향기라고 생각하는것 까진 할 수 없지만, 거기서 으레 사람들이 갖는 오만가지 편견과 멸시 등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어떠한 색안경도 끼지 않고, 상대의 단점이든 이상한점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그로인해 그들은 친구가 되게되고, 그것들이 오스카르와 엘리를 놀이터에게 계속해서 만나게 하고,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모스부호를 사용해 의사소통 할만큼 창의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방법과 욕심이 비뚤어졌다해도 자신의 쾌락앞에서 동정심과 이성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그 내면까지 악하다고 할 순 없었던 호칸은 엘리를 위해, 사랑받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살인을 그만두고 싶어하고, 결국 엘리는 지나가던 취객을 제 먹이로 삼게된다. 그리고 그 희생자와 아주 절친한 친구였던 라케의 비극또한 시작된다. 호칸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마지막이 될 것이고 아마 돌아오기 쉽지 않을거라고 예상했던 그의 마지막 계획은 결국 제 얼굴에 염산을 뿌려가며 끝날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것은 잔혹하고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영화에서의 호칸의 설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엘리를 위해서 피를 구하는것은 같은데.. 그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은 채, 경찰에게 잡히기 전 자신때문에 엘리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까봐 제 얼굴에 염산을 부을정도의 맘을 가진 그를, 엘리는 너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점. 그것때문에 사실 나는 엘리와 오스카르의 이야기에 남들만큼의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원작에서는 완벽히 설명된다고 할 순 없었지만, 왜 엘리가 호칸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사실 어느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는 옷을 사고 다시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는 엘리가 '악'인지 '선'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엘리는 아름다웠고, 엘리는 그에게 자존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1권 331p) -
 
호칸은 가정이 있었다. 그의 성적 성향은 왜곡되어있었지만, 어쨌든 그도 남들만큼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중에 그것을 잃고, 그 상실의 부분에 엘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 아마 엘리도 호칸의 그런 성향을 알았다면 다른 이를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누구나 자기 생각만 한다. 나의 행복, 나의 미래란 말만 할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삶을 다른사람의 발 밑에 내려놓는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인간들은 불능이다. (1권 p39) -
 
이것을 최소한으로 지킬 수 있었던 호칸은 결국 선을 넘기고 마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고, 죽음을 뛰어넘고 이성을 상실하기전까진 그래도 그에겐 절제가 있었고, 선택받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무릎을 꿇을지언정 무단침입하지는 않을 만큼의 이성과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언데드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된 후 그 이성은 그 육체속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쨌든 인정받기 쉽진 않겠지만) 엘리에 대한 사랑과 오스카르에 대한 질투, 그로인한 집착으로 인해 왜곡된 그의 마음은 종국엔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엘리를 강제로 범하려 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잔혹한 씁쓸함과 쓸쓸함을 갖게 한다.
 
- 사람들은 개나 소나 다 친구라면서, 그 말을 아무 데나 갖다붙였다, 그에겐 한명만이,
단 한 명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마저 어이없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1권 276p) -
 
죽마고우였던 요케를 잃은 라케는 비르기니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된다. 가진것이라고는 물려받은 고가의 우표인 라케는 자신을 사랑하는 비르기니아에게 심한말을 하게된 후 정말로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가려 하지만, 비르기니아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게 된다. 마침내 비르기니아를 자신이 가진 개인적 최후의 공간에 들여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는 한 생을 구원하려고 돌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생을 (1권 338p) - 
하지만 결국 그녀를 잃게 된 라케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엘리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달려든다..
 
호칸과 라케는 오스카르와 대조되고, 비르기니아는 엘리와 대조된다. 어쩌면 호칸과 비르기니아는 우리가 선망하는 오스카르와 엘리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는 동시에, 그렇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기도 한듯 보여졌다. 
   

호칸은 앞서 말했듯이 그래도 진정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의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정할 줄 알고있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그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길 바랬다. 하지만 오스카르의 등장으로 인해 그 희망은 무너져갔고, 결국 그녀를 위해 최후까지 헌신했지만 그의 심장은 육신과 따로 떨어지게 되고,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욕망과 집착은 엘리를 막다른 벽으로 몰아넣는다.
  
- 호칸이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이 한가지는 암시해주는 듯 했다. 그가 초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는 것 (2권 221p) -
 
하지만 그것은 엘리의 착각이었다. 이미 이성따윈 상실한 호칸은 결국 그녀에게 '들어가도 될까' 라고 물어보지 않은 채 엘리의 공간을 침범한다. 하지만 오스카르는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수함을 갖고선 엘리의 공간에 들어가고, 엘리를 선택하고, 엘리에게 선택받는다. 오스카르와 호칸의 마음에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쨌든 호칸은 엘리에게 선택받지 못한 존재였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칸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사랑의 크기가 아닌, 그가 갖지 못했던 오스카르 같은 순수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성인이 된 호칸에게는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욕망.
 
 
- 라케는 목이 메도록 케이크를 먹으면서 인간의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에 대해 생각했다. (2권 200p) -
 
너무 늦게 비르기니아에게 '들어와' 라고 말했던 라케의 비극은, 사실 엘리로 인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엘리와 오스카르의 사랑을 순수로 포장한다고 해도 불변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엘리와 오스카르의 순수함과 동시에 라케와 같이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 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어쨌든, 다만 비르기니아는 엘리가 뱀파이어가 됐을때와는 다르게 성인이었고, 그가 선택한 라케에게도 선택받았다. 그 사랑은 그녀가 라케와 함께 살아가고싶은 욕심과 더불어, 역으로, 라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는 절대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심어주며 자신을 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런 결심을 하는 부분, 자살아닌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에서 정말로 울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오스카르와 엘리의 사랑보다 더 심장을 쥐어짜듯 아파왔다.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강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들과 동일하게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갑작스레 짊어지게 되고, 그렇게 라케와 사는것은 결국 라케를 파멸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므로써, 스스로의 삶을 끊게끔 만든다. 그녀는 엘리가 살아야만 했던 이유, 그저 자신에게 펼쳐질 '無'에 대한 두려움 보다 더 큰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행복' 을 갖게 됨으로써 마침내 고통스럽고, 미치도록 싫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삶을 끊을 수 있던 것이다.   
- "비르기니아! 비르기니아! 자기야, 사랑하는......" (1권 342p) - 
그녀는 결국 라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라케를 자신의 마음속에 들일 수 있었기에...
 
 
-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계속그 생각이 맴돌았다.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2권 p95) -
 
- 그 몇 초 동안 오스카르는 엘리의 눈을 통해 보았다. 그가 본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고, 더 잘생겼고, 더 힘이 센, 그리고, 사랑을 하고있는. (2권 302p) -  
 
물론 주인공은 오스카르와 엘리이다. 분노를 쌓아놀 수 밖에 없었던 오스카르는 아빌라 선생의 말처럼 달팽이 껍질에 숨어있다가, 엘리를 만남으로 인해 용기를 내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눈을 치켜뜨고 바라볼 수 있게된다.
 
 
- "나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이젠 엘리가 무서웠고 보고싶지도 않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1권 347) -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만 온전하게 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1권에서도 언급됐듯이, 남을 마음에 들이는 것은 아픔이 따른다. 아마 몇백년을 살았던 엘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거나, 그동안 갖지 못했던 그것을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몇십년, 십몇년을 산 이들은 그것들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혹은 많이, 아주 많이 아프고 나면 이해한다. 남의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것이 설령 자신의 행복과는 어긋나는 결과일지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 나는 떠나야만 살 수 있고, 머무르면 죽으리. 너의 엘리가 (1권 291p) -
 
보통때와 비교하면 보기드물게, 난 이들의 뒷 이야기에 대해서 상상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마 엘리는 숨을 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누군가의 진심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들일 수 있게 된 엘리는 이제 그 지난한 자신의 생을 마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비르기니아 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그것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타인과의 거리.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 그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일. 내가 향하는 마음을 허락 받는 일, 그것이 설령 no 라도 인정하게되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를 들이는 사람은 아플지도, 정말 아픈 일 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아픔과 동시에 최고의 행복이 되니깐.
 
그러니깐.. 나는 렛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순수함과 성숙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도, 어른들도 관통하는 이야기.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이는 것은.. 그래. 쉬운게 아니다. 자칫했다간 피같은 눈물을 쏟을 수 있다. 엘리처럼. 그래도 인류의 역사를 따라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 행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단순한 이 한마디. 'Let me in' 으로 아주 심플하게 표현되고 있는게 아닐까.  

  


 
사람을 가슴에 품으면 상처를 입게 되는 법.
비르기니아가 관계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가슴에 품지 마. 그들이 들어오면 상처받을 일도 많아져.
너 자신외에 너를 위로해줄 사람은 없어. 너 자신만의 문제라면 고통스러워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야.
희망을 품지 않는 한 괜찮을 거야.그러나 라케와 함께하면서 그녀는 희망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서서히 싹틀 거라고, 그래서 마침내는. 언젠가는. 무엇이? (1권 338p)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말할 것이다. '들어와' 라고. 그것이 개인이 가진 불완전한 행복을 채워주는 유일한 길 일테니깐.
이것은, 사랑을 넘어 우정까지 관통하는,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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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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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생각이 났다. 부실하고 무관심한 기억이 마치 작년이었는지, 재작년 이었는지, 정확히 언제인지도 이미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지게끔 해준다. 다시한번 그때를 생각해보며 시간을 되짚어보니 그때는 2008년 여름이었다. 집에도 아무얘기도 하지 않았고, 같이갔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행해졌던 일. 2008년 여름, 시청광장을 비롯한 광화문 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정부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위해 몰려들었다. 외신기자도 놀랄정도로 그 물결은 거대하게 타올랐다. 사실 나는 절대 그런곳에 참여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고작)두어번 참여한적이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의지가 나를 행동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그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힘을보태는 것과는 약간 미묘하게 다른 이유로 나섰던 것 같다. 분명 그때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반하는 의사를 갖고 있었지만, 나를 정말로 움직이게 했던것은, 내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혁명이 가져올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무임승차 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그 촛불집회가 분명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별 시덥잖은 일상을 핑계삼았는지 나의 참여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집회또한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성과를 이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에겐 고작 이정도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가져다준 이 사건이 나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을까. [빵과 장미]는 실제로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그때에 내가 느꼈을, 행복에 대한 방법적인 고민또한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했다. 

20세기초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거대 방직공장들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다루는 [빵과 장미]는 실제로 그 파업을 일으킨 주체인 어른들이 아니라 그 테두리안에서 어쩌면 그 어른들보다 더 깊은 현실적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 -로사와 제이크-를 통한 시선으로 보여진다. 활활 타오르는 행복이라는 불꽃을 거뭐지기 위해서 뜨거운 열기속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있던 어른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 어른들에게 드리워질지 모르는 죽음과 그로인해 자신들이 실제 피부로 느껴야했던 배고픔과 추위를 걱정해야 했던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한 이야기 인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마치, 고리끼의 ‘어머니’ 같은 역동적이고 치열한 혁명의 모습보다는 좀 더 차분한 시각을 보여준다.  

선생님에게서 파업은 결국 법을 어기는 폭동이라고 배우는 로사는 자신의 엄마를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의 열성적인 행동을 보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라기보단,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행동이 더 옳은가로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기도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제 꾀를 십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하는 제이크 또한 파업의 열정적인 현장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결국 제 자신이 눈앞에 맞닥뜨린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분명 성장의 시기에서의 이런 고민은 어른보다 좀더 혼란스럽겠지만, 실제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이것들이 비단 아이들만이 갖는 고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지에 따라 혁명과 집회의 주체자인 어른들또한 이 책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처럼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갖는 신념과 믿음의 혼란은 훌쩍 자란 어른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가치관의 차이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인해 참여여부가 갈리는 것이 아닌) 파업이나 집회에 참여여부를 갈라놓는 것 아닐까. 그러니깐 연대의 성공여부는 실제적으로 반대의사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는일 뿐만아니라, 의견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눈앞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일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법적 가치의 혼란은, 마치 미국 토박이와, 이탈리아계, 기타 등등 국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촛불집회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 내 자신의 현실의 문제들 때문이었는지, 옅어져 가는 희망때문이었는지,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을 보고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게을렀던 것인지 예나 지금이나 확신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참여했던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 둘과 시청앞에서 촛불을 켜고 거리를 행진했다. 소심한 성격에도 친구들과 함께 사람들이 열창하는 노래와 구호들을 크게 외쳤다. 누가 시작한지도 모르게 들려오면, 큰소리로 따라했다. 행진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진행되었고, 우리들이 그 페이스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군중들이 갖고있는 제각각의 두려움들이 그들의 걸음을 붙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경찰의 저지선에 다다랐을때 나와 친구들은 거의 맨 앞줄에서 그것들을 맞닥뜨렸다. 모두가 연대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적잖은 두려움은 내내 나를 두드려댔다. 그러다 물대포를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그 저지선 높은곳에서 우리를 향했고, 나는 더이상 앞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 혼자 뒤로 빠질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을 잡아다가 함께 뒤로 가려했다. 물대포를 뒤집어쓸 각오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것들을 머리위로 이고서 앞으로 향했다. 허나 그것은 맥빠지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었겠다. 그것은 후에 검거를 용이하게 하고, 국가의 녹을 받을 사람에게는 족쇄가 될지도 모를 채증용 카메라였다. 그후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야할 것 아니냐는 친구의 의견에 의해 우리는 어느틈엔가 군중속에서 살짝씩 벗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몇날 몇일을 세울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그런 이야기를 해주길 바랬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만큼의 의지도 열정도, 용기도 없었을테니깐.

파업과 집회, 즉 작던 크던간에 혁명을 위한 참여에 대하여 어른에게는 그것들이 책임이 따르는 선택일지 모를지언정, 이 순진한(그럼에도 현실적일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위해 결사항전 하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이고, 어떤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않은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게 이책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갖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에따라 어떻게 행동할것인가의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삶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위한 과정중에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환기시켜 주고있다. (물론 어른이 되기전 확고한 신념을 세웠다 하더라도 후에 끊임없이 그것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올테지만 말이다.) 

허나, [빵과 장미]는 행복을 위한 가치추구에 대해서 아이들이 보는 시선과 혼란, 순수성, 성장과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먹는 것을 넘어선 질문을 던진다. 그 부분은 아이들이 버몬트로 향하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그동안 대비되었던 로사와 제이크의 삶에 대한 차이를, 둘을 한집에 붙여놓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돌아갈 따뜻한 가족이 있는 로사가 던지는 질문들과, 그렇지 못한 제이크가 던지는 질문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은 배불리 먹으면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로사와, 아버지가 죽은게 제 탓으로 여겨질까봐, 뉴욕으로 도망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이크의 상황또한 분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확실한 공통점은, 결국 모든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공간은 가정이라는 곳이라는 것. 이로써 타인이 가진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은, 조금 덜 가진자든, 조금 더 가진자든 저마다 비슷한 깊은 고민이 있다는 것 또한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메세지는, 버몬트를 떠나면 정말 어디에도 제 자신이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의 제이크를 통해 이뤄진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돌을 살려내려고 작정한 듯 거기에 꽃을 새기며 살아가는 제르바티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가족이 사라지고, 어린나이에도 너무나 치열한 문제와 싸워야만 했던 제이크가 진심으로 서로를 채워주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연대는, 결국 공장주들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오로지 빵만을 위해, 그저 동물적 생존본능에 의해서만 이뤄진 파업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파업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승리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때문이다. 파업에 현장에서 로사의 엄마와 연대했던 이들을, 그들이 파업을 계속할 수 있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을, 제르바티의 상처입은 가슴에, 제이크의 얼어붙은 가슴에 장미꽃을 새겨준 이를 가리켜, 우리가 그것을‘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거뭐지기위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연대)이 필요하다면, 이 [빵과 장미]에서의 제르바티와 제이크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모습은 연대의 기초가 믿음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함을 말하고, 로사를 통해 보여지는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법적 고민과 혼란을 통한 내적성장은 연대를 이루는 개인구성원이 거쳐야할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와 고민들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려진 구성원간의 빈틈없는 연대가 행복을 향해 앞으로 전진할때야말로, 돌같은 희망위에 장미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을 로렌스 지방의 모든 이들이 온몸으로 증명했다.

[빵과 장미]가 보여주는 이 강한 연대와 그로인해 이들이 얻을 수 있었던 행복이야말로, 2008년 여름 서울의 한복판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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