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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스 - 2010년 퓰리처상 수상작
폴 하딩 지음, 정영목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팅커스』는 목사였던 할아버지, 땜장이이자 행상인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시계 수리공이었던 아들, 이 삼대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시계를 고치는 일로 가족을 부양해온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된다. 병상에 누운 조지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8일간, 마치 환상을 보듯 추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아버지가 추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까지고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그 애틋한 기억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팅커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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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그 세심한 문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진정 '퓰리처상 수상작이란 이런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은 매우 아름다웠고, 정교했다. 어떨땐, 그 아름답고 정교한 문장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황홀하고, 어떨땐 몇 문장 사이로 그런 매혹적인 문장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을 요동케 했다.
책 소개와 같이 시계 수리공이었던 '조지'의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장은, 그 문장과 문장사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구체적이며 몽환적이다. 책의 앞부분부터, 나는 꿈과 현실사이에 오버랩되는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와 마주친다.
지붕이 무너지면서 다시 나무와 못, 타르지와 지붕널과 절연재의 사태가 일어났다. 모루의 함대처럼 푸른빛을 가로질러 떠가는, 위가 납작한 구름들로 가득 찬 하늘이 보였다. 조지는 아픈 몸으로 밖에 나갔을 때의 그 습하고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구름이 움직임을 중단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그의 머리로 곤두박질쳤다. 하늘의 푸른빛이 그 뒤를 이었다. 마치 배수구로 물이 빠지듯, 높은 곳으로부터 그가 있는 너저분한 콘크리트 구멍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다음에는 별들이 떨어지며, 제자리에서 떨어져나온 하늘의 장식물들처럼 그의 주변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고정한 압정이 빠진 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검은 공간이 지하실의 잡동사니 더미 전체 위로 늘어져, 조지의 혼란스러운 소멸을 덮어버렸다. (11~12p)
이것들을 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의 비밀창고에서 먼 옛날의 해묵은 먼지가 가득내려앉은 글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가 소설인지, 일기인지도 구분 못하는 바보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구름위의 글자에 주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속의 불빛을 따라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해 낼 재간이 없었다. 황홀과 고통이 동시에 내 눈을 흔들어놓았다. 머리는 진동했고, 앞뒤 문맥을 재차 읽어보며, 어디까지가 그의 묘사이고, 어디까지가 행동인지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명확히, 묘사임을, 알아챈다 하더라도, 그의 문장은 그것을 믿게하는 힘이 있었다.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었고, 정교했다. 마치 중간중간 언급되는 시계조립의 교본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부분이 그렇진 않다. 아마 정말, 모든 표현과 묘사가 이러했다면, 정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거나,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 멀었어' 라면서 말이다. 어쨌든 요 근래에 소설하나에 이렇게 시간을 쏟은건 처음이었다. 날 위해서, 내가 원해서 들었던 책이건만, 곤욕을 치르기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매혹적이다. 마치 장미의 모습과 똑 닮았다. 아니, 마약과 닮았을까. 문장들을 읽어내는게 때로는 정말 고단한 일이 될지라도, 그 아름다운 표현은 이책을 끝까지 들기엔 충분했다.
이야기의 진행은 크게 조지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아버지인 하워드, 그리고 다시 그 하워드의 아버지로 향한다. 다만, 모든 묘사가 기억이라는 것에 근거하지만, 보편적인 현재는 조지가 되기에, 조지의 투병생활의 모습은 간간이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그리고 케너 대븐포트 목사의 [합리적 기계공] 이란 책의 내용또한 중간중간 계속해서 등장한다. (목사라는 관점과 글을 쓰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락없는 하워드의 아버지인데, 연도에서 다소 헷갈린다.)
네 아버지가 설교에서 늘 말하고 또 집에서 너에게 말하듯이 그 불확실성은 아름다운 것이며, 더 큰 확실성의 일부라는 것을 기뻐하라. 그리고 도끼가 장작을 물고 들어갈 때, 네 가슴 아픔과 네 영혼의 혼란이 곧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아직 인간이라는, 아직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해 열려 있다는,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그것을 받았다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라. 그리고 네 가슴 아픔에 화가 날 때는 기억하라. 너는 곧 죽어서 땅에 묻힐 것이라는 사실을. (89p)
적잖은 문장들이, 삶을 꿰뚫는 통찰위에 아름다운 무늬로 치장되있다. 책을 읽을 때, 이야기 전체가 가슴에 남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디를 접고, 어디를 밑줄그어야 할지 모를정도로 훌륭한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 있는데, 이 <팅커스>는 당연히 후자이다.
<팅커스>를 아우르는 이 삼대의 남자들은, 아니 이 삼대가 이룬 모든 가정들은 오묘하고, 흐릿하다. 더욱이 조지의 아버지인 하워드,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보면 지독한 몽상가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사람들이다. 하워드가 기억하는 그의 목사아버지 또한 유령같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으며, 언젠가 하워드는 사라진 아버지를 찾으러 어느 물가에 종일 몸을 담그고 있다가, 발작증세를 얻게된다. 땜장이인 하워드는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갖고 조지가 도망쳤을 때도 오히려 조지가 멀리 갔기를 바랬고, 그의 발작을 견디다 못한 부인이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는 사실을 알고선, 멀지않은 날에, 물건들을 모두 팔아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집나간 그(하워드)가 단 한번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마주치는 기억을 생에 마지막에 떠올리는 조지의 마지막 회상-곧 이야기의 마지막-은 모든 것을 마무리짓는 묘한 절묘함이 있었다.
조지와 하워드, 그리고 하워드의 아버지가 모두 몽환적인 존재가 되는 근거는 어쩌면 단 하나이다. 이 모든것들이 조지의 기억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억이 풀어해쳐지는 과정에서 인칭은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그 모든것들도 기억이란ㅡ확실하고도 미지의 영역ㅡ에 것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인물들의 불확실성과 겨우 형태를 유지하지만 톡 건드리면 흩어질 가루들 같은 인물들이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팅커스>에서 그려지는 구체적인 묘사야 말로,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한 나에겐 '득'이기도 하고, '실'이기도 하다. 꽤나 구체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머릿속에 그려넣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 한숨이 나올때도 있다. 더불어,<팅커스> 문장은 때론, 그 길이에, 호흡이 압도 당할때가 있다. 들숨과 날숨을 어디에서 템포를 맞춰야 할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독자는, 그 문장 사이에서, 문장과 문장사이가 아닌 하나의 문장이 이뤄지는 그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잃는게 이 '폴 하딩' 이란 작가가 의도하는 게 아닐까? 때론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기억이란 공간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는건 어쩌면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인지하고있지 못할 뿐이지.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쉽진 않았지만, 즐겁기도 했던 책이다. 언젠가 한번 다시 들춰볼 것 같다. 아마 그때쯤이면 지금 희미하게 이해했던 순간들을 조금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둔한 눈으로는ㅡ물주머니와 신경, 기적 그 자체, 고움 그 자체, 빛을 포착하는 것. 그러나 본질은 숲도 빛도 어둠도 아니야. 내 서툰 눈길에, 내 둔한 관심에 흩어져버리는 다른 어떤 것이야. 잎과 빛과 그림자와 물결치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누비이불이 혹시 갈라지면,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잠깐 볼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라. 자꾸 움직이다 꿰맨 곳이 저절로 느슨해질지도 모르지. 누가 느슨하게 풀어줄지도 모르고 그것을 꿰맨 존재가 잘못해서 길가의 사탕단풍 잎들 속에 헐렁한 바늘땀을 하나 남겨놓았을지도 몰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ㅡ별들의 빛, 중력, 어둠일까ㅡ실의 그 땀 하나가 바람에 움직이다 어떻게 헐거워진 거야. 바람은 늘 하얀 봉오리와 녹색 잎과 핏빛과 주황색 잎과 헐벗은 가지를 걱정하며 가만있지를 못하잖아.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이 세상을 짠 재료 가운데 두 조각 사이가 헐거워져, 어쩌면 거기에 딱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구멍이 생겼는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아주 운이 좋아서 이 서랍이 달린 수레에 앉아 반짝이는 잎들 사이에서 그 구멍을 발견하고, 아주 민첩해서 은빛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고, 아주 용감해서 그 찢어진 틈에 내 손가락을 집어넣는거야. 손이 닿기만 해도 큰 고요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 구멍에. (67p)
그것은 특별하진 않을것이다. 마치 위의 부분처럼, 딱 내 눈이 자리잡을 만한 단어사이의 여백을 잡아내는 일. 그래서 그 사이를 이어주는 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뿐일지도 모를일이다.
이왕 책을 펼쳐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라는 구절과 마주쳤다면, 이제부터는 아예 딴 세상이라 생각하고 신발 끈을 조여맬 것, 아니, 신발을 벗어버릴 것 _ 정영목(번역가)
심지어 새 둥지를 만다는 방법에 관한 짧은 구절조차 눈부시다 _ 퍼블리셔스 위클리
모두가 맞는 말이다. 나에게 는 였다.