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스 - 2010년 퓰리처상 수상작
폴 하딩 지음, 정영목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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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팅커스』는 목사였던 할아버지, 땜장이이자 행상인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시계 수리공이었던 아들, 이 삼대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시계를 고치는 일로 가족을 부양해온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된다. 병상에 누운 조지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8일간, 마치 환상을 보듯 추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아버지가 추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까지고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그 애틋한 기억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팅커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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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그 세심한 문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진정 '퓰리처상 수상작이란 이런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은 매우 아름다웠고, 정교했다. 어떨땐, 그 아름답고 정교한 문장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황홀하고, 어떨땐 몇 문장 사이로 그런 매혹적인 문장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을 요동케 했다.

책 소개와 같이 시계 수리공이었던 '조지'의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장은, 그 문장과 문장사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구체적이며 몽환적이다. 책의 앞부분부터, 나는 꿈과 현실사이에 오버랩되는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와 마주친다.

지붕이 무너지면서 다시 나무와 못, 타르지와 지붕널과 절연재의 사태가 일어났다. 모루의 함대처럼 푸른빛을 가로질러 떠가는, 위가 납작한 구름들로 가득 찬 하늘이 보였다. 조지는 아픈 몸으로 밖에 나갔을 때의 그 습하고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구름이 움직임을 중단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그의 머리로 곤두박질쳤다. 하늘의 푸른빛이 그 뒤를 이었다. 마치 배수구로 물이 빠지듯, 높은 곳으로부터 그가 있는 너저분한 콘크리트 구멍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다음에는 별들이 떨어지며, 제자리에서 떨어져나온 하늘의 장식물들처럼 그의 주변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고정한 압정이 빠진 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검은 공간이 지하실의 잡동사니 더미 전체 위로 늘어져, 조지의 혼란스러운 소멸을 덮어버렸다. (11~12p)

이것들을 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의 비밀창고에서 먼 옛날의 해묵은 먼지가 가득내려앉은 글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가 소설인지, 일기인지도 구분 못하는 바보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구름위의 글자에 주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속의 불빛을 따라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해 낼 재간이 없었다. 황홀과 고통이 동시에 내 눈을 흔들어놓았다. 머리는 진동했고, 앞뒤 문맥을 재차 읽어보며, 어디까지가 그의 묘사이고, 어디까지가 행동인지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명확히, 묘사임을, 알아챈다 하더라도, 그의 문장은 그것을 믿게하는 힘이 있었다.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었고, 정교했다. 마치 중간중간 언급되는 시계조립의 교본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부분이 그렇진 않다. 아마 정말, 모든 표현과 묘사가 이러했다면, 정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거나,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 멀었어' 라면서 말이다. 어쨌든 요 근래에 소설하나에 이렇게 시간을 쏟은건 처음이었다. 날 위해서, 내가 원해서 들었던 책이건만, 곤욕을 치르기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매혹적이다. 마치 장미의 모습과 똑 닮았다. 아니, 마약과 닮았을까. 문장들을 읽어내는게 때로는 정말 고단한 일이 될지라도, 그 아름다운 표현은 이책을 끝까지 들기엔 충분했다.

 
이야기의 진행은 크게 조지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아버지인 하워드, 그리고 다시 그 하워드의 아버지로 향한다. 다만, 모든 묘사가 기억이라는 것에 근거하지만, 보편적인 현재는 조지가 되기에, 조지의 투병생활의 모습은 간간이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그리고 케너 대븐포트 목사의 [합리적 기계공] 이란 책의 내용또한 중간중간 계속해서 등장한다. (목사라는 관점과 글을 쓰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락없는 하워드의 아버지인데, 연도에서 다소 헷갈린다.)

네 아버지가 설교에서 늘 말하고 또 집에서 너에게 말하듯이 그 불확실성은 아름다운 것이며, 더 큰 확실성의 일부라는 것을 기뻐하라. 그리고 도끼가 장작을 물고 들어갈 때, 네 가슴 아픔과 네 영혼의 혼란이 곧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아직 인간이라는, 아직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해 열려 있다는,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그것을 받았다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라. 그리고 네 가슴 아픔에 화가 날 때는 기억하라. 너는 곧 죽어서 땅에 묻힐 것이라는 사실을. (89p)

적잖은 문장들이, 삶을 꿰뚫는 통찰위에 아름다운 무늬로 치장되있다. 책을 읽을 때, 이야기 전체가 가슴에 남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디를 접고, 어디를 밑줄그어야 할지 모를정도로 훌륭한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 있는데, 이 <팅커스>는 당연히 후자이다.  


<팅커스>를 아우르는 이 삼대의 남자들은, 아니 이 삼대가 이룬 모든 가정들은 오묘하고, 흐릿하다. 더욱이 조지의 아버지인 하워드,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보면 지독한 몽상가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사람들이다. 하워드가 기억하는 그의 목사아버지 또한 유령같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으며, 언젠가 하워드는 사라진 아버지를 찾으러 어느 물가에 종일 몸을 담그고 있다가, 발작증세를 얻게된다. 땜장이인 하워드는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갖고 조지가 도망쳤을 때도 오히려 조지가 멀리 갔기를 바랬고, 그의 발작을 견디다 못한 부인이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는 사실을 알고선, 멀지않은 날에, 물건들을 모두 팔아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집나간 그(하워드)가 단 한번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마주치는 기억을 생에 마지막에 떠올리는 조지의 마지막 회상-곧 이야기의 마지막-은 모든 것을 마무리짓는 묘한 절묘함이 있었다.

조지와 하워드, 그리고 하워드의 아버지가 모두 몽환적인 존재가 되는 근거는 어쩌면 단 하나이다. 이 모든것들이 조지의 기억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억이 풀어해쳐지는 과정에서 인칭은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그 모든것들도 기억이란ㅡ확실하고도 미지의 영역ㅡ에 것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인물들의 불확실성과 겨우 형태를 유지하지만 톡 건드리면 흩어질 가루들 같은 인물들이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팅커스>에서 그려지는 구체적인 묘사야 말로,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한 나에겐 '득'이기도 하고, '실'이기도 하다. 꽤나 구체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머릿속에 그려넣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 한숨이 나올때도 있다. 더불어,<팅커스> 문장은 때론, 그 길이에, 호흡이 압도 당할때가 있다. 들숨과 날숨을 어디에서 템포를 맞춰야 할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독자는, 그 문장 사이에서, 문장과 문장사이가 아닌 하나의 문장이 이뤄지는 그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잃는게 이 '폴 하딩' 이란 작가가 의도하는 게 아닐까? 때론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기억이란 공간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는건 어쩌면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인지하고있지 못할 뿐이지.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쉽진 않았지만, 즐겁기도 했던 책이다. 언젠가 한번 다시 들춰볼 것 같다. 아마 그때쯤이면 지금 희미하게 이해했던 순간들을 조금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둔한 눈으로는ㅡ물주머니와 신경, 기적 그 자체, 고움 그 자체, 빛을 포착하는 것. 그러나 본질은 숲도 빛도 어둠도 아니야. 내 서툰 눈길에, 내 둔한 관심에 흩어져버리는 다른 어떤 것이야. 잎과 빛과 그림자와 물결치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누비이불이 혹시 갈라지면,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잠깐 볼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라. 자꾸 움직이다 꿰맨 곳이 저절로 느슨해질지도 모르지. 누가 느슨하게 풀어줄지도 모르고 그것을 꿰맨 존재가 잘못해서 길가의 사탕단풍 잎들 속에 헐렁한 바늘땀을 하나 남겨놓았을지도 몰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ㅡ별들의 빛, 중력, 어둠일까ㅡ실의 그 땀 하나가 바람에 움직이다 어떻게 헐거워진 거야. 바람은 늘 하얀 봉오리와 녹색 잎과 핏빛과 주황색 잎과 헐벗은 가지를 걱정하며 가만있지를 못하잖아.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이 세상을 짠 재료 가운데 두 조각 사이가 헐거워져, 어쩌면 거기에 딱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구멍이 생겼는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아주 운이 좋아서 이 서랍이 달린 수레에 앉아 반짝이는 잎들 사이에서 그 구멍을 발견하고, 아주 민첩해서 은빛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고, 아주 용감해서 그 찢어진 틈에 내 손가락을 집어넣는거야. 손이 닿기만 해도 큰 고요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 구멍에. (67p)

그것은 특별하진 않을것이다. 마치 위의 부분처럼, 딱 내 눈이 자리잡을 만한 단어사이의 여백을 잡아내는 일. 그래서 그 사이를 이어주는 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뿐일지도 모를일이다. 

이왕 책을 펼쳐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라는 구절과 마주쳤다면, 이제부터는 아예 딴 세상이라 생각하고 신발 끈을 조여맬 것, 아니, 신발을 벗어버릴 것 _ 정영목(번역가)

심지어 새 둥지를 만다는 방법에 관한 짧은 구절조차 눈부시다 _ 퍼블리셔스 위클리

모두가 맞는 말이다. 나에게 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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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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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6.25 참전용사들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갖고, 어떤 생각을 할까. 간간히 북측의 도발이 있을지언정 결국은 서로 밀고 당기는 남북한의 휴전이 계속됨으로 인해 젊은세대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전쟁과 휴전, 이산가족,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스러진 수많은 영혼들에게 무덤덤해 질것이다. 겪지도 못한일에 대해 관심조차 사라져가는 것이다. 물론 이 얘긴 뜬구름 잡는 얘기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느냐면, 무기 판매를 비롯한, 냉전시대의 패권에 관하든 어쨌든 과연 6.25 해외참전용사들을 생각해 본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때문이다. 이 <울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의 시기에, 미국에서 징병을 기다려야만 했던 한 주인공의 격정과 분노에 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굳이 어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염두해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불안과 개인적 분노를 함께 떠안아야만 했던 한 평범한 청년의 이야기다.  

수없이 쏟아져나오는 책들중에 한국전쟁이 언급되는게 새삼 새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혼돈의 시대에 멀리 떨어진 땅덩이에서 그 시대적 불안을 떼어내지못하고 살아가야만 했던, 그럼에도 그 불안에 잠식되지 않았던 한 청년의 이야기는, 6.25 라는 화두로 친근하면서도, 동시에 저 먼 미국땅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유대인 청년의 새로운 이면이기에 낯설고 새로웠다. 그 전쟁의 참상가운데서 한국 청년이 아닌, 미국 청년이 바라보는 전쟁의 시대는 개인에게 어떤 혼란을 가져다 주었는지. 이책은 그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롭게 읽혀나갔다.  

앞서 전쟁이란 단어를 계속 운운했지만, 이 <울분>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먼 타국에서 그 시대를 살아갔던 한 청춘의 격정적 순간의 기록이다. 때로는 아귀가 딱 들어맞는 블럭같은 논리로, 때로는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로 불꽃같이 타올랐던 청춘의 기록말이다.  

 

과잉된 걱정으로 목을 졸랐던 아버지를 향한 울분 

"내 일은 닭 털을 뽑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장까지 제거해야 했다. 똥구멍을 조금 째서 열고 손가락을 위로 집어넣어 내장을 잡은 다음 당겨 빼면 된다. 나는 그 일이 싫었다.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기쁜 마음으로 배운 것 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 (p17) 

마커스의 아버지는 매우 정직하게 자신의 정육점을 운영한다. 그 양심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운영은 마커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고, 비록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마커스에게는 구역질나고, 때론 부끄러운 일일지라도 그 '정직함'만은 마커스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허나, 그런 아버지는 마커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극도의 걱정과 간섭을 하게된다. 심지어 이른 귀가시간에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문까지 걸어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마커스는 그저 열심히 학업에 열중했을 뿐인데도.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저씨 이야기를 믿었다는 거로군요. 아버지가 평생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고, 가게 뒤에서 무릎을 꿇고 변기를 고치고 있는 배관공 말을 믿은 거예요!" (p25) 

그런 아버지의 과도한 관심과 걱정, 간섭 때문에 마커스는 첫번째 들어간 대학에서 더욱 멀리 떨어진 곳으로 편입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실제적인 거리는 벗어낫을지언정, 그 아버지에게서 배워온 신념과 정직함은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주 작은 일, 아주 사소한 일이 정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요. 아버지가 그걸 증명하시네요!" (p26) 

마커스 스스로가 말했듯, 아주 작은일, 사소한 일로 시작된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과, 그렇게 사소하게 물려받은 아버지의 내력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마커스의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신념을 강요하는 대학을 향한 울분  

"내가 나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입증하려면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101p)  

마커스는 촉망받는 학생이었고,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하며 올곧았지만,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졸업을 하기 위해서 강압적인 채플수업을 끔찍히도 싫어했고, 자신의 이성교제를 좌시하지 않으려하며, 종교를 강요하는 학생과장과 언쟁을 벌여야만 했다. 게다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모독한 친구들 때문에 기숙사 방을 옮기는 일을 그에게 납득시켜야 하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인 유대교부터, 강압적인 종교수업까지 그는 학생과장과 언쟁을 벌이고 말을 비틀며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학생과장은 그에게 더욱 더 엄격한 학교의 편협한 룰을 강요했다. 학교는 그에게 종교를 강요할 권리도, 이성교제를 좌지우지할 권리도 있지 않았음에도, 그의 행동, 정신 깊숙히 침투해서 자신들의 신념대로 행동하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불타는 청춘은 수긍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것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 순간 토해버렸다... (중략) 나는 아버지나 룸메이트들과 전투를 벌일 배짱이 없었듯 학생과장과 전투를 벌일 배짱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약한 사람임에도 나는 전투를 하고 말았다." (121p) 

학생과장에게 불려가 몇번의 언쟁을 하는 도중, 결국 마커스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달라붙어있던 그 끔찍한 종교에 대한 강요와, 이성교제에 대한 간섭,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을 학생과장에게, 학교에게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에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때까지 억지로 참고 억눌렀던 울분이 더이상 견디지 못해, 깊게 펌프질하는 심장에서부터 입을 통로삼아 쏟아져 나온 것이다. 

 

사랑을 모독하는 것에 대한 울분  

"청년들은 흔히 파란 불알이라고 알려진 통증, 즉 고환 주위로 넓게 퍼지는 지지고 찌르고 조이는 듯한 통증이 점차 사그라질 때까지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며 다닐 수도 있었다. 와인스버그의 주말 밤이면 파란 불알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예컨대 열시에서 자정 사이에는 수십명이 고통을 겪었다. 리비도라는 면에서 보자면 인생에서 그 수행 능력이 절정에 이른 나이임에도, 그 병의 가장 유쾌하고 자연스러운 치료법인 사정은 남학생의 성애경력에서는 늘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마는 미증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p59)    

출처도 알수없는 성지식이 실제적으로 발현되기도 하는 일반적인 시기. 그 중심에 마커스 또한 서있었으며, 그또한 여느 청춘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혼돈과, 순수한 사랑의 사이에서 줄다리타던 나날에, 마커스는 올리비아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게되지만 데이트에서 올리비아가 해준 펠라치오를 둘러싸고 많은 혼란에 휩싸인다. 자신또한 동정이었던 만큼, 거부하지 않고 자신에게 행해준 올리비아에 대해 마커스는 더욱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타인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로인해 올리비아까지 폄하게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마커스가 결국 원한것은 그녀에 대한 비난은 아니었다. 그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녀를 원했고, 그만큼 사랑했다.

"나는 엘윈이 올리비아를 씨발년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내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p83)

 

모독된 애인을 의심하는 자신에 대한 울분   

"나는 그애가 두려웠다. 나는 아버지만큼이나 나빴다. 내가 바로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를 뉴저지에 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안에 나도 둘러싸이고, 불길한 예감에 나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하이오에서 나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p78)  

마커스. 너는 방금 어른이 된게 아니야. 아마 어렸을 때부터 평생 어른이었을거야. '아이' 인 너를 상상할수가 없어. 너는 틀림없이 네 주위의 애들 같은 아이는 절대 아니었을 거야. (p80) 

하지만 올리비아는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손목에 선명했고, 그것또한 마커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 성실하고 올곧았던 마커스에게 그것은 그 올리비아의 인간됨을 판단하는 척도에 포함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첫경험에 대한 의심과, 자살에 대한 경험을 통해 그녀를 잠시 멀리하게 되면서도, 그는 그녀를 원하고, 갈망한다. 다만, 그런 마커스의 혼란만큼이나 올리비아의 내부도 혼란스러워서, 그들은 때로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단념하다가도, 다시 만나게 된다. 마커스는 그렇게 올리비아를 꽉 쥐어잡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했다. 자신의 혼란을 기어이 밖으로 끄집어내 그들 사이의 벽을 만든것을.. 그는 후회하고, 되돌아가려고 했다. 자신의 그런 혼란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친구들에 대해 경멸을 느꼈으며, 그렇게 이야기를 꺼낸것조차 후회했다. 마커스는 실은, 그런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마커스또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 애의 글을 마셨다. 그애의 이름을 먹었다. 편지를 전부 먹고 싶은 걸 참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81p) 

더 얘기해줘. 더 듣고 싶어. 왜? 너를 무척 좋아하니까. 너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어. 무엇이 너를 너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이제 대학을 들어간지 채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간들, 자신과 사회, 종교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는 청춘의 몸부림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더 옮은 행동을 하기위해서 부단히 고민하고 애를 쓰지만.. 마커스는 결국은 그러지 못했던 듯 싶다. 나이를 한참 먹어도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제대로 분간하는 것이 그 어떤것보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모든것이 혼란스럽고, 세상을,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힘든 시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생은, 때로는 그런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그래서 그애의 칼자국 난 손목을 매의 눈을 가진 어머니의 시야 밖에 두기 위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ㅡ다시말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다. 또."(153p) 

 

먼저 살아냈던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치려고 했던 사실들.

법률가가 되는 것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피가 잔뜩 묻어 악취를 풍기는 앞치마ㅡ피, 기름, 내장 조각 등 손을 닦을 때마다 온갖 것이 묻었다ㅡ를 두르고 일을 하며 보내는 삶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뿐이었다. (47p) 

아버지가 운영하는 정육점에서 멀어지는 길. 대학기간동안 징병을 유예받고, 혹은 징병된다 하더라도 ROTC를 통해 장교로 좀 더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높히는 것. 이것또한 마커스의 중요한 화두였다. 다만 그가 그것을 항상 염두해두고 감정을 다스릴만큼 이성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흠일 것이다.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감정은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수 있어." (185p) 
 

어쩌면, 그런 청춘의 격한 감정과, 순간의 작은 분노들로 많은 것들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부모들은 알고있었기에, 그의 아버지도 어쩌면 그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그 이전에 2차대전서 돌아오지 못한 친척들을 경험하기도 했으니) 그를 그토록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래 말처럼 어찌하겠는가. 그는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을. 그 시기에, 그 순간에, 마커스는 절대 알지 못했을 작지만 중요한 사실들을. 


"채플을 견디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면 마커스는 그로부터 열한달 뒤 와인스버그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랬다면 그의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려했던 것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239p)
   


과거의 기억만이 존재할 때

"인생의 매 순간을 그 자디잔 구성 요소까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나만의 내세일까? 각자의 삶이 독특하듯 각자의 내세도 독특한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사람의 내세와는 다른, 지울 수 없는 지문 같은 내세를갖게 되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삶에서처럼 나는 오직 있는 것만 알 뿐이고, 죽음에서는 있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바뀔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삶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사에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 삶이 붙어 있게 된다. 아니면, 역시 이것도,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p64)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살아온 생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게다가 그것도 모르핀이라는 약물을 통해서 잠시나마 더듬어 볼 수 있는 처지의 그는 애처롭다. 그에게는 모든것이 너무 일렀다. 그리고 그 시기는 너무 좋지 않았다. 그는 그 기억이 끝나는 그 순간에, 세상에 모든것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ㅡ기억 위에 기억, 오로지 기억뿐ㅡ묻는다면 물론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여기'와 '지금'이 존재하지 않듯 '당신'도 '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억된 과거뿐이기 때문이다. 복원된 과거가 아니다. 그러니까 감각의 영역이 직접 다시 살아내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되풀이될 뿐이다.(p66)
  

머나먼 땅에서 조금의 북진을 위해서 사천명의 연합군의 죽고, 불구가 되고, 다치는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총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그 마을에서? 부모님이 그렇게 지나치게 간섭하던 것이 결국, 이런 사태를 짐작했으리란걸 알 수 있었을까? 권력이 자신의 신념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육체적 증거가 사랑을 좌우해서는 안되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청춘의 격분도 항상 낭만적으로 치닫지는 않는 다는 것을.... 

하지만 도저히 마커스를 어리석다고 바라보진 못하겠다. 아니, 우러러 보아진다. 

(내 앞에 그런 상황이 놓여져있을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진 못했을 테니깐.)

"나는 엘윈을 이해하지 못했다. 플러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p85)  

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인것인가! 하지만 애처롭게도, 마커스에게는 그럴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먼 타지에서 일어나는 포탄의 아우성은 마커스에게 닿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청춘의 혈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쨌든 청춘이라함은 모름지기 불의에 분노하고, 변화를 선도하고, 거침없이 정의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비록 그것이 어림없는 일이라도, 때로는 논리에서 이탈해도, 그것이야말로 치기어린 젊음의 상징아니겠는가? 우리시대는 점점 이성으로 진작에 무장한 청춘만이 배출되고 있다. 나라고 다를쏘냐. 이것은 분명 비극이다. 울분을 엄한데다만 토할 줄 아는 세상. 불의와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 익숙해지는 세상. 그럼에도 마커스의 울분은 시대를 관통한다. 어딘가에(어쩌면 예상보다 많은 곳에서) 분명 그와 같은 불타는 청춘들이 울분을 머금고 있을테니깐. 그래도 청춘이라면, 그래야 하니깐. 그들을 걱정하는 기성세대또한 그 시기를 그렇게 통과했을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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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소리 마마 밀리언셀러 클럽 4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등장인물 모두가 어딘가 묘하게 보통사람들처럼은 보이지 않는 생활을 하고있다. 보육원에서 길러준 이와 길러진 이의 모자관계같은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주변머리없는 나는 이들이 주인공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길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다. 그 살인자는 어떤 목적으로... 그것이 어떤 목적이었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큰 틀이다. 추리를 해가면서 읽는것보단, 주인공의 심리와 그녀 주변을 이루는 인간들의 허영과 이기를 좇는게 묘미지만, 어쨌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면과 외면의 진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하나하나 드러나기때문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고, 덮어야 할지 머뭇거려진다. 역시 '추리해가면서 읽게되는 책'의 서평을 쓰는 일은 더 어려운듯 싶다.

 
살인자. 그녀의 정신은 뒤틀려있다. 자신의 엄마를 알지 못한다. 엄마의 유품이라고 누군가 알려준 낡은 구두 한켤레만이 그녀의 정신적 엄마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의 연줄을 이용하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면 아주 깨끗한 노트로 살 수 있으니까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의 인간관계를 이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번거로운 일이 생기거나 귀찮아지면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 그래, 그런 거야 하고 아이코는 간단하게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아이코가 살면서 깨달은 지혜였다."
(p142-143)


마츠시마 아이코, 그녀는 태어나서 여덟살까지 창녀촌에서 길러졌다. 누구도 그녀를 따뜻하게 길러주지 않았다. 후에 그녀는 보육원에서 자라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평범한 소녀같은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험하게 길러졌었다. 자신과 이어진 것은 오직, 엄마의 유품이라 들었던 낡은구두 한켤레. 때때로 그녀는 구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가시덤불 숲에서 길러진 그녀는 살육과 성, 그 어느것에도 어떤 분별력을 갖지 못한다. 자신이 필요한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존재들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혹은 자신의 정신적 쾌감을 덧붙여 수단을 선택하기도 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어느시점에서, 그녀가 더이상 그럴 수 없을만큼의 위기가 다가온다..

 
그녀에게 결핍된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 응당 받아야할 권리가 있는 따뜻한 사랑, 관심... 그것을 온전히 남들만큼 받지못한 한 인간이 닿을수 있는 극한지점을 '마츠시마 아이코'를 통해서 보여준다. 사랑받지 못한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싶은 한 인물. 그 과거의 상처와, 그로인해 지울 수 없었던 뒤틀린 정신세계를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영혼이 살아가는 잔혹하고 슬픈 이야기. 맑은 방법으로 과거를 끌어안지 못한 채, 어두운 방법을 통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었을 그녀의 슬픈 이야기.


자신이 의도하지않게 세워져버린 과거. 그것이 아무리 억울하고 분에 넘친다 한들..
한번 세워진 시간은, 한번 올라가버린 시간이라는 계단은 다시는 내려올 수 없다..
그것은 다음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전 층계가 사라져버리는 계단이기에.

 
"인간이라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토대로 지금의 정신 작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거에 얽매여서는 발전이 없죠." (p231)


우리는 그저 앞에 남아있는 허들을 넘을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걸려넘어졌던 허들까지 다시 세워놓을 순 없으니깐...그 누구도... 어쨌든 누군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아이코와 같은 미련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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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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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시간에 걸쳐 길들여진 인간은 길이 열려도 머뭇거린다. 동물은 오래도록 자신을 돌봐준 인간을 제 아비처럼 따른다. 특히나 집단에서는, 자신의 곁에있던 동종(同種)이 그 아비라는 것에게 통해 어떤 참극을 당하더라도 그 화가 자신의 피부에 닿지 않는다면, 그 참극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안락함이 보장되어있다고 '착각' 한다면 그것은 더 심할것이고, 설령 참극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항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지금에 머무르는 것보다 위험을 수반한다고 판단한다면 대부분은 그 현재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택한다. 인류는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 해를 박멸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두려움때문에 역사상 지금껏 많은 독재와 불합리한 통치를 허용해왔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의 진심을 발견하기위해 어디까지 까봐야할지 모르고, 설령 모든것을 발랑 까버린다 해도 그 속을 확단할 수 없는 불투명한 인간의 특성이 만들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독재'가 결국 개인의 어느 바닥에서 발현되는지부터, 인류의 어디까지 침몰시킬 수 있는지 <염소의 축제>는 매우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소설기법으로 펼쳐낸다.   

 

세개이면서 하나인 이야기의 시작 - 세 출발점에서 한 트랙으로 향하기

상처를 봉인한 붕대를 풀어내기위한 단 하루 - 소설의 시작은 우라니아가 모국 도미니카로 잠시 돌아오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일인것임을 독자는 어느정도 지각 할 수 있지만, 대체 무슨영문으로 수십년에 걸친 가족의 연락들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는지는 이제 막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14세에 고국을 떠났던 한 소녀가 평생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상처는 대체 무엇인것인가. 죽어가다 시피하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그에게, 잔인한 과거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일을 우라니아는 왜 할 수 밖에 없는지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우라니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우라니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부지런한 바보가 가장 두려운 존재 - 바보란, 바보천치가 아니다. 악을 악인지 모르고(혹은 간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트루히요이다. 우라니아가 떠난 도미니카. 우라니아의 현재에서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 독재자 트루히요는 잠에서 깨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의 움직임은 딱 필요한만큼 움직이고, 절제되어있다. 부하를 판단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으며, 대중앞의 독재자들이 그렇듯 외향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견고해 보이는 독재체제가 서서히 무너질 조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육신또한 그가 사랑해마다않는 근본부터 무너져 내려가고 있으며, 그는 그 두가지 모두를 애써 부정하려고 한다.

목줄을 끊어버린 신념이 발산하는 거사 - 트루히요를 중심으로 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 그날 밤. 독재자를 처단하고 기꺼이 자신들은 죽음을 무릎쓸 준비가 돼있는 세명의 도미니카인과 한명의 터키인은 시보레 비스케인 안에서 자신들의 무장을 재정비하며, 과거를 상기하며, 그 백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풀어내는 과거는, 독재자가 회상하는 과거와 극명하게 대립되는 어둠속에 뭍혀야만 했던 일들을 드러낸다.

몇 읽어본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은 읽기가 쉽지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한심하겠지만,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것은.. 1권의 초중반까지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인물들의 행적을 그리느라, 머리가 과도하게 분주했기 때문이다.(어찌보면 이후에도 더러 헷갈려했을지 모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독자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얼마나 사시나무 떨듯 떨 수 밖에 없는지는 조금 이해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코 <염소의 축제>가 <백년동안의 고독>만큼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름의 복잡성으로 따지자면 새발의 피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동일인물에 대하여 애칭을 부르거나, 줄여부르거나, 조롱섞인 별명을 뒤섞어 부를때가 종종 있기때문에 (이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닌 독자라면 한번쯤, 독재자 트루히요 를 중심으로 그 계보도를 그려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누군가는 이것을 다소 귀찮아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그렇게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아니, 그렇게라도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당신이 이땅에서 독재를 경험했건, 교과서로 배웠건. 그 과거들은 아직도 현재에 걸처져 있으니깐.   

-대략적 주요 인물들 구성도. 대충 그려봤던것을 정리해 봤는데, 책을 한번 완독했다면 쓸모없을 듯 하다-

이름을 따라가느라 책장을 앞으로 다시 넘겨야 했던 초중반부의 시간을 벗어나더니 서서히 책장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회상을 통해 군데군데서 드러났던 독재의 어두운 배경은, 그들이 트루히요의 차량을 발견하면서부터 모든것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그 개조된 시보레 비스케인을 따라서 책페이지도 빠르게 달리게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모든것을 따라가는 것은 큰 기쁨이었고 희열이었다. 그 지난한 독재의 끝을 향해 달리는 시보레 비스케인 속에 나또한 탑승해 있던 것이다. 가자, 가자, 축제를 열기 위해! 

 

'독재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갖는 입체성 - 퍼즐로 구성된 트루히요 독재의 역사

해설에서도 자세히 설명돼듯이, 후반부에 가서는 그 순서가 조금 바뀌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염소의 축제>는 세개의 시간축에서 각각 다른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우라니아가 이끄는 장은 독재가 한참전에 끝난 시점에서, 트루히요가 이끄는 장은 그의 견고한 독재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살아남은 자로 내세우자면) 안토니오 임베르트가 그 영광의 거사를 열게되는 그날부터의 시점. 그 거리는 존재하되 모든 시간축은 각각의 회상을 필연적으로 등장시키며, 세개의 시간축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가는 길의 부족한 설명들을 채워준다.    

문득문득, 상대적으로 묘사의 비중이 적은 인물들도 적잖이 등장하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우라니아와 그의 아버지, 트루히요와 그의 첩보부대장을 비롯한 중심인물들, 안토니오 임베르트를 비롯해서 같은 자동차안에서 매복해있던 세명의 인물들에 집중한다. 물론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구조는 아마도,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하는 자들'의 특성을 낱낱히 묘사하려는 그의 시도였을 것이고, 크고 다양한 사건들에 집착하는 것 보다는 중심인물들의 심리를 바닥부터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수십년이 지난 도미니카 염소의 축제를 드러내는 가장 적절하고 흥미로운 방법이라 판단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인물의 행동과 심리묘사가 긴것에 대하여 부담을 갖는 독자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것이, 각 인물들이 묘사하는 현재는 적절한 시기에 과거의 사건들을 차용해서 연결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이야기의 주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적인 특성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점은, 이런 인물들이 이야기를 진행해나갈때, 마치 거울에 비친 또 하나의 실체없는 존재가 말을 걸듯, 내면의 존재하는 이중적인 자아의 모습을 인칭을 바꿔가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점이다. 이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바라보며 그 이중성을 해석해주는 것보다 인물안에서의 더 큰 충돌을 부각시키며, 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강조했다. 한 인물을 줄여부르거나, 우스꽝스러운 별명만으로 부름으로써 그 인물의 특성과 다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들은, 독재자를 증오하면서도 찬양하는, 시민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상징이라도 하듯.   

 

하루를 통해 드러나는 축제의 모든 것 - 수십대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축제의 준비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은 한 여성의 삶을 단 하루로 표현하는 것이 그 기원이었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델러웨이 부인>을 기가막히게 사용했다. 결국 추구하는 방향과, 어긋남은 분명 존재하지만, <염소의 축제>와 앞서 언급한 소설들은 비슷한 점을 갖기도 한다. '오래도록 세월의 먼지에 뒤덮힌 인간을 표현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의 묘사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이들은 결국, 인간의 모습은 겹겹히 쌓여지고 흩날리는 시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 '하루'를 통해, 낯설면서도 파급력있게 보여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 수많은 과거의 회상은, 지금까지의 인물을 파악하고, 하루를 통해서는 누수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채워주며, '바르가스 요사'는 각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루에 초점을 두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간결한 글에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 압축을 사용자가 손실없이 풀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역사적 지식이 덧붙여지면 좋을 것이다.) 독자는 그 압축된 독재의 세월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풀어가며 분노하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35년만에 고향땅을 밟는 우라니아의 시간도, 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트루히요의 시간도, 영원같은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축제의 주최자들도, 모두 하루라는 시간에 압축되어 표현된다. 물론 그들 각자의 현재의 시간속에서 수많은 과거가 드러나고 상기되며, 그 과거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의 회상은 그들의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는것과 동시에 그들각자가 나아갈 길의 지도를 독자가 그려볼 수 있게해준다.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그들이 갖는, 표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단 하루이다. 이것들, 즉 과거와 어우러진 현재의 하루는 그들 한명 한명을 밀도있게 그려내는데 아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인간은 천리안을 갖지 못했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면 뒤를 보지 못한다. 세개의 시간축과 그로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앵글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들이 갖는 현재성의 하루는 결국 축제를 향하기 위해 내달리는 고속도로이고, (회상으로써든, 이어지는 시간이든) 교차점이 되어야만 했다. 다양한 인물에서 바라보는 축제는 곧, 독자에게 다층적인 이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충분한 형식을 갖추게 되고, 보다 균형잡힌 시각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개인을 벗어난 완벽함에 대한 열망이 만드는 비극 - 완벽한 독재자의 이중성과 한계 

트루히요는 자신의 해병대 시절, 교관에게서 '분명 성공할 것' 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교관의 말대로 그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공아닌 성공을 거머쥐었다. 자신이 갖고있는 완벽히 숙달된 철저함과 예리함, 냉정함은 그의 그런 한계적인 성공을 완성하는데 지대한 밑받침이 되었다. 한장, 한장 이어지는 그의 기계와 같은 하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극명히 보여주는데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갖는 특성은, 그 자신에게 병적으로 완벽함과 철저함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부터 그 휘하의 부하들까지 모두 군인다운 체격과 복장을 갖추길 원한다. 그리고 길가의 오물에 대하여 히스테리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이것은 곧, 누군가를 통제하려하는 자들이 외모에서부터 압박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선망하는 개인의 모습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꼴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속에 감쳐둔(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오물섞인 뜨거운 피를 뒤집어보이는데 필요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각잡힌 군복안에 감쳐둔 그의 본능은 어떠한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 경제적 재건과 일자리를 보장하고, 아이티의 약탈을 막는 것을 구실로 그는 그에 대항하거나 그런 낌새라도 있는 인물들을 잡아 처형하고, 무수한 죄없는 여성들을 범한다. 이는 바로, 그 스스로 그가 시민들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더러운 욕망을 가진 의붓아버지임을 제 스스로 상징하는 꼴이다. 태앙이 비추는 곳에서의 그는 그의 추종세력들과 눈가려진채 목줄에 걸린 시민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는 명민한 모습이지만, 그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짙게깔리면 그의 억눌렀던 본성은 어딘가로 무분별하게 배출할 곳을 찾는다. 하수도에서 넘쳐나온 오물에 그가 그렇게도 신경이 곤두섰던 것은, 안으로 흘러야만 하는 더러움이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하수도의 모습이 제 모습과 하등 다를게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제외하곤 모든 게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권 20p)

세월은 그의 견고한 '독재'라는 강철벽의 틈에서 이끼가 자라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의 육신의 내부(전립선에서 비롯되는)에서 바래지는 그의 쇄락을 막지 못한다.  또 그가 아무리 샤워를 하고 군복을 갈아입는다해도, 그는 결국 군데군데 망가진 옷걸이에 비할 바 없는 것이다. 그 어떤것에도 영원이란 없을진데, 그는 타자를 영원히 구속시키고 자신의 발 아래 두기를 원하며, 제 육신또한 영원히 제 본능적인 욕구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삶을 따스하게 하고, 인류를 번영시키는 시간들 또한 바람같이 지나갈 수 밖에 없을지인데 하물며 도리에 어긋나는 상징의 육신또한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차라리 그가 악마와의 계약을 했다고 믿고있었던것은 아닐지 의심될 정도이다.  

"한 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2권 47p,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 인용)

그 자신을 감싸는 육신의 쇄락이, 그 육신이 통제하는 많은것들의 이탈과 맞닿아 있는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 도미니카라는 국가에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자신의 고장난 육신을 부정하기 위해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그런 독재를 고속으로 순식간에 끝내버렸으니 말이다.   

염소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속성, 즉 자유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1권 251p)   

 

 

비뚤어진 '아버지 상' 으로 바라본 트루히요 - '새로운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최고 지도자'

아직 부모로서의 입장은 되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종종 비뚤어진 (안타까운) 부모의 상을 쉽지않게 발견한다.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세상에 내놓은 한 인간에 대한 보호와 걱정이고,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이루지못한 삶에 대한 대리만족인가. 그래서 어디까지 그들의 인생을 보완하고, 어디까지 그들의 통제에 따르기를 바라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의 부모들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내면의 목적을 띄고,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모든 부모를 존경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이를 먹은 어른들을 모두 존경할 수 없는것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라니아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양심의 가책, 트루히요의 자식 람피스에게서 지키려던 옛 모습을 잊고(상황이 바뀌었으니) 결국, 그것이 딸과 가족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라 스스로를 애써 포장하며 우라니아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친다. 이것은 한 부모가 개인으로써 갖는 '소유된 자식' 이라는 인식을 통한 비극의 극치이다. 그것은 결국 한 인간의 성장을 영원히 멈추게 했으며, 영원한 상처를 짊어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트루히요가 생각한 '국가의 아버지 상'은 한 개인에 국한되었어야만 했던 '아버지 상'의 비뚤어짐의 최극단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파멸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에 대항하는 많은 무고한 이들과, 한 나라 국민들의 절망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인류는 집단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지도자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지도자에게 자신들을 통제할 권한을 쥐어준다. 언제부턴가, (아마도 그 처음부터) 힘을 가진 자들은, 그가 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을, 한 집단을 소유하고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모든 독재정권 아래에 있는 비극은,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소수의 '능력자'들을 그들의 대표자로 방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독재정권이 만들어지는 '폭력성'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그런 착각을 범하고, 실행한다. 트루히요는 그 많은 이들중에 하나일 뿐이다.  

트루히요의 가장 큰 오류와 잘못은, 자신이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임을 자신한 것이다. 그것은 곧 비뚤어진 아버지 상이고, 모든것을 소유하려 든다. 그 철저하고 날카로운 하루를 만들 수 있는 독재자또한 덜어내지 못하는 성적욕망까지도 말이다. 트루히요 휘하의 많은 인물들은 트루히요를 마치 아버지처럼 받든다. 가부장적인 체제에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그들은 자신의 모든것이 담긴것들을 내어주고, 감히 거기에 대항하지 못한다. 언젠가 그 벅찬 통제가 극에 다랐을 때, 누군가는 거기에 반기를 들지만, 누군가는 그 반기를 조용히 내린다. 아구스틴 카브랄은 그런 불쌍한 영혼의 한 일면이고, 그의 딸은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최대의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로만 장군은 불쌍하고 가련한 그 영혼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잠식당한 인물이며, 가장 큰 해를 만든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보이는 것들이 있었겠지만, 읽고 듣고 조사하고 생각한 후에 너는 정부의 선전과 정보 부족으로 짓밟혔고, 교리와 고립으로 짐승처럼 되었으며, 공포와 비굴과 아부가 습관이 되어 자유의지나 심지어 호기심마저 상실한 나머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했다는 걸 알게되었지.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1권 99p)   

 

 

 

타인의 통제에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사태 

이 부분은 이 소설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군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대중들이 독재를 바꿀 수 없고, 불합리한 시대를 쉽게 뒤엎을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무기가 주어지지 않아서뿐만이 아니라, 그 감히 개인이 맞설 수 없는 독재에 길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시민들은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트루히요라는 강압적인 사공이 이끄는 방향으로 무조건 노를 저어야 했다.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안정이 보장되는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은 큰 불평없이 노를 젓는다. 옆집의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죄목으로 끌려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면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히 직접적인 손해가 자신에게 오지않고(설령 오는자는 이미 그 어떤 조치를 취할수 없을테니 무의미하겠다),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침묵하기만 한다면 어느정도의 안전은 보장된다. 그 안전만 보장된다면 독재든 아니든 세상은 살만하게 보이고, 한 권력자의 독재는 당연히 체제와 정책을 안정시켜준다. 그리고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언론은 곧, 그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굴절된 안경을 이식해주기에 이른다.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로만 장군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오랜시간에 걸쳐 세포하나하나까지 트루히요의 지배하에 들어가있던 로만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길들여진 개가 목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있는 모습과 똑 닮아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회가 지나갈 때 까지도 그를 지배했던 한 인물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아래서 터지는 폭발물을 맞듯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곧 그것은 트루히요를 처단함에 있어 직/간접적 관련된 인물들과 또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을 헤어나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고, 도미니카라는 국가 전체의 민주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목할점은, 결국 트루히요의 죽음을 예찬할 시민들조차 바로 뛰쳐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필연적인 이유들 가진다. 먼저 트루히요가 없음에도 군부세력을 그의 아들 람피스가 거머쥐고 있는 점, 또한 트루히요의 갑작스런 죽음에 어안이벙벙해져서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전자는 물론 수긍이 가거니와, 후자는 실제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에서도 엿볼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책에서 언급하기를, 일본이 2차대전서 항복을 하고 한국을 떠남에도, 국민들은, 그 예고없던 독립과, 아직 확실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불확실성 때문에 익히 알고있듯이, 독립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지만, 비극은 다른곳에 있다. 아마 시민들은 로만 장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목에 채워져있던 목줄에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 자신이 내다을 수 있는 최대의 거리, 최대의 행동, 딱 거기까지, 시민들은 몸에 깊숙이 베어있었을 것이란 점. 결과적으론, 트루히요가 어차피 암살된 후에 이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은 특별히 당장 큰 문제를 야기하거나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골수 트루히요 추종자들을 제외한) 시민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들은 결국 영웅들과 그 관계자들을 더 빨리, 혹은 영원히 지켜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이유들을 구성하진 않았을까?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독재정권체제'가 주는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이 그린 테두리 안에 자신들의 힘을 한정하며,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방송을 받아들이며 결국, 독재에 저항하기를 머뭇거리고, 포기했을 모습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들의 비극을 방관한 셈이며, 도미니카의 독재체제를 연장시켰다고 말하면 무리가 있을까? 굳이 독재가 아니더라도, 이런식으로 정치에 넌덜머리를 내며 지레 저항을 포기하는 일은 부패한 수많은(이제는 그 경중으로 판단하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한다. 현시대에서 국가는 분명 존재하며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그런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모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기에 누군가를 대표로 뽑을 수 밖에 없는 그 자리를, '목소리의 대표'가 아니라 그것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지당한 사실이 되어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세태에서, 시민들은 결코 불의에 길들여저서는 안된다. 저항하지 않는 것과 길들여지는것은 아주 중대한 차이를 지닌다. 매번 뒤통수를 맞는 투표자들은, 지난한 싸움에서 결코 길들여져서는 안된다.    

그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비록 총통이 몸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이 계속해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2권 226p) 

 

어디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앞서 말한것과 거의 흡사하면서 약간 다른 이 질문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동침을 하기도했지만, 가톨릭교는 결국 트루히요의 발목을 잡는다. 시보레 비스케인에 타고있던 네명의 인물중 하나인 살바도르는 가톨릭의 충실한 신자이다. 살육을 저지르는 자를 살해해도 되는지 그는 종교로써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결국은 해답을 찾아, 신념을 갖고 종교를 등에 업은채로 전진하는데, 트루히요는 소위 나신교가 갖는 부정적인 결과의 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것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종교가 됐든 잘못된 극단의 길로 간다면 어떤것이든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트루히요라는 신의 모습을 띈 잘못된 인간을 떠받들던 이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그들중 누군가는 트루히요가 제거된 후에도 호위호식하며 살지언정) 진정 대의를 위한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지만 대의라고 포장한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동일(죽음)할지라도, 그 가치가 정반대를 향하는 것이다.  

결국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길들여져야 하는것은,(나 자신이든 종교든, 전혀 길들여지지 않든) 개인이 판단할 몫이지만, 그것은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함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깊이 새겨진 상처는 흉터가 된다. - 파괴된 모든 시민의 처녀성 

트루히요 휘하에 있던 나약한 인물들은, 보편적인 체격/체력조건으로 보았을때 남성보다 열세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다를 바 없다. 침대에서 여성을 넘어뜨리는것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체제의 굳건함의 상징이며, 그로인해 통제된 모든것을 소유물로 생각하지만, 결국 제 전립선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트루히요는 그가 추잡하게 실현했던 인간본성의 욕구를 해소하기위해가는 길목에서 처단되는 것은 우습고도 통렬한 묘사이다. 우라니아가 언제까지 간직할 지 모르는, 유년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그 개인에 국한된다고만은 할 수 없다. 트루히요의 추종자들은 결국 그의 휘하에서 그의 아우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쓸때부터, 인류가 그 본성을 지배하기 위해 지금껏 발전시켜오고 감춰뒀던 악의 한 귀퉁이에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처녀막이 상실되는 순간, 많은 군인들과 추종자들은 그들이 갖고있던, '타인의 힘을 억눌러서 자신의 힘을 찾고, 그 억눌러진 것까지 자신이 가져가버리는 것이 아닌, 타인의 힘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힘을 존중받는' 그 이치를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추앙했던 '위대한 독재자'도 결국 침대에서 한 여성을 쓰러뜨릴 수 없음에 절규해야만 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로만이 알았다면, 많은 이들의 운명은 조금, 아니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자유를 자신이 통제해야 하는 단순하고 확고한 이치를 상실했던 시민들은 독재자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을 것이다. 

 

호들갑 떨지않기에 더욱 진한 비극 - 우라니아의 입을 빌린 작가의 고발 

2권의 해설에서도 분명 서술돼있듯이 '바르가스 요사' 는 이런 도미니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나아가 세계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독재에 대하여 단연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기에는, (대개의 위대한 소설들이 그럴테지만) 바르가스 요사의 그런 입장이 소설의 전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어디에서도 강요하지 않고, 소설가로써 차분히 써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우라니아가 지었을 법한 표정이 글에서 느껴졌다. 그는 전반에 걸쳐 트루히요의 악행을 좀더 드러내고, 신랄하게 파헤쳐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트루히요의 내면으로 침투한 세포처럼, 독재자부터 낱낱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순덩어리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보다,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더 쉬운 이치일까? 물론 그의 여성을 향한 다방면의 성적횡포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등을 돌린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모습, 모든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은 이미 완벽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묘사엔 딱히 어떤 비난적인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 대해 어디까지 비난의 마음을 갖을것인지, 독자에게 넘긴걸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지런히 잘못가고 있는 최고권력자'의 모습을 독자가 조롱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트루히요는, 개인적인 인간으로 보기엔 그 자기관리에서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그 개인적인 우수함은 결국 국가를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는 원동력이었고, 그런 개인의 통제력을, 한 거대한 집단에까지 통용하려 든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우라니아가 무표정으로 고백한 옛 진실이 그 사촌들을 무너뜨렷듯, 바르가스 요가의 (예상보다) 중립적이이고 과정되지 않은, 끊임없이 제시되는 근거와 묘사에서 독재의 지독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길들여졌을지 모를 자신 돌아보기 - 소설의 역할

독재자가 정적을 제거하고, 그의 가족들이 독재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호위호식하며, 아무 노력없이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읽어내려갔다. 물론 트루히요가 제거됐을 때,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행하는 입에담지못할 고문들과 그의 주변인들이 (특히 자식들)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강간하고 무너뜨리는 것 또한 충분히 치를떨만큼 비극적인 것임을 안다. 헌데, 마치 중립적인 입장인듯 보여지는 소설의 모습때문일까 (아니 이것은 결국 독자의 판단에 따라 나뉘겠다) 2권에 걸쳐 끊임없이 읽어야만 하고, 독재자란 인물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모습이기 때문일까. 내 예상보다 독재자에 대한 큰 분노의 감흥이 없었다.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놀라며,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많은 비극에 어느새 길들여져 있었다. 이 모든 통제를 나는 당연했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며, 폐단인가. 그럼에도 내가 믿는 한가지는, 이것이야 말로 독재의 본질을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란 것. 그것을 위해서 '요사'는 크게 강요하지 않고 그저 소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이것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작가는 우라니아에 대해, 독재로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에게 한줄기 빛을 남겨둔다. 비록 30여년도 더 흘렀지만, 우라니아가 제 가슴속에 꼭꼭 감춰둬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사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대답없는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녀는 이제 사촌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상실의 땅에서 소생을 희망한다. 그녀는 결국 상처의 시작점에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재는 진화한다. 세련되게

이 나라에는 짧은 시간동안 남부럽지 않은 독재자들을 배출했다. 애써 저 이북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사실 그쪽얘기를 하자면 너무 할말이 많을테니깐)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적 부흥기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의 업적과 폐해 중에서 어떤것을 우선으로 쳐야할지 판단할 깜냥을 아직 갖고있지 않다. 다만 '독재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것들이 비판거리가 됨은 확실하다. 우선 그 시대에는 누가 대통령이 됐던 그런 경제정책을 취해야만 했을 것이며, 정상적인 연임이라는 것과 종이한장 차이일지도 모를 독재로 인해서, 그런 일관된 경제부흥정책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생활이 윤택하기때문에 그의 독재를 비판한다고 한다. 틀린말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그런 어려운 시기에 처했던 세대들이었기에, 그의 독재도 그렇게 미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대기업위주로 키워낸 정책들은, 지금에서야 보면 한국경제에 이바지하는것으로 보이지만, 그 대기업이 크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혹독한 조건에서 일을하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금도 휘청거리고 있는가. 전 세대들은 그 시대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배은망덕'이라 표현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그런 전 세대들보다 더 혹독한 여건에서, 오로지 경제부흥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개인을 제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차이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트루히요와 박정희가 무엇이 닮았는지 가늠할 기준을 갖춰야 한다. 트루히요를 진심으로 찬양했던 수많은 도미니카 시민들 또한 그의 경제정책만을 바라보고, 30년이 지났음에도 그때가 살기는 더 좋았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트루히요의, 박정희의 독재가 아니었더라도 우수한 지도자가 경제를 이끌었을수도 있었음을 무슨 근거로 부정할 수 있는가? 

위의 주장들은 분명 오류가 존재할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저것들을 판단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박정희 이후에도 많은 대통령들이 크게 바꿔놓지 못했고,(아니 오히려 굳건하고), 그들이 경제부흥의 적임자가 아니었었음을 주장할 어느 근거도 갖고있진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것은, 어떤 경제부흥이든 뭐가됐든 그것은 독재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먹고살만하면 모든것이 충족되는 것인가?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이 <염소의 축제>를 읽고 독재자와 독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만 하는가. 밥을 굶기지 않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행복한가? 경제적 부흥을 찬양한다면, 거기까지만 해야한다. 그것이 독재를 아주 조금이라도 포함해서는 안된다. 그렇게되면, 언제라도 또 다른 독재자가 어디에서 탄생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라고 우라니아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그 당시의 것들이 아직도 공중에 떠다니고 있어.' (2권 366p)

그 경제, 경제, 경제 만을 강조해서, 지금 우리가 어느 세상속에 살고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고있지않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고. 개인에게 총기가 허락되며, 그 위에서 더 많은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되는 나라에서처럼 통제받아야 그것이 독재라고 느낄것인가? 자유를 쫓는 시민들의 모습이 웹을 통해서 진화했 듯, 권력자들의 독재도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체감하고 있지않은가? 언론의 방송이 사전심의를 받기도 하고, 정책이 정책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닌, 혈세로 만들어진 광고로 시민들을 설득하고, 웹공간에서조차 그 누군가를 비난할때 그 표현의 수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것이 과연 독재체제 아래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덮어놓고 앞뒤없는 비난은 예외로 하자) 어떻게 더 그럴듯한 연극을 연출할지 고민하는 트루히요의 모습을 우리는 먼곳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화염병과 최류탄으로 점철된 시대에 서지는 못했더라도, 나는 이 시대의 저항방식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바꾸려는 물결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를 내도, 누구 한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흔드는것은 결국 제 머리위로 숱한 돌조각을 받아내는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물결에 동의할지라도 결국 그자리에 설 수 없었던, 밥 벌어먹고 살기위해 바빴던 많은 이들처럼 나또한 내 밥그릇찾아 자연스레 뒤돌아 가는 것을 보며, 나는 나에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을 벗어난 집단생활이 지속되는 언제까지고, 유형/무형의 독재자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어떤 책임과 동시에 권리를 쥐어주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봐야한다. 그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했고 존재할 염소들에게 해야만 하는 우리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지...(중략)" (1권 142p)

자신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로 세련되게 치장된 독재의 목줄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 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 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저질러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던 우리 600년의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02년 故 노무현 대통령 대선 출정식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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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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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금이라도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서점에서 눈길 한번 안줄지도 모르는, 분위기의 책. 판타지를 많이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몇가지 이야기를 읽은 후에 느낀것은, 항상 그게 그거인 것 처럼 보이는 세계관과 쏟아져나오는 판타지소설들. 그 풍파속에서 순수문학이나, 이야기의 힘이 아닌, 언어자체의 힘을 가진 책들을 많이 접했던 독자라면, 이런 책에 흥미를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또한 예외는 아니다. 물론 기억속에서, 예전에 봤던 여러가지 판타지소설들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 줬었다. 이 '영웅의 서'도 그런 책인가? 그래. '판타지소설 같은거' 라고 누군가 말해도 그것들은 말그대로 재미있었고, 각기 나름의 깊은 울림과 사색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간될때까지 그 호기심과 기다림을 간직하지 못해 결국 내팽겨쳤던 몇몇 판타지소설들. 아마 <영웅의 서>의 2권이라는 분량이 다른 1권의 책들에 비해선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책의 사이즈 그 자체 때문인지 큰 부담까지는 없이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왈가왈부를 한다고 해도 판타지는 판타지일 터. 그저 한번 보고 상상의 끝을 달리고, 그 종착지에서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고 책을 덮기전에, 나는 잠시 현실세계를 완벽히 떠났다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가볍게 책을 들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리코가 '엉터리 사전'인 아쥬를 만나고 실제적인 이야기의 썰이 풀어지기 전 까진. 

유리코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어느날 그 평범한 나날을 깨는 비보를 듣게된다. 그의 오빠인 히로키가 동료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한명이 목숨을 잃고, 한명은 크게 다친 것. 그리고 그 히로키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상속에서 어떤 순리를 갖고 차근차근 파생되는 것이 아닌, (미스터리, 추리물등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할줄아는 작가인만큼) 격정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히로키의 돌발행동으로 유리코를 포함한 가족들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그러던 중 유리코는 어떤 검은 형체에 무릎꿇은 듯한 오빠의 형상을 보게되고, 그걸 계기로 오빠의 방에서 책 한권을 발견한다.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 책은 유리코를 많은책들이 모여있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는데 핵심이 되는 작은할아버지의 별장으로 데려간다. 여기서부터 수난은 시작된다.  

유리코는 거기에 있는 '생명을 지닌' 책들에게서 히로키에 대한 자초지종을 다소나마 들을 수 있게되고, 오빠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인 유리코보다 더 독자를 혼란스럽게, 혹은 간단한 여러가지 이론과 개념들. 

여기서부터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어찌본다면 말장난과도 같은 갖가지 혼란스러운 개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미스터리의 요소를 간직한 채 <영웅의 서> 이야기의 말미에서 보충해 주기도 한다.

일단 유리코가 사는 곳을 '테두리' 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란것은 인간세상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천체, 자연,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든 곳이다. 그에비해 유리코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테두리'란 곳은 인간이 그 '세계를 해석하려 하는 순간 태어난 것이다. 인간세상은 그 테두리 안에 속해있으며, 그 테두리는 세상보다 커지기도 했다. 

아마 나처럼 머리나쁜 독자는 초등학생인 유리코와 같은 혼란에 빠질수도 있다. 다만 한페이지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그것들의 개념이 보충설명되기도 하며, 다른예로 그려지기도 한다. 

'영웅'이란 모든 위업의 원천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이 알고있는 테두리 안의 영웅의 모습은 원천인 '영웅'이라는 이야기에서 생겨난 복사본이다. 유리코의 오빠인 히로키는 그 영웅에 홀려, '엘름의 서'라는 책을 쥐게 됨으로써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영웅'을 원하고 있어. '황의를 입은 왕'의 부정함을 알면서도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거지. 그 또한 인간의 업. 천성이라고" (2권 339p)

그리고 나아가, <영웅> 이라는 존재를 과연 '선'그 자체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애초에 태양이 비치는 곳의 반대편에는 그림자가 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빛이 강력할 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이치다. 인간은 그 영웅의 좋은 모습만을 바라보고 흉내내려 하지만, 그 방법적인 면에서 영웅의 악한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히로키는 그 영웅의 사악한 부분에 홀렸던것이다. 물론 제 스스로는 그런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선 현실을 타파하기를 바랬다. 

어쨌든, 그렇게 히로키를 찾아나선 유리코는 아슈외에도 소라, 애시 등의 동료를 만나며, 이야기와 영웅의 근원과 진실을 파헤치며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유리코는 황의를 입은 왕을 저지하고, 오빠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까?

숱한 개념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판타지 성장 드라마다. 모든것이 혼란스럽고,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나이에 어른들이 세계에 발을 하나 들여놓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근원과 배경을 탐구하고 도전한다. 

그럼에도 이 <영웅의 서>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과 그 이야기가 갖는 양날의 검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다. 아니 책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떤 이름없는 땅에서 무한대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인간세계로 들어오며, 그리고 다시 왔던곳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아내는 자' 를 통해 현실에서 어떤 형태를 띄게되고, 인간이 거기에 열광할수 있게된다. 그리고 곧 그것은 인간의 업이 되기도 한다. 자아내는 자 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러니깐 굳이 자아내는 자의 손을 빌려 이야기가 허구적으로 탄생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는 그러한 삶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걸 돌이킬 수 있다고 속이고,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이야기의 힘이야. 그것이 '테두리'의 이치야. 그것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때로는 사람 마음의 진실과도 상통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테두리'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자아내는 자'들은 죄업을진 자로 불리는 거야. (2권 260p)

살아간 흔적이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순리인데, 때때로 인간은 이야기를 앞장세우고 그 '있어야 할' 이야기 들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정의, 승리, 정복, 성공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있어야 할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은 그 방법적인 고민을 제쳐두게되고, 오로지 그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가게된다. 그런 와중에 죄를 짓고, 업을 쌓게된다. 자아내는 자 들은 그런 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만들기때문에 업을 떠안지만, 따뜻한 이야기또한 만들어 내기때문에, 그 업을 지고 살아가는것을  용서받는다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그 자체가 걸어온길이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내는 자 와 아닌 자를 구분할 필요없이 제 몫의 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은,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을 판타지라는 장르를 차용하여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얼핏 '선'으로 보이는 영웅의 모습은 그것을 따라가는 인간들이 악을 만들기도 하며, 의도치않게 악을 행한다. 어쩌면, 성인들의 문화인 폭력과, 성, 혹은 책이 아니라 영화, 게임, 만화 등으로 발전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인간이 처음에는 의도치않았던 악을 만들기도 하는 듯 싶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어디에도 존재한다. 한장의 일러스트, 한장의 사진또한 따지고보면 개별적인 이야기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일수록 인간이 요구하는 '영웅'의 모습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선망을 경계하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만물은 빛 아래서 탄생하고, 그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발생시키니깐. 공기같이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자아내느냐 에 따라 그것은 인류를 풍요롭게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쇄락으로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란 뭐지, 유리?" 하고 애시는 물어왔다.  

-중략- 

"'자아내는 자'만이 창작자는 아니야. 인간은 모두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엮어내지." 

"그러니깐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거야.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도록."  (2권 331p)

이야기는 먼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글에서 보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글자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끝없이 파생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내는 자'가 만들어내는 문장이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행동'으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느냐에 따라 셀수 없는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들었던 책을 무겁게 내려놓는다. 어쩌면 난, 유리코보다 더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시간성'을 아주 아름답고, 넘치는 상상력으로 표현해냈던 '모모'가 떠오른다.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 그리고 고정됐던, 혹은 생각조차 해보지못했던 이면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판타지로 엮어놓은 책이 어디 흔할까. 저자는, 이야기가 탄생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엄청난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녀는 펜을 통해 이야기를 짓는, 업을 지닌 '자아내는 자'이며, 우리또한 이 책을 읽는 행위에 의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자아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인류가 행동을 통해 만들었던 이야기서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지혜를 물려주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벽화들을 통해 이야기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곧 이야기의 역사라 봐도 무방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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